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반납하라 학교 측 못 내놓는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3.11.1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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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보관 조선 왕실 어보 2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에는 국내 대학 박물관의 효시인 ‘고려대 박물관’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설립돼 올해로 79년이 된다. 그런데 고려대 박물관에는 종묘에 있어야 할 국보급 유물인 ‘어보 2점’이 보관돼 있다.

조선 태종의 비이자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의 금보 1점과 현종 비 명성왕후의 옥보 1점이 그것이다. 원경왕후의 어보는 정방형의 육면체 위에 거북이가 올려져 있다. 현종 비의 것은 옥으로 만들어졌으며 거북 머리 위에 왕(王)자가 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박물관 전경. ⓒ 시사저널 구윤성
조선 왕실 어보는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 존호를 올릴 때 사용하던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을 말한다. 임금의 도장은 외교 문서나 행정에 사용했던 ‘국새’와 의례용으로 사용했던 ‘어보’로 구분할 수 있다.

임금이 대외적으로 사용하던 집무용 도장인 국새와 달리, 어보는 각종 행정 문서가 아닌 왕실의 혼례나 책봉 등 궁중 의식에서 시호·존호·휘호를 올릴 때 제작돼 일종의 상징물로 보관하던 것이다. 왕과 왕비뿐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도 어보를 받았고, 왕과 왕비의 어보는 사후 왕실 사당인 종묘에 안치했다.

기록에는 조선 왕조에서 어보 총 366과가 제작된 것으로 돼 있다. 이 중 현재 전하는 어보는 323과에 불과하다. 국립 고궁박물관이 316과를 소장하고 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4과, 고려대 박물관에 2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 미술관에 1과 등 총 7과가 외부 기관에 소장돼 있다. 나머지 43과의 행방은 묘연하다.

한국전쟁 때 미군 병사가 불법 유출

종묘에 보관됐던 어보 중 상당수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에 의해 약탈돼 국내외에 불법적으로 유출됐다. 그중 2과가 고려대에 소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어보 절도 사건은 미국 측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미국 메릴랜드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미국 국무부의 통화 기록, <볼티모어선>의 기사 등에서는 당시 어보 47과가 분실됐고, 주미 한국 대사가 미국 정부에 분실 사실을 통지한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언론 보도에서도 미군의 어보 절취 사건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행정 원칙은 미군이 어보를 소지한 경우 압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 미군이 지니고 있던 어보를 서울지구 계엄민사부에서 압수한 적이 있다. 1952년 2월28일 미군기지 사령부 소속 하사로부터 1과의 어보, 4월24일 미군 헌병사령부 소속 헌병 하사로부터 1과의 어보를 서울지구 계엄민사부에서 압수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그렇다면 미군이 절취한 것으로 추정되는 어보 2점이 어떻게 고려대에 가게 됐을까.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 스님)는 최근까지 2차례에 걸쳐 고려대 박물관에 공문을 보내 두 점의 어보는 한국전쟁 당시 종묘 혹은 덕수궁 박물관에서 미군이 절도한 도난품으로 국가에 반납해야 할 물건이라며 반환을 촉구했다.

이 단체는 그 근거로 1950년대 한국 정부가 미국 국무부에 분실물로 신고한 어보의 크기·모양·재질 등이 일치하며 미국 정부도 ‘조선 왕실 인장’이 미군 병사에 의해 절도된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고 밝혔다.

고려대 박물관에는 구입 일자, 구입 가격 등의 기록은 남아 있지만 자세한 구입 경위 등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때문에 고려대는 무조건 ‘불법’으로 단정 짓는 것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고려대 박물관 관계자는 “불법이라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어보를) 구입하지 않았다면 해외로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 취득한 지 수십 년이 넘었고, 그동안 숱하게 공개하고, 전시하고, 출판하고 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혜문 스님은 “고려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 왕실 어보는 명백한 도난품으로 사사로이 거래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 물건은 1950년 한국 정부의 도난 신고가 있었고, 미국 국무부가 ‘원산국 반환’을 추진하기 위해 행방을 추적했던 물건임에 틀림없다”며 “어보는 왕기(王機)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민간에 소장되면 안 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반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단체는 또 고려대의 어보 소장 경위 등을 수사 요청하라며 문화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문화재청은 10월31일 회신을 통해 “우리 청에서는 고려대 소장 어보에 대한 국가 귀속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외부 법률 자문가 2곳에 자문을 요청했다. 그 결과 민법에 의거한 시효 취득으로 인해 고려대 소유권 인정 가능성이 높아 법적으로는 국가가 회수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반환하도록 강제성을 부여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고려대 박물관 수사 요청 요구에 대해서는 “실제적인 법률적 판단을 받아보기 위해 사법 당국에 수사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유형문화재과 관계자는 다른 말을 했다. “당장 수사를 요청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법 당국에 수사를 요청할지 내부 검토를 한 후 결정하겠다는 뜻이다”라고 밝혔다. 혜문 스님은 “수사 요청을 하지 않을 것이면 안 하겠다고 확실한 입장을 밝혀라. 만약 거절한다면 우리는 바로 행정소송에 들어갈 것”이라며 문화재청의 소극적인 태도를 질타했다.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명성왕후 옥보(위)와 원경왕후 금보(오른쪽). ⓒ 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문화재청 ‘수사 요청’ 말 바꾸기

실제 LA 카운티 미술관(라크마)은 지난 9월 소장하고 있는 문정왕후 어보를 조건 없이 한국 정부에 반환하겠다고 발표했다. 라크마 측은 “도난품인 경우 반환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으므로 한미 간 우호의 차원에서 한국 정부에 반환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라크마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절취한 장물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를 압수해 한국 정부에 반환해달라는 취지로 미국 국토안전부에 수사 요청서를 보내기도 했다. 대검찰청도 라크마에 있는 문정왕후 어보에 대해 별도로 수사를 요청한 바 있다.

혜문 스님은 “라크마에 있는 문정왕후 어보도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미국도 적극적으로 수사 요청을 하고 도난품을 반환하기로 했는데, 이에 비하면 우리의 문화재청은 고려대 불법 소장품에 대해 소극적으로 일관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중 잣대”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한국전쟁 당시 분실돼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한 조선 왕실 어보가 40과가 넘는다. 이것들은 거의 미국이나 국내 어딘가에 은닉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재청이 고려대가 보관하고 있는 어보 2과에 대해 침묵하고 선의 취득을 인정한다면 다른 어보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포기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어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고려대 측이 자발적으로 국가에 귀속시키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조만간 고려대와 협상을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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