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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가 더 나쁘다

이상돈 | 중앙대 명예교수 ㅣ 승인 2013.12.03(Tue) 11:5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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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의 임기 첫해 성적표는 좋지 못하다. 정권 초에는 인사 파문으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고, 그런 와중에 지난 대선 중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의혹이 불식되기는커녕 자꾸만 커져가고 있어 박근혜정부는 ‘국정원 의혹’이란 수렁에 깊이 빠져 있는 형국이다.

그간의 사정을 돌아보면 일단의 국정원 직원들이 국정원법을 위반했을 뿐더러, 더 나아가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을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에서 비슷한 활동을 했음이 확인됐다. 상황이 그러하면 정부와 여당은 이들을 엄정하게 수사하고,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어야 했다. 하지만 정홍원 국무총리가 쪽지 한 장을 들고 나와서 이들에 대한 수사 의지를 밝힌 것은 10월 말이었다. 수사를 담당했던 특수부 팀장 검사가 국회에서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고 발언하는 등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후에야 겨우 이런 반응을 보였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우리나라 국정원은 해외 정보뿐 아니라 국내 정보도 수집하고, 공안 사건에 대해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정보기관이 이렇게 광범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경우는 민주국가에선 볼 수 없다. 미국·영국·독일뿐 아니라 안보 상황이 심각한 이스라엘도 일개 정보기관에 이렇게 광범한 권한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닉슨 미국 대통령을 사임으로 몰고 간 워터게이트 사건을 돌아봐야 한다.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선거대책본부에 전직 CIA 요원 등이 침입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데서 시작된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정작 국민적 분노를 자아낸 것은, 닉슨이 참모들에게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불법 자체보다 불법을 은폐하려고 한 행동이 더 나쁘다’고 판단한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젊은 여자 인턴과의 섹스 스캔들로 탄핵 소추를 당했는데, 이때도 클린턴이 대배심에서 거짓 증언을 한 일이 섹스 자체보다 더 큰 문제가 됐다. 곤경에 빠진 클린턴이 오랜 친구이자 정치 컨설턴트인 딕 모리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모리스는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면 국민은 대통령을 용서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클린턴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자 여론은 잦아들었다.

   
국정원의 한 여직원이 정치 사이트에 댓글을 달았음이 밝혀졌을 때만 해도 그것은 한 개인의 일탈 행위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해당 직원을 구속하고 상부 지시 여부를 수사하는 엄정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더구나 이 사건은 전 정권 아래에서 벌어진 것 아닌가. 하지만 여권은 이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던 중 일단의 국정원 직원들이 엄청난 트위터 활동을 했음이 드러났으니, 선거를 앞두고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살 만하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불법 행위 자체보다 은폐가 더 나쁘다’는 워터게이트의 교훈을 본받아 전 정권하에서 일어난 이러한 국기 문란 사태에 대해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고 이를 위한 가시적인 조치를 초기에 취했더라면 오늘날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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