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권력 5년 막후] #22. 잇단 북 도발에 ‘병역 면제 정권’ 조롱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3.12.1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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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안보 무능’ 드러나…컨트롤타워 부재 따른 혼선에 지지율 뚝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여러분을 늘 잊지 않고,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국립대전현충원을 방문해 방명록에 쓴 글이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3주기 다음 날인 지난 11월24일 MB는 이곳을 찾았다. 연평도 포격 당시 전사한 장병들의 묘역은 물론, 천안함 46용사의 묘역도 참배하고 헌화했다. 같은 날 MB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벌써 3년.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합니다’라며 대통령직에 있을 때 겪었던 쓰라린 기억을 반추했다.

“왜 등용하는 사람마다 병역 면제자냐”

‘경제대통령’ ‘안보대통령’을 내세운 MB는 역설적으로 집권 기간 내내 ‘안보 불안’ ‘안보 무능’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 노크 귀순 사건 등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사회에 확산됐다. 이러한 상황은 MB 정권 스스로 초래한 측면도 있었고, 북한 내부의 문제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구조적인 측면도 있었다. 어떤 경우건 남북 문제를 매끄럽게 다루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사실 MB 정권 5년 동안 남북 관계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나 진전을 이룬 일은 떠오르지 않는다.

2012년 10월18일 서해 최북단 연평부대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한 OP(관측소)에서 북측 지역에 대해 보고받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연평도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 연합뉴스
아이러니컬하게도 ‘안보’를 강조했던 MB 정권은 정작 ‘병역 면제 정권’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주요 인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은 경우가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대통령부터 군대에 가지 않았다. ‘기관지 확장증’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현대건설에 입사할 때는 이런 것이 문제 되지 않았다. 지금은 완치됐다. 이 때문에 2007년 대통령 선거 때는 의도적으로 병역을 기피한 것이 아니냐는 야당 측의 공세에 시달렸다. 김황식 국무총리도 병역 미필자였다. 1972년 징병검사에서 양쪽 눈의 시력 차가 심한 ‘부동시’로 군 복무를 면제받았다. 원세훈 국정원장도 1976년 하악 관절염으로 군 복무를 면제받았다. 면제받기 2년 전에 치른 공무원시험 신체검사에서 합격했기에 이 또한 청문회에서 논란이 됐다.

그 밖에도 정운찬 총리,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 이만의 환경부장관 등 MB 정권 시절 주요 각료들이 고령·질병·생계 곤란 등의 사유로 군 복무를 면제받았다. 대통령·국무총리·국정원장을 비롯해 다수의 장관이 병역을 면제받은 것이다. 한상대 검찰총장도 병역 면제 때문에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다. 한 총장은 1980년 5월 ‘1을종’ 등급을 받고 현역병 입영 대상 통보를 받은 후 입영을 연기하고, 1981년 7월 2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같은 해 8월5일에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이후 한 총장은 1982년 5월 사법연수생 신분으로 징병검사를 다시 받아 수핵탈출증(디스크)으로 ‘병종’ 등급을 받고 병역 면제(제2국민역) 처분을 받았다.

2010년 4월15일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 함미가 크레인으로 올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천안함 사태 직후 MB 지지율 11.1%p 급락

병역 문제가 비판 내지는 조롱거리로 등장하자 여권 내에서도 “왜 등용하는 사람마다 병역 면제자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두언 의원이 대표적이다. 정 의원은 “인사를 할 때, 군대 갔다 온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 중에서 하는지 불만이다”라고 비판했다.

2010년 3월26일 MB 정권의 안보 태세를 시험대에 올려놓은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천안함 폭침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를 일거에 공포와 불안, 분노 속에 밀어넣었다. 그날 저녁 9시22분 해군 1200톤급 초계함인 천안함이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에서 침몰한 것이다. 승조원 104명 가운데 58명은 구조됐지만 46명은 실종됐다. 나중에 이들은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됐다. 꽃다운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푸른 서해 바다에 청춘을 묻은 것이다.

정부는 국제합동조사단을 꾸려 조사한 결과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 어뢰에 의해 격침됐다는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의 상영을 둘러싸고 벌어진 최근 논란이 상징적이다.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이유를 든다. “천안함 절단면의 모양이 폭침을 당했다면 나타날 수 없는 모양이다” “천안함을 격침시킨 잠수정은 왜 제대로 관측되지 못했는가” 등 의문을 나타낸다.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에 참여했던 각국 조사단 가운데 러시아 조사단이 다른 의견을 낸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2010년 6월 러시아 인테르팍스통신은 “천안함 침몰 규명 러시아 조사단은 천안함 선체와 한국 합동조사단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확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이와 관련해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조사단은 ‘천안함 스크루가 어망에 감겼고, 어망이 배를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도중에 그 지역의 많은 기뢰 가운데 유실된 기뢰 하나가 천안함과 부딪쳐 침몰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혹’은 여전히 ‘의혹’에 머무르고 있다. 정부 발표를 뒤집을 결정적인 물증은 없다. 정부는 2010년 9월13일 ‘천안함 사건 합동조사 결과 최종 보고서’를 공개했다. 결론은 북한의 무력 공격에 의한 도발이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쓰는 ‘1번’이라는 글씨가 쓰인 ‘어뢰 프로펠러(추진기)’ 파편을 사고 해역에서 쌍끌이 어선 선장이 수거했다는 것을 결정적인 증거로 내세웠다. MB 정권 안보 라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천안함 폭침은 MB 정권의 보수성 때문이 아니라, 북한 지도부의 내적 필요성과 변화 요인에 따라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동요하는 권력 엘리트들을 다잡고 김정은 후계 체제의 기반을 닦기 위해” 천안함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사건 자체도 엄청났지만 그에 대처하는 MB 정권의 움직임이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서 위기가 커졌다. MB로서는 위기 속에서 자신의 리더십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현실에서는 반대로 작용했다. 초기 상황을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혼선, 말 바꾸기, 보고 체계의 난맥상 등이 잇따라 노출되면서 비판이 거세졌다. 또한 실종자 수색 작업이 지체되면서 국민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침몰 사건의 원인 규명을 둘러싸고 분열도 커졌다. 책임자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제 식구 감싸기 논란도 불거졌다. MB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천안함 사태 직전인 3월26일 51.1%에서 사흘 뒤인 29일에는 40%로 11.1%포인트나 떨어졌다. 여당인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의 지지도도 천안함 사태 이전과 비교하면 5.2%포인트 떨어졌다.

2010년 11월23일 북한의 포격 도발 직후 현지 소방대원이 찍은 연평도 모습. ⓒ 인천소방안전본부 제공
MB ‘단호 대처’ 경고 6개월 만에 연평도 포격

2010년 4월16일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이번 사건 처리에서 최초 보고가 지연되고 일부 조치가 미흡해 국민의 불신과 의혹을 초래하게 돼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이번 사건 처리와 관련해 감사원에 직무감사를 요청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비등하는 비판 여론에 대한 사실상의 사과였다. 사실 당시 군의 대응은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천안함 폭침이 일어나던 날, 합참의장은 세미나 때문에 대전에 갔다. 당시 합참에는 이러한 비상사태에 직면해 즉각 책임 있게 일을 처리할 간부들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보고 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김태영 국방부장관도 초기에 정확한 정보를 보고받지 못했다.

초기에 메시지 관리를 하는 데 실패해 전혀 다른 보도가 쏟아졌다. 군 정보기관을 접촉한 언론은 ‘북한 연루’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국정원을 접촉한 다른 언론은 북한과 관계없다고 보도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외교안보실과 정무 라인, 홍보 라인이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냈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통제할 컨트롤타워가 없었다. 혼선이 정리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이 일어난 실전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MB는 2010년 5월24일 ‘북한 제재 담화’에서 “북한이 우리의 영해·영공·영토를 무력 침공한다면 즉각 자위권을 발동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불과 6개월 뒤인 그해 11월23일 연평도가 북한의 포격을 받았다. 영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데 국민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정부의 대응이 여전히 서투르다는 것에 또 경악했다. MB의 5월 담화는 현실에서 전혀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MB는 퇴임을 앞두고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공군은 뒀다 뭘 하느냐’며 당시 북한을 공습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군 고위 관계자가 ‘교전규칙에 따르면 공군이 나서면 절대 안 된다. 미국과도 상의해야 한다’며 막았다”고 밝힌 바 있다. 불과 10일 전인 11월11~12일 G20 세계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러내 고무되어 있던 MB는 연평도가 포격당하면서 다시 비판받았다. ‘군사적으로 미온하게 대응한 것’에 여론이 들끓었다. MB의 지지도는 또 내려앉았다.

연평도가 포격당했을 당시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MB의 일성이 “확전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라”는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지금 실제 포격을 당하는 현실인데 너무 안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MB는 이와 관련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국가위기관리센터 긴급회의에 배석했던 한 인사가 청와대 대변인한테 개인적인 의견을 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 대변인(현 새누리당 의원) 등의 증언에 따르면, MB의 이 말은 ‘회의 참석자 한 사람이 대변인에게 전해준 것’이 아니라, 김 대변인이 여러 참석자와의 협의를 거쳐 발표한 것이다. 연평도 포격 이후 MB의 메시지 관리에 허점이 있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MB의 안보 무능이 박근혜에겐 ‘약’

MB는 사후 대응에 대해 비판받았지만 현장성은 남달랐다. 천안함 사태 직후인 2010년 3월31일 이 대통령은 백령도를 전격 방문했다. 현직 대통령이 백령도를 찾은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백령도는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4km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섬이다. 북한 월래도에서 11.7km 거리에 있는 최전방에 해당한다. 대통령이 직접 현장을 찾아 군 통수권자로서 엄중한 상황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을 안심시키겠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수행원도 김성환 외교안보수석, 이동관 홍보수석, 김병기 국방비서관 등으로 최소화했다.

이 대통령은 2012년 10월18일에는 서해 최북단 연평도를 느닷없이 방문했다. 현직 대통령이 연평도를 방문한 것도 처음이다. MB가 이날 방문한 연평도는 해상 경계선 NLL에서 1.5km가량, 북한 영토인 석도로부터는 3km, 북한 측 해안으로부터는 12km 떨어진 곳이다. MB는 이날 연평도 해병대 관측소와 포진지, 연평도 민간 포격 현장, 연평도 동사무소 등을 방문해 근무 중인 해병대 대원들과 주민들을 격려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관측소 밖으로 나가 쌍안경으로 전방을 관찰하며 “여기 와서 보니까 정말 북한과의 대치 현장을 실감할 수 있고 연평도의 중요성도 알게 됐다. 여러분이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 NLL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그것은 평화를 유지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강조했다.

MB는 동부전선 22사단의 ‘노크 귀순’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22사단에서 자는데 북한군 한 명이 문을 두드려 한국으로 오고 싶다고 했다. 국민들은 저 북한 병사가 무장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걱정을 한다. 우리 군 전체를 봐서 걱정스러운 것은, 오랫동안 북한과 대치를 하다 보니 방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사태는 당시 여권의 유력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는 자신의 취약점을 일소하는 기회가 됐다. 발 빠르게 대응했던 것으로 보아 중대한 시기고 ‘기회다’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는 연평도가 포격당한 다음 날인 11월24일 “이번에 북한이 우리 국민과 영토에 직접적으로 포격을 한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이고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우리는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해야 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도발에는 반드시 큰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여성이기에 안보 문제에 취약하지 않겠느냐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행보였다.

다음 날인 11월25일에는 북한 포격으로 사망한 군인 유족을 찾았다. 유족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좋은 대북 정책을 만들어달라”고 말하자 “뜻을 잘 새겨서 정말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박 전 대표의 언급은 ‘대통령급 언급’으로서 국민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국민은 국가를 신뢰하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거나 “평소 공기의 존재에 무관심하듯, 우리의 모든 생활이 무의식 중 안보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도발이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준다” 등이다.

안보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딴 점수는 훗날 대선 후보가 된 후 벌어진 TV토론에서 선방하는 원동력이 됐다. 2012년 12월4일 있었던 여야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참여정부 5년간 단 한 건도 군사 충돌이 없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노크 귀순 사건 등을 보면 이명박 정부의 안보 무능을 알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 후보의 이런 공격은 MB에 대한 비판 여론에 힘입었겠지만 박근혜 후보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았다. MB 정권의 잇단 안보 불안 사태는 MB에게는 곤혹스런 일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박 후보에게는 공간을 더 넓혀주는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 다음 호에는 마지막 회 ‘공공기관 빚 급증’ 편이 이어집니다.

 

Series) MB권력 막후 5년


#1.  드디어 피바람이…“당신 주변엔 빨갱이가 왜 이리 많아”
- 이상득·박영준 등 TK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허망하게 무너진 정두언 ‘한 달 천하’



#2. 함께 가자더니 하루아침에 배신을…”
- 이재오 향한 정두언의 분노…TK는 ‘55인의 반란’ 초기에 진압


#3. 읍참마속(泣斬馬謖) 후 노무현 세력 척결 나서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MB 집권 첫해 중심 못 잡고 허둥지둥


#4. 봉하마을 향하는 칼끝 최종 타깃은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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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B 검찰, 지관 총무원장 계좌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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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상률의 배신, 노무현 등에 비수 꽂아
- TK 세력과 손잡고 ‘정치성 세무조사’…부하의 보복에 자신도 거꾸러져


#7. 이상득은 친인척 관리 대상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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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군’들의 밀약, 촛불에 한 줌 재로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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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검찰 수사 나서며 회장 퇴진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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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웃음 뒤에 감춰둔 ‘비수’는 예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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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암호명 ‘동해 일출’ “VIP를 독도로 모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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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권 실세들 떡고물 챙기려 ‘4대강’ 기웃기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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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정권 끝날 때까지 “믿을 건 내 사람뿐”
- MB 정권, 사정·정보·인사 등 핵심 라인 ‘고대·영남’ 출신 독식


#14. ‘박근혜 대항마’, 날개도 못 펴고 스러지다
- 정운찬의 총리 취임 직전 즉흥적 ‘세종시 수정안’ 한마디로 권력 쟁투 가열


#15. 요란한 구호 속 한몫 챙기기 바빠
- 5년 내내 ‘동반 성장’ ‘녹색 성장’ ‘중도 실용’ ‘공정 사회’ 등 키워드만 난무


#16. 궐 밖에선 최고 권력자였지만…
- MB 정권 실세의 상징 ‘6인회’ 멤버, 잇따라 몰락의 길 걸어


#17. 실세들이 설친 자리엔 빚더미만 남아
- MB 정권 ‘자원 외교’, 공기업들에 수조 원대 부채 떠안겨


#18. KT·포스코는 정권의 전리품
- 민간 기업을 낙하산 집합소로 만들어…버티면 검찰권 동원해 압박


#19. 정운찬·김태호·오세훈 제 무덤 파거나 포격에 무너져
- 실패로 끝난 MB의 ‘후계 프로젝트’…‘박근혜 대항마’ 부각되기도 전 좌초


#20. 강남 ‘큰손’ 부동산업자에게 땅 비밀 거래 꼬리 잡히다
- 시사저널, ‘내곡동 사저 단독 공개’로 MB 정권 강타…특검도 의혹 해소 못해


#21. 거물들 모셔왔으나 성과 없이 내리막길
- ‘친기업주의’ 정책 펼치며 해외 유명인들 영입…권력 내부에서는 균열 조짐


#22. 잇단 북 도발에 ‘병역 면제 정권’ 조롱
-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안보 무능’ 드러나…컨트롤타워 부재 따른 혼선에 지지율 뚝


#23. ‘MB맨’ CEO들 빚더미 안기고 퇴장하다
- 지난 정권 5년간 공기업 부채 244조원 증가…4대강 사업 등에 돈 쏟아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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