‘일년지대계’도 못되고 구겨졌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3.11.0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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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제도 간소화 공약’ 사실상 백지화…학생·학부모 혼란만 키워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했다. 100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은 불과 5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춤을 췄다. 말도 수시로 바뀌다 보니 학생과 학부모들의 혼란만 가중시켜왔다. 역대 정권이 하나같이 이런 구태를 반복했다.

박근혜정부라고 예외가 아니다. 지난 대선 때 내세웠던 박 대통령의 교육 공약은 ‘대입 간소화’로 집약된다. 우리나라 대학 전형의 종류는 3000여 가지나 된다. 수능·학생부·논술 등 평가 요소를 반영하는 비율이 그렇다는 얘기다. 현재 전국 주요 대학의 전형 방법은 평균적으로 수시 5.2개, 정시 2.6개다. 올해 기준으로 전형 방법이 20개가 넘는 대학도 있다.

2012년 10월4일 당시 박근혜 대선 후보가 울산여자상업고를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8월27일 시안 발표 후 공약 구체화 내비쳐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입 전형을 담당하는 교사가 아니면 교사들조차 입시 상담에 애를 먹는다. 이런 입시 전형을 단순화하겠다는 게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교육부는 지난 8월27일 ‘2017년 대입 제도 간소화 시안’을 발표하며 공약을 구체화하는 듯했다. 핵심은 문·이과를 통합하고,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을 없애겠다는 것이었다. 교육계에서는 ‘혁신적인 제도’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교육부는 전국 5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청회를 열었다.

지난 10월10일 1차로 2015~16년 대입 개편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존 수능 제도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사교육을 부추겼다고 지적받아온 수시 전형에서 수능 최저 학력 기준 허용, 대학별 고사(논술·구술·적성고사) 유지, 공인 어학 인증시험과 외부 수상 실적 등 스펙 쌓기 특기자 전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은 성명을 내고 “정부는 ‘고른 기회 입학 전형 확대’를 공약했지만 구체적 내용이 없고, 이명박 정부가 속도전으로 밀어붙여 대입에서 공정성과 신뢰성을 훼손시켜온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개선안도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만약 지금의 정부안대로 간다면 학생·학부모의 부담이 줄지 않고 사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스펙을 많이 쌓을수록 대학 진학은 쉬워질 것이며 학교 교육은 정상화되지 못한다”고 우려했다.

문제는 ‘문·이과 통합 수능’이 시행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2017학년도 대입 제도 확정안’이다. 교육부의 10월24일 발표를 보면 2015·2016년과 마찬가지로 대입 제도 개선안은 현행 제도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한국사 수능 필수와 절대평가를 9등급으로 나눈 것이 전부다. 대입 전형 간소화도 당초 취지와는 한참 멀어졌다. 수시와 정시를 합쳐서 봐도 전체 1677개 정도에서 1290개 수준으로 대학 한 곳당 평균 1.8개만 줄어들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2017학년도 수능 체제는 현행 골격을 유지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융·복합형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수능 체제 개편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당장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현 정부에서는 교육과정 개편을 준비하고, ‘대입 간소화’의 최종 결정과 적용은 차기 정부 몫으로 넘길 방침이다.

이에 따라 박근혜정부는 현행 ‘2009 개정 교육과정’을 바꾸기 위해 2014년 8월까지 교육과정 총론을 만든다. 2015년 5월까지 각론을 개발해 ‘2015 개정 교육과정’을 완성할 계획이다. 이어 2016년 8월까지 교과서를 개발하고, 2017년 8월까지 교과서 검정도 완료해 2018년 3월 고교 1학년에 새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적용한다는 구상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이 대학에 가는 2021학년도에 문·이과 수능을 통합하는 수능 개편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뚜껑 열어보니 달라진 게 없다

이에 대해 교육계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박근혜정부의 임기는 2017년까지다. 2018년은 새 정부가 들어서는데, 현 정부의 교육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럴 경우 박근혜정부가 추진한 5년간의 교육 로드맵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임기 이후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명박 정부가 도입한 수준별 수능을 폐지하기로 했고, 국가영어능력시험(NEAT)을 수능 영어로 대체하려던 구상도 백지화됐다. 여기에다 자율형 사립고를 대거 지정한 고교 다양화 정책도 폐기했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이 잘됐다기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 정책이 춤을 췄음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다.

‘문·이과 통합 수능’은 대입 간소화로 가기 위한 선결 과제였다. 교육부가 당초 가장 유력하게 검토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현장 혼란 가능성’을 이유로 철회됐다. 그만큼 ‘대입 간소화 공약’이 급조됐거나 박근혜정부의 교육 로드맵이 허술했음을 보여준다. 당초 약속했던 ‘대입 간소화’는 손도 못 대고 오히려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 여론이 거셀 수밖에 없다. 공청회까지 개최했지만 여기서 나온 의견들은 확정안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말잔치로 끝난 것이다.

박범이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은 “문·이과 융합안에 대해서는 2021학년도에나 적용해볼 수 있다고 했다. 추진 의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지 않되, 현재 여건을 함께 개선해야 한다는 각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문·이과 융합안 추진에 대한 세부 추진 계획이라도 포함시켰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10월28일 정부서울청사 후문에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정부의 대입 전형 간소화 방안과 관련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 지정

‘일반고 교육 역량 강화 방안’도 시안대로 되지 않았다. 그동안 자율형 사립고(자사고)는 성적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해왔다. 이로 인해 일반고 운영이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런 실상을 잘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박홍근 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1~13년 서울·연세·고려대 등 서울의 11개 주요 대학 입학생의 출신 고교를 분석해보니 2011년 74%, 2012년 75%를 차지했던 일반고 출신 입학생 비율이 2013년엔 전해에 비해 13% 하락한 62%다.

이에 반해 2009년과 2010년에 각각 도입된 자율형 공립고와 자사고가 본격적으로 입시 성과를 내기 시작한 올해 자율고 입학생 비율은 11%였다. 이것은 일반고 출신 신입생 비율이 떨어진 만큼 자율고 출신이 올라갔음을 보여준다. 교육부도 이런 내용을 인지하고 개선안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으나 확정안에는 넣지 못했다.

시안에서는 평준화 지역 자사고 학생 선발을 중학교 내신 성적 제한 없이 ‘선지원 후추첨’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확정안에는 서울 지역 자사고 24곳의 경우 추첨으로 1.5배수를 선발한 뒤 ‘창의 인성 면접’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로 했다. 기존의 면접 방식과 다른 것은 ‘창의 인성’에 무게를 뒀다는 것이다. 자사고의 학생 선발권이 오히려 더 확대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선발 시기도 전기 선발을 그대로 유지했다. 서울 지역 선발 방식을 택하면 사회통합 전형 미충원 시 10%까지는 일반 전형 학생을 선발할 수 있다. 당초 지정 기간이 끝나는 대로 일반고로 전환하려고 했던 자율형 공립고 역시 시·도교육감 평가를 통해 재지정이 가능하도록 했다. 단, 2015학년도부터 후기 우선 선발을 폐지해 일반고와 함께 학생을 선발한다.

특목고에 대해서는 지정 취소 이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외국어고나 국제고가 이과반이나 의대 준비반을 운영하는 등 설립 취지에 맞지 않게 교육과정을 운영하다가 적발되면 성과 평가 기한(5년) 이전이라도 지정을 취소하기로 했다.

교육부는 수시에서 수능 최저 학력 기준 폐지를 적극 검토했으나 완화하는 선에서 존치하기로 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을 폐지할 경우 수시 모집 축소, 논술 응시 인원 확대로 인한 사교육비 증가 등 부작용이 우려돼 완화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2017학년도에도 2015~16학년도와 동일하게 수시 모집에서는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을 등급으로만 설정하고 백분위 사용은 지양한다. 이렇게 되면 2017학년도에도 수능 비중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한국사는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된다. 다만 학생의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수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문제는 쉽게 출제하고, 절대평가(9등급)를 도입해 등급만 제공한다. 이를 위해 교육부는 출제 경향과 예시 문항 등을 개발하고 내년 상반기까지 학교에 안내해 교사와 학생이 사전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대입에서의 한국사 활용 여부는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하게 된다. 다만 한국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대학에 한해서는 고등학교 교육 정상화 기여 대학 지원 사업과 연계한다.

수능 시험 날짜는 11월 셋째 주로 미뤄진다. 교육부가 마련한 당초 시안에서는 3~4주가량 미루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추위 등 학생들의 불편을 고려해서 정해졌다. 따라서 올해 11월7일 치러지는 수능은 2015~16학년도에는 11월 둘째 주에, 2017학년도에는 11월 셋째 주로 한 주씩 늦춰진다.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대학별 시험이나 특기자 전형 스펙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학교와 학생들 사이에 그토록 비판의 대상이 됐던 대학별 고사(대학별 논술고사, 구술고사, 적성평가 등)가 존치됐고, 수시 전형에서 수능 최저 등급도 그대로 유지했다”며 “2017학년도 대입 제도에서 2015학년도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학생들의 대입 부담은 지금의 고 1·2 학생이나 중3 이하의 학생이나 거의 달라진 것이 없게 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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