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권력 5년 막후] #21. 거물들 모셔왔으나 성과 없이 내리막길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3.12.1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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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업주의’ 정책 펼치며 해외 유명인들 영입…권력 내부에서는 균열 조짐

2007년 12월28일 이명박(MB) 대통령 당선인은 첫 공식 일정을 가졌다. 주인공은 대기업 총수들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MB는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주의)’ 정책을 펼치겠다고 선언했다. MB는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추진해 성장 중심 정책을 펼 것이다. 정부가 어떻게 하면 기업이 투자를 하겠다는 것인지 제시해달라”며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감세를 약속했다. MB의 발언 직후 재계에서는 “역시 CEO 출신 대통령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재계 또한 MB 정부와 코드를 맞추기 위해 “투자와 고용을 늘리겠다”고 화답했다. 분위기가 좋았다.

이날 MB가 토해낸 말 중에 이런 얘기도 있었다. “두바이에 갔더니 국왕이 기업인과 직접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더라.” 내친 김에 MB는 두바이를 본받아 자기도 기업인들에게 전화를 열어 놓을 테니 언제든 직접 전화해도 좋다고 했다. MB의 ‘두바이 사랑’이 보통을 넘는다는 것을 보여준 자리였다.

2008년 1월6일 데이비드 엘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특위 공동위원장이 기자회견에 앞서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MB의 넘치는 ‘두바이 사랑’

2008년 1월1일 동아일보는 ‘이 당선인 발언은 두바이 국왕 벤치마킹’이라는 제목으로 이와 관련한 기사를 보도했다. ‘이 당선인이 한나라당 경선 후보 시절인 2007년 4월10일 두바이를 방문해 세이크 모하메드 국왕을 만났는데, 대화 도중 국왕이 외국인 투자가와 직접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당선인은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접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MB는 2007년 10월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해 “성장의 혈액 구실을 할 금융 선진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두바이가 그 모델이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관광·레저 산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육성하겠다는 MB의 구상도 두바이를 모델로 했다. MB가 두바이를 칭찬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는 두바이보다 더 잘할 수 있다.”(2007년 11월29일 여의도 유세) “두바이에 갔더니 사막에 운하를 만드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더라.”(2008년 2월4일 관광산업 간담회) “두바이는 외국 사람이 많이 모여 있으니 국제금융허브가 잘된다.”(2008년 2월11일 금융인 간담회) 2008년 2월15일에는 알 사이비니 두바이투자공사 사장이 방한했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MB는 “한국이 두바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두바이 측은 우선 20억 달러의 기초 자금을 들여 가칭 ‘한-두바이 펀드’를 설립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에 MB는 “경제적 협력을 강화할 뿐 아니라 관광 분야에서도 교류가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화답했다.

MB의 두바이 사랑은 ‘사람 영입’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직인수위원장 직속의 국가경쟁력강화특위 공동위원장에 두바이 국제금융센터감독청 회장이던 데이비드 엘든(David Eldon)을 임명한 것이다. 외국인이 인수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당시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공동위원장에 임명된 지 열흘 만인 2008년 1월4일 방한했다. 1월6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 브리핑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는 200여 명의 내외신 기자가 취재 경쟁을 벌였을 정도로 관심이 컸다. 엘든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및 인수위 관계자들과 만나 향후 활동 계획 등을 상의한 후 1월8일 출국했다. 외국에서 외자 유치 활동을 벌이기 위해서다. 그는 “내 임무 가운데 하나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라고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출국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사공일 전 재무부장관과 공동으로 위원장을 맡은 엘든은 당시 두바이 국제금융센터(DIFC; Dubai International Financial Centre) 회장을 맡고 있던 글로벌 금융 전문가다. 국제적 컨설팅 전문 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고문, 노블그룹 회장, 홍콩 MTR 이사로도 활동하며 바쁘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MB 정권 인수위에 참여한 데는 MB와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1992년 처음 서울을 방문한 뒤 정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2002년 서울시에서 주관한 서울국제경제자문회의(SIBAC) 총회 의장을 맡았다. 당시 서울시장이던 MB와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자신과 닮은꼴 엘든 회장 인수위로 불러

MB는 2007년 4월10일 두바이를 방문했을 때 호주 출신 인사가 두바이에서 요직에 근무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도 외국 인사를 임명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MB 또한 2000년부터 캄보디아 훈센 총리의 경제고문을 맡은 바 있다. 엘든은 인수위 참여가 발표된 후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서양에서 한국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닉네임으로 부르는데,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했다. 공동위원장 임명이 발표된 뒤 (한국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전화를 걸어)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댔기 때문이다. (중략)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주 기뻤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엘든 위원장은 여러 면에서 MB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신화적인 측면이 있다. 엘든은 스코틀랜드 시골의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왕립군사학교를 중퇴한 후 잡일을 하는 하급 직원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은행의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올랐다. MB 또한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고 35세에 현대건설 사장이 된 뒤 대통령이 됐다. 엘든 위원장은 MB에 대해 “나는 그의 비전과 추동력, ‘캔두(can do)’ 정신을 존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엘든은  MB 정권 초 여러 차례 ‘규제 완화’와 ‘개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국 경제를 위한 긴급 처방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인수위원회 활동이 끝난 후 그의 이름도 언론에 등장한 적이 거의 없다. 아니, 어쩌면 그와 관련해 ‘성과’를 거론하기에는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월간 신동아 2008년 2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나라가 대부분 자국민을 통해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일이다. 내가 어떤 가치 있는 것을 한국에 가져다줄 것인지 의문을 품고 있는 한국인이 많다고 본다. 내가 모든 답(경제 문제 해결에 대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 의견만(특정 사안에 대한 유일한 목소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달라. 다만 내가 여러 나라에서 일하며 살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얻은 경험과 전문지식을 한국에 주고 싶다. 한국민을 등지는 게 아니라 한국민과 협력해서 일하는 데 목표를 두고 싶다.”

그는 “외자 유치를 위한 구체적 정책 수단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구체적인 정책 수단을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몇 년 동안 투자자들은 중국을 지켜봤다. 다음 단계에서 다른 아시아 투자처를 찾을 때 한국이 거기에 포함돼야 한다. 투자자들은 투자를 결정할 때 기업 환경이 개방되고 투명한지, 경제 활동이 활발한지, 법이 공정하게 적용되는지 등을 고려한다. 그러나 많은 투자자는 한국이 그런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국가경쟁력강화특위는 이런 측면들을 살펴볼 것이다. 한국에 대한 투자가 투자자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들을 모색할 것이다.”

엘든은 MB 정권 초기의 개방성을 상징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외국인을 인수위원회에 참여시킬 정도로 당시 MB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때 이미 권력 내부의 핵심 그룹에서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MB의 이런 적극적인 시도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과연 알맹이가 있었는가’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상징적인 의미 자체만으로도 그러하다.

2008년 5월6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빌 게이츠도 국제자문위원으로 위촉

엘든 외에 MB 정권과 관련해 주목되는 ‘이방인’들은 국제자문단이다. 국제자문단은 2008년 건국 60주년을 맞아 구성됐다. 빌 게이츠, 기 소르망, 마이클 포터, 고촉통 등 국제적으로 명망이 높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 구성원이다. 물론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책을 건의하거나 의견을 나눈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 정부가 위촉해 자문을 받는 식이다. 국제자문단은 대통령비서실 미래비전비서관이 간사를 맡아 이 대통령과 이들의 만남 및 연결을 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실무는 미래기획위원회에서 총괄했다.

이들은 국가경쟁력 강화, 코리아 브랜드 제고, 녹색 성장 등 MB 정부의 국정 과제에 대해 자문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은 IT와 자동차산업 등의 ‘융합 전략’, 파리정치대학 교수인 기 소르망은 ‘국가 브랜드 전략’, 세계경제포럼 회장인 클라우스 슈왑 회장은 ‘글로벌 리더십 방안’에 대해 각각 자문했다. 이들 가운데 MB의 대표적인 국제 조언자는 기 소르망 교수와 데이비드 로젤 미국 델라웨어 대학 명예총장이었다.

기 소르망 교수는 ‘2009 세계석학포럼’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등 가장 의욕적으로 자문했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양국 국회에서 비준될 것이다. 한국 국회가 먼저 비준하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한국의 시각이 아니라 수요자인 외국인이 한국에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는지 먼저 파악해 국가 브랜드 전략을 짜는 것이 좋다”는 등 거침없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데이비드 로젤 델라웨어 대학 명예총장은 16년간 델라웨어 대학 총장을 역임하면서 델라웨어 대학을 미국 내 상위권 대학으로 올려놓은 성공한 ‘총장 CEO’로 꼽힌다. 미국 공립대학 총장 중 가장 몸값이 높았던 인물이다. 당시 청와대는 로젤 명예총장을 선임한 배경에 대해 “로젤 명예총장은 대학의 연구 경쟁력 강화, 대학 교육의 정보화, 수학 교육 활성화 등 미국 대학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대통령이 교육 선진화와 대학 경쟁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로젤 명예총장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고 설명했다.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2008년 5월 청와대에서 MB를 면담하고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는 주로 정보기술과 관련해 자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만남에서 MB는 빌 게이츠 회장에게 백자 접시와 주석으로 만든 국제자문위원 위촉패를 주면서 “건국 60주년을 맞아 진정한 일류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세계적인 인사들의 지혜와 경륜을 구하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빌 게이츠 회장은 답례로 자개로 만든 상자 속에 X박스(MS의 가족용 비디오게임기)를 넣어 MB에게 선물했다.

다보스포럼 창립자인 클라우스 슈왑 세계경제포럼 회장도 2008년 6월 MB와 독대하고 기후 변화 등 글로벌 어젠다에 대해 자문했다. 당시 청와대는 “슈왑 회장은 글로벌 이슈, 세계 경제와 관련해 정책적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이들 외에 녹색 성장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마이클 포터 하버드 대학 교수, ‘한국의 친구(Friend of Korea)’로 선임된 고촉통 전 싱가프로 총리, 인도 정보기술(IT) 산업의 원로인 나라야나 무르티 인포시스 창업회장, 도미니크 바튼 맥킨지 아태 회장, 골드만삭스 회장을 지낸 존 손튼 브루킹스연구소장, 신흥 시장 투자 전문가인 루벤 바르다니안 러시아 트로이카 투자은행 회장, 일본 전 총리인 다케나가 헤이죠 게이오 대학 교수,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앨런 히거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 등도 조언자로서 이 대통령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인물들이다.

11월15일 ‘일본 성인업소 마시지’ 논란에 휘말린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사퇴했다. ⓒ 연합뉴스
상징적 인물 이참 사장은 불명예 퇴진

‘MB 정권의 이방인들’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참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이다. 그는 외국인이 아니다. 2009년 한국에 귀화했다. 본명은 베른하르트 크반트(Bernhard Quandt). 독일 라인란트필츠 바트크로이츠나흐 출신이다. 독일 구텐베르크 대학에서 불문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에서 상담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1978년 통일교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한국을 방문한 뒤 한국의 매력에 빠져 아예 정착했다. 1980년 교육방송 독일어 강의를 시작으로, KBS 1TV <지구촌 파노라마>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며 방송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1982년에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1986년 한국으로 귀화해 ‘독일 이씨’의 시조가 됐다. 독일인 남자로는 첫 번째, 유럽인 통틀어서는 스물다섯 번째 귀화인이었다.

귀화 당시에는 ‘이한우’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그는 대표적인 외국인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외국인 배우 시대’를 열었다. 1994년에 KBS 인기 드라마 <딸부잣집>에 출연했고 1995년에는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수상했다. MBC <제5공화국>, SBS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천국의 계단> 등 드라마에 두루 출연했다. 2001년에 한국 사회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참여할 ‘참’을 써 ‘이참’으로 개명했다.

MB를 만나며 그의 인생은 다시 바뀌었다. MB가 서울시장으로 있던 시기에 서울시 홍보대사와 ‘아리수(서울시 수돗물)’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2007년 대선 때는 한반도 대운하 특별위원회 특별보좌관으로 MB를 도왔고, 2008년 총선 때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비례대표 후보를 신청하기도 했다. 2009년 7월 외국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됐다. 4년 3개월 동안 역대 최장수 관광공사 사장으로 근무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국에서 성공한 귀화 외국인의 상징 인물로 꼽히곤 했다. 올해 초에는 ‘대학생이 가장 닮고 싶은 CEO’ 공기업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1월15일 이른바 ‘퇴폐 향응 논란’ 속에 사퇴했다. 지난해 설 연휴 때 그가 일본 관광회사 부사장에게 초청을 받아 관광공사 용역업체 회장·임원 등과 함께 도쿄 요시와라의 성인업소를 출입했다는 보도가 나온 지 사흘 만이다. 그는 사퇴의 변에서 “일본 성인업소 출입은 사실과 다르며 제보자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법적 절차를 밟아 명예를 회복하고 싶지만 관광공사에 가해지는 압박과 부담으로 인해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불가능해 사퇴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MB 정권의 한 상징적 인물로서 신화를 써가던 ‘푸른 눈의 한국인’은 이렇게 불명예 퇴진했다.   

* 다음 호에는 ‘MB가 안보대통령?’ 편이 이어집니다.


 

Series) MB권력 막후 5년


#1.  드디어 피바람이…“당신 주변엔 빨갱이가 왜 이리 많아”
- 이상득·박영준 등 TK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허망하게 무너진 정두언 ‘한 달 천하’



#2. 함께 가자더니 하루아침에 배신을…”
- 이재오 향한 정두언의 분노…TK는 ‘55인의 반란’ 초기에 진압


#3. 읍참마속(泣斬馬謖) 후 노무현 세력 척결 나서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MB 집권 첫해 중심 못 잡고 허둥지둥


#4. 봉하마을 향하는 칼끝 최종 타깃은 노무현
- 진보 단체 돈줄 색출…‘박연차 게이트’ 광풍 몰아쳐


#5. MB 검찰, 지관 총무원장 계좌 뒤졌다
- 노발대발한 총무원장, 불교계 총동원령 내려


#6. 한상률의 배신, 노무현 등에 비수 꽂아
- TK 세력과 손잡고 ‘정치성 세무조사’…부하의 보복에 자신도 거꾸러져


#7. 이상득은 친인척 관리 대상 위에 있었다
- MB도 어쩌지 못하는 ‘궐 밖 권력’ 김윤옥 여사와 SD 부인 최신자씨 간 갈등도


#8. ‘대군’들의 밀약, 촛불에 한 줌 재로 사라져
- 전·현직 대통령 ‘형님’들 핫라인…2007년 대선 전후 가동


#9
. 검찰 수사 나서며 회장 퇴진 압박
- ‘왕차관’ 박영준, 핵심 인사들 면접 보듯이 일일이 접촉


#10. 웃음 뒤에 감춰둔 ‘비수’는 예리했다
-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불편했던 MB-박근혜 “실제 둘 관계 나쁘지 않다”는 얘기도


#11. 암호명 ‘동해 일출’ “VIP를 독도로 모셔라”
- 김효겸 전 청와대 비서관이 전하는 이명박 정권 뒷얘기


#12. 정권 실세들 떡고물 챙기려 ‘4대강’ 기웃기웃
- MB, 2008년 6월 ‘대운하 포기’ 언급 이후에도 논란 이어져


#13. 정권 끝날 때까지 “믿을 건 내 사람뿐”
- MB 정권, 사정·정보·인사 등 핵심 라인 ‘고대·영남’ 출신 독식


#14. ‘박근혜 대항마’, 날개도 못 펴고 스러지다
- 정운찬의 총리 취임 직전 즉흥적 ‘세종시 수정안’ 한마디로 권력 쟁투 가열


#15. 요란한 구호 속 한몫 챙기기 바빠
- 5년 내내 ‘동반 성장’ ‘녹색 성장’ ‘중도 실용’ ‘공정 사회’ 등 키워드만 난무


#16. 궐 밖에선 최고 권력자였지만…
- MB 정권 실세의 상징 ‘6인회’ 멤버, 잇따라 몰락의 길 걸어


#17. 실세들이 설친 자리엔 빚더미만 남아
- MB 정권 ‘자원 외교’, 공기업들에 수조 원대 부채 떠안겨


#18. KT·포스코는 정권의 전리품
- 민간 기업을 낙하산 집합소로 만들어…버티면 검찰권 동원해 압박


#19. 정운찬·김태호·오세훈 제 무덤 파거나 포격에 무너져
- 실패로 끝난 MB의 ‘후계 프로젝트’…‘박근혜 대항마’ 부각되기도 전 좌초


#20. 강남 ‘큰손’ 부동산업자에게 땅 비밀 거래 꼬리 잡히다
- 시사저널, ‘내곡동 사저 단독 공개’로 MB 정권 강타…특검도 의혹 해소 못해


#21. 거물들 모셔왔으나 성과 없이 내리막길
- ‘친기업주의’ 정책 펼치며 해외 유명인들 영입…권력 내부에서는 균열 조짐


#22. 잇단 북 도발에 ‘병역 면제 정권’ 조롱
-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안보 무능’ 드러나…컨트롤타워 부재 따른 혼선에 지지율 뚝


#23. ‘MB맨’ CEO들 빚더미 안기고 퇴장하다
- 지난 정권 5년간 공기업 부채 244조원 증가…4대강 사업 등에 돈 쏟아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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