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치료하던 손으로 한글을 치료하다
  • 김중태│IT문화원 원장 ()
  • 승인 2013.11.1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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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세벌식 한글타자기 만들어 한글 기계화 이끈 공병우 박사

대한민국 정보기술(IT) 역사의 출발점을 언제로 잡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최초의 한글타자기가 만들어진 1914년이나 공병우 박사의 한글타자기가 발명된 1949년을 정보화 원년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IBM의 개인 휴대통신(PCS)이 도입된 1961년, 또는 이만영 박사에 의해 최초의 전자계산기가 만들어진 1962년도 IT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IT 역사의 출발점은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한글 기계화가 뿌리내리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 공병우 박사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공병우 박사는 1949년 세벌식 한글타자기 및 글판을 만든 이로, 한글의 기계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한국이 낳은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공 박사는 1938년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 의원인 공안과 의원을 개설한다. 한국 최초의 쌍꺼풀 수술 또한 공 박사가 했다. 그가 이룬 최초의 역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1958년에는 최초로 콘택트렌즈를 도입하고 시술했으며 한국콘택트렌즈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국내 안과의 역사를 일궈냈다.

처음에는 한글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의학박사로 출발했으나 광복 후부터 한글 기계화 운동에 주력했다. 1949년 지금까지도 가장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개발했다. 공 박사는 한글타자기를 ‘전국과학전람회’에 출품하고 1949년 10월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1958년 10월에는 한글타자기 발명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큰 사진은 공병우 박사. ⓒ 김중태 제공작은 사진은 공 박사 집에서 함께한 한글 동아리 지기들. 뒷줄 맨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필자인 김중태 원장.
의학 박사에서 한글 전파사로

한글타자기는 1914년 이원익씨가 영문타자기에 한글 활자를 붙여 만든 것이 최초이나, 실질적으로 한글 기계화 보급 원년에 들어선 시기는 공 박사가 가로로 찍고 가로로 읽는 과학적인 세벌식 타자기를 고안해 특허를 취득하고,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에서 상품화한 1950년이라고 할 수 있다. 공 박사가 낸 특허는 한국인이 미국에 낸 ‘최초의 특허’라는 역사적 의미도 가진다.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인 공 박사는 한글 창제 원리에 맞는 세벌식 기계화를 이끌면서 한글을 가장 한글답게 가꾸는 데 노력했다. 이후 1958년 김동훈씨가 좀 더 예쁜 출력을 위해 자음 2벌과 모음 2벌 및 받침 1벌을 갖춘 5벌식 글자판을 개발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타자기의 글판 비율은 공병우식 세벌식이 60%, 김동훈식 5벌식이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네벌식이나 두벌식은 존재 의미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 10월 상공부에서 시중의 흐름과 상관없이 네벌식 표준 자판 시안을 발표하고, 1969년 7월에는 과학기술처에서 네벌식 타자기를 한글타자기의 국가 표준으로 정하는 일이 발생한다. 여기에 인쇄 전신기(텔레타이프)용으로는 두벌식을 표준으로 확정하면서 글판(자판) 논쟁이 발발한다. 1982년 과학기술처가 두벌식 한글 자판을 컴퓨터의 표준 자판으로 확정하고, 1985년에는 컴퓨터와 타자기의 자판 배열을 통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한글타자기마저 두벌식으로 표준을 정해 큰 반발을 부른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과 1980년대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 아래서 민간 쪽의 반발은 미약했고, 결국 한글 글판은 두벌식으로 통일되고 만다.

두 벌식은 영문 자판에 맞춘 것으로 자모음 배치가 비과학적이어서 세벌식에 비해 피로도가 높고 속도가 느리다. <애국가>를 타자한다면 윗글쇠(Shift key)를 누르는 비율이 세벌식은 0.5%인 반면, 두벌식은 16%나 된다. 속도보다 큰 문제는 비과학적인 원리 때문에 황당한 현상이 나타나는 점이다. ‘민족’을 입력할 경우 수동식에서는 네 타나 쳤는데도 ‘민조’를 칠 때까지 한 글자도 종이에 나타나지 않는다. 컴퓨터에서도 ‘ㅁ, 미, 민, , 민조, 민족’을 하나씩 칠 때마다 글씨 모양이 매번 바뀌기 때문에 눈이 피곤하고 오타가 많아진다. ‘’에서는 지읒이 앞 글자에 붙었다가 ‘ㅗ’를 입력하면 그때서야 뒤로 붙어 ‘민조’가 되는 이른바 ‘도깨비불 현상’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공병우 박사를 비롯한 많은 한글 기계화 전문가가 세벌식을 다시 표준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으나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나마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글화 운동으로 한글 용어 표준화는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요즘 우리가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상당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인 윈도우에서 사용되는 용어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마이크로소프트 한글화 그룹의 노력으로 좋은 용어들로 많이 정착된 상태다.

언더우드에서 나온 초기의 공병우 타자기(왼쪽)와 뒤에 나온 공병우 타자기. 맨 뒤 사진은 공병우 타자기 광고. ⓒ 김중태 제공
한국문화원은 한글 기계화 상징 공간

공병우 박사는 해외에 잠시 나갔다가 귀국한 후인 1988년에 한글문화원을 개설하고 한글 운동에 앞장선다. 그리고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95번지 한글문화원 안에서 1990년 10월9일 한글 기계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인 ‘㈜한글과컴퓨터(한컴)’가 설립된다. 한글문화원 안에서 한컴이 탄생하게 된 이유도 공병우 박사의 한글 사랑 때문이다. 당시 한글 소프트웨어 개발자나 한글 운동 동아리들이 한글문화원에서 모임을 가졌다. 한글문화원이 한글 사랑 운동, 한글 기계화,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상징적 공간이 된 것이다.

공 박사의 공로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또한 소망했던 것은 바른 한글 기계화였다. 한글타자기를 발명하고 세벌식을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항상 이름은 한글로만 썼고, 한글타자기 및 점자타자기 발명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의 시각장애인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사람이 만든 뛰어난 한글 기계화 시스템을 정부가 후퇴시킴으로써 대다수 국민이 비생산적이고 불편한 두벌식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공병우 박사는 90세를 얼마 안 남긴 나이에도 매일 PC통신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한글 운동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공병우의 유언, 1995년 3월7일)

공병우 박사는 별세한 후에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성인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언제나 대한민국과 한글, 젊은이를 사랑한 사람으로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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