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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부품 끊으면 삼성전자·현대차 공장 멈춘다

노진섭 기자 ㅣ no@sisapress.com | 승인 2013.12.03(Tue) 10: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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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 경제 침몰 작전에 나설 것인가. 일본이 독보적인 소재·부품 기술력을 앞세워 경제 쓰나미를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반도체·TV·2차 전지 강국이 됐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 그런 제품 속에는 ‘Made in Japan’ 부품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이 부품 공급을 중단하면 한국 산업은 모래성처럼 스러질 수 있다. 우리만의 소재·부품 기술력으로 방파제를 만들어둬야 한다.


“한국 산업은 가마우지 신세다.” 포스코경영연구소가 한국 산업을 진단한 결과를 이렇게 표현했다. 가마우지라는 새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낚시법에서 한국은 가마우지, 일본은 낚시꾼에 비유된다. 한국은 조립·가공으로 돈을 벌지만 일본은 소재·부품으로 그 돈을 챙기는 것이다.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소 산업전략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한국의 일부 조립·가공 산업이 일본을 앞섰다고 해서 소재·부품 산업이 강한 일본을 경제적으로 넘어섰다고 볼 수 없다”며 “한국 산업은 모래성과 같아서 일본이 소재·부품을 무기로 쓰나미를 일으키면 한순간에 모래 알갱이로 흩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1989년까지만 해도 NEC·도시바·히타치 등 일본 기업이 세계 반도체 톱3에 똬리를 틀었다. 20년 후 일본은 인텔과 삼성전자에 1, 2위 자리를 내주며 왕좌에서 밀려났고, 도시바가 3위에 머무르며 겨우 체면을 세웠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인텔·삼성전자·퀄컴·마이크론·SK하이닉스 등 미국과 한국 업체가 톱5에 자리를 잡자 일본 도시바는 6위로 내려앉았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삼성전자가 세계를 제패했고, LG디스플레이는 4년 연속 세계 1위 판매고를 자랑한다.

단순히 조립·가공만 한 것은 아니다. 소재·부품 개발도 했고, 수입선 다변화를 통해 안정적인 공급로도 확보했다. 이런 노력으로 소재·부품 분야 무역 수지는 10년 동안 꾸준히 상승세를 탔다. 그런데 유독 일본과의 무역 수지만큼은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품·소재 통계·종합 정보망(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2년 한국의 소재·부품 분야 무역 수지는 전체적으로 909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여전히 222억 달러(소재 119억 달러, 부품 103억 달러) 적자로 나타났다. 스마트폰·TV·반도체·자동차 등을 팔아서 번 돈의 상당액이 일본 소재와 부품을 사는 데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일본 언론 ‘정한론’ 시사

이런 가운데 충격적인 내용이 일본 열도에서 전해졌다. 일본의 대표적 시사주간지이자 최대 발행 부수를 가진 ‘주간문춘(週刊文春)’은 11월21일자 ‘한국의 급소를 찌른다!(韓?の「急所」を突く!)’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의 금융기관이 한국의 기업이나 경제에 대한 지원·협력을 끊으면 삼성도 하루 만에 무너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간지는 “아베 총리의 측근으로부터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며 새로운 정한론(征韓論)까지 제기되고 있다”면서 “아베 총리 측근에서는 이미 한국에 대한 비공식적인 제재 검토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정한론은 한국을 정복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본 정부는 정한론이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지만, 일본에 그런 분위기가 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대표적인 재계 단체인 경단련(經團連)도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 일제히 철수하면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 기업 철수 시나리오’를 들고 나왔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일본 정부에서 한국 경제 봉쇄 이야기가 흘러나왔다는 소식을 나도 접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실제로 자금줄을 조이면 삼성은 무너질까. 삼성의 올해 3분기 흑자가 무려 10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의 매출은 IT업계 세계 1위, 영업이익은 세계 2위다. 현금 보유액만 50조원에 달한다. 세계 모든 은행과 거래하는 삼성이 돈줄을 막는다고 당장 휘청거리진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10월 말 국내 상장 주식에 투자한 일본 자금은 6조5060억원이다. 전체 외국인 투자 자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불과하다. 미국(172조6810억원)이나 영국(40조5780억원)은 물론이고 중국(8조5240억원)보다도 적다. 채권 시장에서는 더 적다. 국내 상장 채권에 투자한 일본 자금은 4910억원으로 전체의 0.05%에 불과하다. 하혁진 한국은행 자본이동분석팀 과장은 “일본이 자신들의 돈을 모두 빼가도 국내 금융계나 기업에 별다른 영향은 없다”며 “일본이 우리의 돈줄을 막는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소재·부품 공급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침략을 이행한다면 한국은 타격을 입을까. 세계무역기구(WTO) 등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 노골적인 경제 침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회적인 방법을 동원해 한국 산업을 압박할 수는 있다. 2010년 9월7일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 지역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불법 조업하던 중국 어선과 선원이 일본에 체포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은 즉각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중단했다. 중국이 세계 공급 물량의 85%를 쥐고 있는 희토류는 스마트폰·LCD(액정표시장치), 2차 전지(충전해서 계속 사용하는 배터리), 전기·하이브리드 자동차 등에 폭넓게 쓰이는 희귀 광물이다. 이 원료를 사용하는 일본 산업계는 한순간에 마비됐고, 일본 정부는 결국 중국 선원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포스코경영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일본이 조립·가공에서는 한국에 밀렸지만 소재·부품은 일본이 없으면 전 세계 전자산업이 멈추게 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박용삼 수석연구원은 “일본도 한국에 소재·부품을 팔아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경제 침략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면서도 “그러나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자면 고의적으로 품질을 떨어뜨리거나 납품일을 준수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한국 산업을 괴롭힐 수는 있다”고 경고했다.

   
스마트폰 3분의 1은 일본 기술

일본의 소재·부품이 공급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마트폰·TV·자동차·반도체 등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요 수출 상품의 생산이 중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부는 다른 나라의 것으로 대체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품질과 납기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며 “같은 공산품이라도 값이 싸다는 이유로 중국산을 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소재·부품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는 스마트폰만 살펴봐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휴대전화 환경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생활 방식까지 바꿔놓은 스마트폰 시대를 연 아이폰(3G)은 수많은 세계적 소재·부품 업체들의 기술력이 집대성된 결과물이다. 아시아개발은행 연구소(ADBI)에 따르면, 스마트폰 한 대의 34%는 일본이 참여해서 태어났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전자 나침반이 일본산이다. 핵심 기술(플래시 메모리, 디스플레이 모듈, 터치스크린)도 일본이 제공했다. 그 외 국가의 참여 비율은 독일 17%, 한국 13%, 미국 6%, 중국 4% 순이다. 한국은 중간 부품을 담당했고 중국은 최종 조립을 책임졌다. 이 스마트폰의 생산 비용은 180달러이고, 그 가운데 약 60달러는 일본의 몫이다. 송지영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스마트폰에서 무선 신호를 주고받는 데 쓰이는 핵심 부품(RF필터·파워앰프·듀플렉서)에서도 일본이 90% 이상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배터리도 일본 제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전지 시장 조사기관(B3)은 최근 삼성이 올해 상반기 소형 2차 전지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 28%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스마트폰만 아니라 노트북에도 사용하는 배터리는 리튬이온 2차 전지다. 2차 전지는 충전하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충전용 전지다. 배터리 표면에는 삼성SDI나 LG화학이라고 표시되어 있을지라도 그 속은 일본 소재로 꽉 들어차 있다.

배터리를 만들 때 필요한 4대 소재(양극재·음극재·전해질·분리막)는 일본산이 대부분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기준 일본산 2차 전지용 음극재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90%다. 다른 소재도 독보적이어서 전 세계 모든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배터리에 사용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국내 한 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우리 기업은 일본산 전지 소재를 수입해서 조립하는 정도”라며 “일본이 전지 소재의 공급을 중단하면 국내 스마트폰·노트북 등 2차 전지를 사용하는 제품의 생산 설비는 멈출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에 사용하는 반도체 중에는 삼성 마크가 찍힌 것이 많다. 그러나 일본의 기술력이 녹아 있어서 독자적인 한국산이라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반도체는 실리콘 웨이퍼(반도체의 얇은 판)에 복잡한 회로를 그리는 것이 기술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업체가 사용하는 실리콘 웨이퍼 10개 중 7개는 일본산이다. 그 웨이퍼에 감광재라는 물질을 바르고 빛을 쬐어야 웨이퍼에 회로가 그려진다. 이 감광재도 일본이 세계 시장의 99%를 점유하고 있다. 그 밖에도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반도체 봉지재의 91%, 반도체용 차단재 78%가 일본산이다.

반도체 제품을 만드는 기계 자체도 대부분 일본산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를 만드는 장비를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는 실정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26%에 불과하지만 소재·부품 시장을 쥐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세계 1등 제품이라고 해도 일본산 부품·소재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국내 반도체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율은 각각 20.6%, 48.5%에 그쳤다. 전동수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사장은 10월24일 반도체의 날 기념식에서 “반도체 산업은 아직도 외국 의존도가 높다”며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완성품업체뿐만 아니라) 소자·장비·재료 업체들의 기술 경쟁력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동차·TV에 숨겨진 ‘메이드 인 재팬’

전자 제품에 사용하는 반도체는 한국산이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지만 자동차용 반도체는 그렇지 않다. 요즘 생산되는 자동차는 첨단 전자 제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종 전자 기술의 종합 작품이다. 한국은 엔진과 차체는 물론 상당수의 전자 부품을 국산화했다. 그러나 수많은 전자 부품을 통합해서 오류가 생기지 않게 제어하는 반도체는 외국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일본산이 품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자제어장치(ECU) 등 핵심 전자 부품은 독일 보쉬와 컨티넨탈, 미국 델파이와 함께 일본 덴소가 전 세계를 과점하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자동차용 반도체는 수요가 적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여러 전자 부품을 통합하고 제어하는 기술이 축적돼 있지 않아 국내에서 생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비(雨)의 양에 따라 와이퍼가 빠르게 또는 느리게 움직이며 운전자의 시야를 확보해준다. 또 사각지대에 다른 자동차나 사람이 있으면 경고음을 울린다. 이런 고급 기능에 필요한 센서류도 일본 등 외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한다. 엔진에 필요한 각종 밸브류 등 기계 부품과 커넥터 등 차체 전자 부품에서도 일본산 또는 일본 기술을 통한 제품이 독점적인 시장 우위를 나타내고 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각종 소형 모터들도 일본산이 압도적으로 신뢰도가 높다. 엔진에 들어가는 부속 중에 특수강을 사용하는 특정 부품 제조는 일본이 전통적으로 강세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특수강을 필요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특수강보다 더 강한 금형이 필요한데, 그 금형 기술도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밝혔다.

자동차업계는 앞으로가 더 문제라고 보고 있다. 하이브리드차나 전기차 등 미래형 자동차 부품에서도 일본이 크게 앞서 있기 때문이다. 특허 장벽도 높아 자체 개발이 어려운 부품도 상당하다. 자동차는 자국 내 부품 산업이 제 역할을 못한다면 그야말로 조립업종에 불과하다. 송지영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자동차 부품은 국산화가 많이 됐다”면서도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 기술 이전이나 기술 제휴인 부품이 많은데, 특히 일본 덴소의 독과점 제품이 많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즐겨 보는 TV도 일본 기술이 없으면 생산조차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핵심 부품인 화면(디스플레이)은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가 매출 면에서 세계 시장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LCD(액정표시장치)가 일본에서 개발돼 국내로 들어온 기술이고 일본 업체들이 관련 특허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LCD 핵심 부품(편광판) 소재로 쓰이는 필름(TAC) 시장은 후지필름·코니카미놀타 등 일본 기업이 100% 점유하고 있고, 삼성·LG 등 국내 기업은 일본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일본산 소재·부품 없이는 한국의 1등 산업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늘 사용하는 컴퓨터도 일본의 핵심 부품이 없으면 하루아침에 생산이 중단된다. 컴퓨터에는 자료를 저장하는 하드디스크(HDD)가 있다. HDD에 기록된 정보를 읽어내는 장치(자기 헤드)는 일본산이 100% 세계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이는 오디오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LP판에서 음악을 읽어내는 바늘과 같은 부품이다. HDD가 돌아가도록 구동하는 소형 정밀 모터도 일본이 세계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병원 진단도 일본산 제품이 없으면 구석기시대로 돌아갈 지경이다. 위암·위궤양 등 소화기계 질환은 내시경을 통해 눈으로 확인하면서부터 조기에 치료할 수 있게 됐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병원에서 사용하는 위 내시경 10대 중 7대는 일본 올림푸스가 만든 제품이다. 나머지는 유럽산 제품인데 품질에서 차이가 난다. 서울대병원의 내과 의사는 “유럽산 위 내시경은 조작이 불편하고 해상도가 낮아 정확한 진단이 힘들다”며 “일본산이 없으면 소화기 계통 진단이 사실상 어렵다”고 말했다. 과학자나 의학자가 병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연구용으로 사용하는 광학 현미경도 대부분 일본산이다.

반도체나 자동차 완제품을 팔면 매출은 크지만 소재·부품 값으로 떼어주고 나면 수익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동차 한 대를 팔아도 영업이익은 5% 남짓이다. 소재·부품 가격은 얼마 안 되지만 세계적인 기술력만 받쳐주면 20~30%의 이윤을 챙길 수 있다. 또 경제 침체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버팀목이 돼준다.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는 자국 기업들의 힘을 이용해 일본 경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는 일본 기업의 공통점을 ‘닛케이 비즈니스’는 첨단 기술이 아닌 전통적인 노하우라고 분석했다. 일본 기업이 노하우라는 생명선을 확보한다면 한국·중국에 간단히 세계 1위 자리를 내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비근한 예가 세계 탄소 시장의 34%를 차지하는 도레이다. 탄소섬유는 강철보다 가벼우면서도 강해 앞으로 철을 대신할 차세대 물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레이는 40년 동안 탄소섬유만 개발했다. 1970년부터 세계 업체들이 탄소섬유에 달려들었지만 채산성 문제로 포기했다. 도레이는 낚싯대와 골프채 등을 만들면서 기술력을 쌓았다. 그 노력의 결과 1989년과 2012년 항공기(보잉 777)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로 채택됐다.

일본 기업들은 요즘 특히 보안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부품의 역설계가 불가능하도록 핵심 원재료의 배합·처리 공정을 철저하게 감추는 이른바 블랙박스화가 일본 업계의 분위기다. 또 성분 노하우가 아니라 제조 노하우를 쌓고 있다. 예컨대 실리콘 웨이퍼 세계 시장의 30%를 차지하는 신예츠케미칼은 제조 노하우를 확보하기 위해 제조 장치를 자체적으로 제작했다. 세계 어느 기업도 특정 제품을 만들 수 없도록 한 조치다.

여기에 아베노믹스(아베 총리의 경제 운용 기조)도 추진력을 보태고 있다. 아베 총리는 취임 이후 주변국의 거센 반발에도 무제한 유동성 살포와 공격적 엔저(低) 정책을 밀어붙였다. 오랜 엔고에 시달렸던 일본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이코노미스트·파이낸셜타임스·월스트리트저널 등 세계 경제 전문 매체들이 일제히 일본의 부활을 1면 톱기사 혹은 주요 사설로 다루고 있다. 일본은행이 전망한 올해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2.9%다. 대신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외국인의 일본 내 주식 투자 규모도 확대되고 있는 분위기다.

사실 3년 전만 해도 일본 열도는 충격에 빠졌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일본 전자 기업 상위 9개를 합친 것보다 많다는 보도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의 질주는 일본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금융 위기가 닥친 2008년에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3%로 일본(-1.0%)을 크게 앞질렀다. 자동차·철강·휴대전화·LCD 등에서 한국의 선전은 일본의 충격을 증폭시켰다.

일본 제조업체들이 팽이 대회를 연 까닭

한국은 우쭐했다. 2010년 일본 경제가 한창 어려울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는 일본 경제가 어려워도 세계 1위 기업이 많으므로 우리 기업의 현재 성적이 좋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박상이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소재부품단장은 “대일본 수입 품목에서 부품은 예전보다 줄어들고 있으나 소재는 오히려 늘어났다”며 “여전히 일본산 소재 분야의 벽은 높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2020년까지 소재·부품 산업에서 수출 6500억 달러, 무역 흑자 2500억 달러를 달성해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4대 강국으로 진입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1월25일 이런 내용을 담은 ‘제3차 소재·부품 발전 기본계획(2013~2016년)’을 발표했다. 소재·부품 산업은 대일(對日) 무역 역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왔다. 삼성·LG·현대차 등 기업도 잇따라 소재 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삼성그룹은 범계열사를 한데 묶은 전자소재연구단지를 조성했고, LG·현대차 등도 소재 산업 투자 확대에 나섰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한 중소기업 대표는 “뛰어난 원천 기술을 개발해도 대기업이나 정부가 외면하고, 대기업은 오히려 연구 인력을 빼가거나 유사한 기술을 내놓기 일쑤”라며 “이런 대기업 중심의 산업 환경에서 소재·부품 강국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강조했다.

2012년 8월24일 일본 센다이에서 재미있는 팽이 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는 아이들이 아니라 15개 중소 제조업체들이다. 팽이는 지름 2cm 이하의 규격만 갖추면 되고 형태나 소재에는 제약이 없다. 지름 25cm 경기판 밖으로 나오거나 먼저 멈추는 팽이가 지는 방식이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후지정밀(금속 절단 업체)은 팽이 몸통을 구리로 만들고 손잡이는 알루미늄을 사용했다. 이 외에도 티타늄 팽이, 무게중심이 기존과 다르게 제작된 팽이, 스테인리스 팽이 등이 대회에 출전했다. 중소기업 전문가인 고베 국제대학의 나카무라 교수는 “팽이를 제작하고 기술을 겨루면서 기술력이 입증된다”며 “대기업의 눈에 띄어 새로운 사업으로 연결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의 소재·부품 산업의 바탕에는 중소기업의 힘이 깔려 있다.

몇 해 전 3·1절에 한 시민단체가 편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장면을 언론사 사진기자들은 일본 캐논과 니콘 카메라에 담았다. 이 아이러니한 모습을 촬영한 미국인의 손에 들린 사진기도 일본 제품이었다. 일본만 카메라를 생산하는 것이 아님에도 일본 제품이 세계를 휩쓰는 이유는 조립·가공을 잘해서가 아니라 소재·부품에서 모방할 수 없는 기술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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