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몰이 광풍에 종교계 쪼개지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3.12.0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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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신 신부 발언 계기 ‘종북 사제단’ 논란…종교계 내부에서도 정치 참여 놓고 갈등

“지금은 어떤 얘기를 해도 다 묻혀버린다. 말 그대로 광풍(狂風)이 몰아치고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는 한 신부가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하며 한 말이다. 그는 “이 광풍에 우리 입장을 어떻게 대변해도 화살이 날아올 것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자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제단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데 대해 “안타깝다”는 입장을 전했다.

천주교 전주교구 박창신 원로신부의 시국 미사를 두고 집권 여당과 보수 단체의 ‘종북’ 공세가 거세다. 박 신부가 11월22일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가진 ‘불법 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 미사’ 강론에서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을 설명하면서 북한을 옹호했다는 것이다. 대통령까지 공세에 가세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들의 신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야기하는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이 11월22일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불법 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연합뉴스
보수 성향 시민단체들은 “종교의 탈을 쓴 종북 사제단을 규탄한다”며 “사제단을 즉각 해체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박 신부의 발언을 ‘이적 행위’로 규정하고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수사를 촉구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등은 박 신부를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가톨릭 보수단체 신도들은 “사제단의 정치 개입으로 교회와 신도들을 분열시켰다”며 사제단을 고발하는 의견서를 주한 교황청대사관에 제출하기도 했다.

반면 민주당 의원 37명은 국회에서 사제단 소속 신부들과 미사를 갖고 현 시국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문재인 의원은 청와대와 여당을 겨냥해 “사제단과 신부님들에 대해서까지도 종북몰이를 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고 밝혔다. 가톨릭 안팎에서는 시국 미사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과거에도 시국 미사는 정권 차원의 탄압을 받은 경우가 많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역할을 인정받아왔다는 것이다. 이번 시국 미사도 그 연장선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 신부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비판에도 상관없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을 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정희 정권도 “종교인이 사회 혼란” 윽박

그렇다면 사제단에 대한 ‘종북’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이를 따지기 위해서는 우선 사제단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제단의 출범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주교구장이던 고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구속된 일이 계기가 됐다. 시국 기도회가 전국을 순회하며 열렸는데 서울대교구의 함세웅 신부를 비롯해 인천교구의 김병상, 전주교구의 문정현, 수원교구의 장덕호, 대전교구의 이계창, 부산교구의 송기인, 안동교구의 류강하 신부 등이 참여했다.

그해 9월26일 서울에서 갖기로 한 순교자 찬미 기도회에 앞서 9월23일 원주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에 300여 명의 사제가 모였다. 당시 한국인 평사제가 639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절반에 가까운 신부들이 자리를 함께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식으로 사제단의 결성을 합의하고 인권 회복과 민주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대응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교회는 정부에 순종해야 하며 정부는 하느님이 인정한 것”이라며 정부를 비판하는 교인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겠다고 윽박질렀다. 이듬해인 1975년 2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하려고 했을 때 사제단이 거부 운동을 벌이자 종교 담당 부처인 문화공보부장관이 “일부 종교인이 종교 본연의 위치를 벗어나 정치 활동에까지 지나치게 관여하고 법질서를 혼란시켜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언행을 거듭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권의 이러한 압박에도 사제단은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됐다. 사제단은 각종 시국 기도회, 단식 농성, 양심수 구명 운동 등으로 군사 독재 체제에 저항했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 사실을 폭로해 6월 민주항쟁의 불을 댕겼다. 지금도 제기되고 있는,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데 대한 비판은 온당치 못하다고 봤다. 교회의 복음과 진리가 사회의 부정부패를 막는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는 것은 가톨릭의 보편적 진리라는 측면에서다.

사제단은 명확한 회칙이나 강령 없이 사제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운영돼왔다. 회원 가입과 탈퇴의 형식적인 절차가 없다. 결성 당시 300명으로 시작한 사제단은 군사정권 시절 400명을 넘어섰다가 1980년대 후반 시민사회의 성장과 가톨릭교회의 보수화 등으로 인원이 다소 줄었다고 한다. 현재 사제단에서 활동하는 신부는 5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어왔다는 점에서 결속력은 상당히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톨릭대학의 노동 사목 동아리인 ‘밀알’ 출신들이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초반 이 동아리에서 활동한 한 인사는 “방학 때면 자연스럽게 사제단 선배들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사제단은 1996년 창립 22주년을 맞아 ‘기쁨과 희망 사목 연구소’를 설립했다. 초대 소장은 함세웅 신부가 맡았다. 한 해 전인 1995년에는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공동대표가 김승훈·함세웅·김병상 신부에서 안충석·문규현·장용주 신부로 바뀐 것이다. 안충석 신부만 사제단 1세대였고 문규현·장용주 신부는 사제단 2세대로 당시 40대였다.

11월26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애국연대 새마음포럼’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원로신부의 시국 미사 발언을 규탄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90년대 이후 통일운동에 주력

사제단은 1990년대 들어서 ‘통일운동’을 본격화했다. 보수 단체들은 사제단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근거를 여기서 찾고 있다. 1990년 새해 벽두 사제단은 경기도 양평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그해 활동 목표를 ‘민족의 하나 됨과 교회 쇄신을 위하여’로 결정했다. 이는 사제단이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통일 문제에 큰 비중을 두고 활동하겠다는 의미였다. 남북 간의 적대 관계를 불식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게 사제단의 통일운동관이었다.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갔던 임수경 현 민주당 의원과의 동행 귀환을 위해 문규현 신부를 전격적으로 북한에 보냈던 사제단은 1년 후인 1990년 8월14일 신부 15명을 북한에 파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광복절에 북한에서 통일 염원 미사를 가질 예정이었다. 1년 전에도 방북 신청을 했지만 정부에서 승인해주지 않았다. 사제단은 “당국이 사제단의 북한 방문 자체에 대해 선교 활동 이외의 목적을 가진 것으로 예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제단은 그해 8월3일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조선천주교인협회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사제단은 서한에서 ‘조국 통일의 소망에서 비롯된 이러한 뜻이 받아들여져 행사가 이뤄지도록 빠른 시일 내에 회신과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북한 쪽은 환영의 뜻을 밝혔지만 실무 회담은 갖지 못했다. 정부 당국의 접촉 불허 방침에 따른 결과였다.

북한 방문을 성사시키지 못한 사제단은 임진각에서 통일 염원 미사를 가져왔다. 1991년 신도 4000여 명이 참가한 통일 염원 미사에서 사제단은 ‘남북한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민족 통일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키 위해서는 우선 남북한 내부의 민주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사제단은 ‘이를 위해서는 남한 당국이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악법들을 철폐하고 북한도 이에 상응한 조처를 취해 인민의 참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조문 파동이 일었던 1994년에는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신부가 “학생운동의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고 주장해 논란이 됐다. 물론 박 신부의 이런 주장은 주사파와 사노맹을 같은 계열의 조직으로 보는 등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졌지만, 사회 분위기는 그의 주장을 지지하느냐 여부를 놓고 흑백 논리를 강요했다.

사제단은 박 신부의 발언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제단 내에서는 “박 신부 개인 의견인데 사제단 차원에서 나설 것까지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럼에도 학생운동 전체가 주사파로 북한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인 것처럼 매도한 것은 잘못이라는 점에서 공개 발언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사제단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함세웅 신부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주체사상이 가톨릭 신학의 조직 체계를 원용한 측면이 있다고 해 신학적 측면에서 조금 공부를 해봤다. 이 사상이 갖고 있는 민족 자주 원칙이나 인간관 등은 남한 지배 세력의 외세 의존에 혐오감을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은 기성세대도 반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무엇보다 주사파를 이적분자로 무조건 매도하기보다는 공개적인 교육과 토론회를 열어 실천 과정에서의 문제점, 체제 유지에 악용된 점 등 주체사상이 갖고 있는 함정을 이성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평화 위한 종교인 발언은 언제나 있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한동안 중지됐던 시국 미사는 1995년 6월 명동성당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계기로 부활했다. 사제단은 그해 11월 5·18특별법 제정과 관련해서도 시국 미사를 거행했다. 사제단과 공동으로 미사를 봉행한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장덕필 위원장은 ‘정부의 도덕성 회복을 위한 시국 미사’ 강론을 통해 “정치 지도자와 정부가 도덕성을 상실하고 사회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져 우리 사회가 깊은 병에 걸렸다”고 지적하면서 정치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후에도 시국 미사는 끊이지 않았다. 1996년 10월28일 인천시 남구 주안1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 미사에서 안기부법과 집시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같은 해 12월27일에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와 관련해 김영삼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여당 의원들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시국 미사를 가졌다. 이 시국 미사는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사제단은 1997년 1월13일 비상총회와 시국 미사를 잇달아 열고 사제 1000명이 서명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김대중 정권이던 2002년 12월에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희생 사건과 관련한 ‘촛불 시위’에서 비상시국 단식 기도회를 열었다. 노무현 정권이던 2004년 11월18일에는 명동성당 입구에서 ‘국가보안법 완전 철폐를 위한 시국 미사’를 가졌다. 이어 2006년 5월에는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시국 미사를 거행했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2008년 6월에는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불거진 촛불 집회에서 미국산 쇠고기 전면 재협상을 촉구하는 시국 미사를 개최했다. 최근에는 4대강 사업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주도해왔다.

사제단의 활동을 죽 지켜본 한 가톨릭 인사는 “이 땅의 평화를 위한 종교 지도자의 발언은 언제나 있었다. 묵언만이 올바르다고 볼 수는 없다.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얘기했다면 이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창신 전주교구 원로신부. ⓒ 연합뉴스
시국 미사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한 박창신 원로신부는 전북 지역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종교인으로 꼽힌다. 문정현·규현 형제 신부와 함께 전주교구 소속이다. 1975년부터 농민회 지도신부를 맡아 농민운동을 해온 그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리다가 테러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기도 했다. 당시 전주 여산성당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전두환 광주 살육 작전’이라는 유인물을 신도들에게 나눠주던 박 신부는 6월25일 밤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지금도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

미국 쌀 수입 반대 운동이 한창이던 1991년에는 국민연합 전북본부 공동의장을 맡았다. 그해 10월 ‘농민운동가 가혹 행위’에 대한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방자치단체장의 판공비 공개가 결정됐던 1999년에는 참여자치 전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전북시민연대는 그해 10월 김완주 전주시장(현 전북도지사)이 유럽 시찰 중 사용한 판공비 공개 자료를 분석해 보고서를 내놓았다. 2006년 12월에는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개최한 민주·인권 사진전에 1984년부터 1995년까지 전북 도내 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을 기증하기도 했다.

지난해 은퇴한 박 신부는 이번 시국 미사에서 ‘종북몰이’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시대의 증표 가운데 제일로 화나는 게 종북몰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동운동 하면 빨갱이, 농민운동  하면 빨갱이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좀 고상해져서 종북주의자라고 한다”고 비판했다. 그 과정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관련 발언이 나왔다. “북한을 원수로 만들어놓고 그 원수를 빙자해 자국 내에 있는 선량한 사람들을 치고받고 있다”는 게 강론의 요지였다. 그런 그가 이날 시국 미사로 인해 자신이 가장 화난다고 했던 시대의 증표인 종북몰이의 대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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