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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말을 엿듣다니 더는 못 참아

미국 NSA 도청 파문 확산…오바마는 거짓말 논란으로 궁지 몰려

김회권 기자 ㅣ khg@sisapress.com | 승인 2013.11.05(Tue) 11: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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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볼티모어-워싱턴 파크웨이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포트 미드’라고 적힌 인터체인지가 나온다. 그곳을 빠져나오면 ‘시긴트(sigint) 시티’라는 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긴트는 신호정보 수집 프로그램을 뜻한다.

이상한 이름이 붙은 이 도시의 넓이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 정도인 18㎢에 불과하지만, 독립된 자가발전 장치를 가지고 있고, 외부와 단절된 5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다름 아닌 도청이다. 여기가 지금 세계 최대의 도청 조직이 돼버린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본거지다. NSA의 규모에 관해서는 무수한 설이 난무하는데, 대체로 세계 약 2000개 지역에 시설을 운영하고 있고, 한 해 예산은 30억 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중앙정보국(CIA)의 10배 정도로 현재 미국 첩보 활동의 중심인 곳이다.

   
ⓒ AP연합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인 NSA가 지금 숨죽이고 있는 이유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도청 의혹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NSA가 세계 각국 정상들의 통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독일 <슈피겔> 온라인판은 “미국의 NSA와 CIA가 우방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 정상들을 도청했다. 세계 각지의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거점으로 하는 특별수집부서(SCS)라고 불리는 곳에서 이루어졌는데, 2010년 8월13일에 기록된 NSA 문서에 따르면, SCS는 지점이 80개 이상인 것으로 나와 있다. SCS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아인슈타인’이라는 안테나를 대사관 건물 옥상 등에 비밀리에 설치해 휴대전화나 무선랜, 위성전화 등을 가로챘고 정보 수집 대상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폭로했다.

현재 도청 의혹의 파장은 미국과 독일 간의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유럽의 리더국인 독일 정부의 수장을 도청했다는 사실에 독일은 분개하고 미국은 당황하는 모양새다. 그 기간이 짧은 것도 아니다. <슈피겔>에 따르면, NSA가 메르켈 총리를 도청한 기간이 10년 이상일 수 있다고 보도했는데, 그럴 경우 총리가 되기 전부터 감시 대상이었던 셈이다. 메르켈의 휴대전화 번호는 2002년부터 감시 대상 리스트에 기록돼 있었는데, 그가 총리에 취임한 때는 2005년이다. 2002년에 메르켈은 당시 야당이던 기독교민주동맹(CDU)의 대표를 맡고 있었다.

도청 파문으로 미국과 독일 간 갈등 표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거짓말 논란도 독일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메르켈 도청 의혹이 제기된 때는 10월23일이었다. 독일 정부는 성명을 통해 “메르켈 총리의 휴대전화가 미국 정보기관의 감시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밝혔다. 성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메르켈의 개인 휴대전화다. 메르켈이 노키아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은 여러 차례 사진에 찍혔다. 같은 날 오바마는 직접 메르켈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즉시 그만두게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과거의 도청 여부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 일간지 <빌트>는 10월27일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에 도청과 관련해 정보기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오바마의 해명이 거짓이란 주장이다.

독일이 도청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는 메르켈 총리의 개인사에서 비롯된다. 공산주의 체제인 동독에서 35년을 보냈던 메르켈은 감시하에 놓이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치인이다. 당시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는 국민의 삶에 대한 모든 부분을 감시하려고 했다. 슈타지의 국내 첩보 활동 결과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면서 드러나는데, 당시 그들이 보유한 문서를 진열하면 100km 길이의 서가를 채울 정도였다.

“친구 사이에 스파이 행위는 이유를 불문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10월24일부터 이틀간 열리는 유럽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브뤼셀에 도착한 메르켈 총리가 ‘신뢰의 붕괴’에 관해 발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에서 미국의 친구는 독일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프랑스 <르몽드>는 에드워드 스노든으로부터 입수한 문건을 인용해 “NSA가 2012년 12월10일부터 2013년 1월8일까지 약 30일에 거쳐 프랑스 내 전화 통화 7030만건을 도청했다”고 보도했다. 스페인 일간지 <엘문도> 역시 “같은 시기 NSA가 스페인 국내 전화 통화 6000만건 이상을 도청하고 있었다”고 보도했고, 이탈리아 주간지 <에스프레소>는 “한 달 동안 NSA가 이탈리아 국내 통화 4600만건을 도청했다”고 보도했다.

TTIP 핵심 의제로 떠오른 도청 문제

도청 파문과 맞물려 브뤼셀에서는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에 관한 논의가 흘러나왔다. TTIP는 유럽연합(EU)과 미국간의 FTA(자유무역협정)로 양자 모두에게 중요한 협상이다. EU는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7개국)의 금융 위기가 계속되면서 교역을 확대해 성장 동력을 얻어야 했다. 미국 역시 둔화된 경제성장률과 고용률 상승을 위해서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세계 GDP의 절반을 차지하는 양대 경제권의 FTA 추진은 세계 최대의 단일 시장을 만드는 작업으로 그동안 서로 샅바 싸움이 치열했다.

그런데 EU 관계자들이 도청 파문 이후 회의론을 들고 나왔다. 유럽의회의 마르틴 슐츠 의장(독일 사회민주당)은 “미국이 우리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회의 준비를 할 수 있겠나”라고 되물었다. 독일 내 정치 상황도 미국의 입장을 난감하게 하고 있다. 메르켈은 이제 막 선거를 끝내고 연립정부 협상에 착수했다. 협상 파트너인 사회민주당은 이번 도청 사건을 중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그마르 가브리엘 사민당 대표가 “미국의 첩보기관이 유럽에서 사이버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경우, EU와 미국이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을 정도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10월29일 대변인 성명에서 “NSA의 감시 행위는 TTIP와는 별개 사안이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비비안 레딩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같은 날 “유럽인에 대한 NSA의 첩보 활동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TTIP 협상에서 이미 핵심 이슈가 됐다”고 주장했다. TTIP는 오바마 2기 행정부의 핵심 사업이다. 민주당은 내년 중간선거 이전에 매듭을 지어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놓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갑질’에 능한 미국이 지금은 오히려 아쉬워진 상황에 놓여 있다.

유럽은 미국의 거대한 정보기관을 상대로 매번 무력감을 느껴왔다. 그래서 지금 유럽은 미국 성토장이 되었다. 이제는 유럽 밖에서도 성토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미국과의 협의를 요구한 곳은 한국을 비롯해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브라질, 인도 등이다. <슈피겔>에 따르면 SCS를 설치한 지역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SCS가 설치되지 않은 국가인 일본 언론들은 “주일 미군기지가 있기 때문에 이번 SCS 지역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10월29일,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 그 뒤로 일부 방청객이 도청에 항의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epa연합
“NSA가 한국도 도청…곧 기록 공개할 터”

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올해 6월 미국 국가정보국(DNI)의 데니스 블레어 전 국장은 “우리는 동맹국의 통신을 도청하고 있지 않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이번 독일의 경우에서 보듯 미국이 이야기한 동맹국은 첩보동맹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다섯 개의 눈’을 말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즉 나머지 우방국은 해당되지 않는 셈이다. NSA 도청 특종으로 유명한 전 <가디언> 기자 글렌 그린월드가 “NSA가 한국에 대해서도 도청을 해왔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에 대한 도청 기록을 정리해 공개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볼 때 한국에 관한 도청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 세계적인 비판은 미국 내부를 혼돈 속에 밀어넣었다. 그동안 NSA의 정보 수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다이앤 파인스타인(민주·캘리포니아) 상원 정보위원장도 우방을 대상으로 한 도청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스노든 사건이 드러났을 때도 우방국과 의회는 오바마 정부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은 자제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청으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몰라도 도청 사실이 드러나면서 입은 내상은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NSA의 무서운 감시 시스템 X-Keyscore 


NSA는 ‘X-Keyscore’라는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몇 번의 조작으로 사용자가 인터넷상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을 파악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여기에는 채팅 내용이나 이메일 그리고 어떤 사이트를 열람했는지 등이 기록된다.

시스템이 사용자를 식별하기 위한 정보로 사용하는 것은 이메일 계정이다. NSA가 모은 인터넷상의 트래픽 및 메타데이터는 이메일 사용자 이름이나 도메인을 통해 검색된다. 처음 이런 사실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어떤 사람의 개인 이메일 주소를 알면 그 사람이 누구든 인터넷상의 트래픽을 알아낼 수 있다. 당신 회사의 관계자든, 법원의 판사든, 혹은 대통령이라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X-Keyscore가 가진 위력이다.

이 시스템은 NSA의 애널리스트들이 허가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제작된 교육 매뉴얼에 따르면, 트래픽의 기점 혹은 종점이 미국일 경우 다양한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 등 미국을 종점으로 하는 소셜 미디어 데이터도 검색이 가능하다. 하지만 NSA는 이런 사실을 부정했다.

스노든에 따르면, 하루에 수십억 개의 데이터를 수집하기 때문에 데이터는 영구 저장되지 않고, 데이터베이스에 수일 정도만 저장된다. NSA는 그사이 데이터에서 특정 인물들의 인터넷과 전화 통신 기록을 수집하거나 블로그 기사와 메일과 같은 공유 콘텐츠 내에서 특정 단어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주로 해외 인물에 한정돼 있는 수집 활동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미국 국적의 인물이 섞이기도 한다. NSA는 당시 스노든의 이런 발언에 대해 “X-Keyscore는 NSA의 합법적인 해외 첩보 시스템의 일부다. NSA의 데이터 분석가가 무단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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