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 안녕치 못한 시절
  • 김재태 | 편집위원 ()
  • 승인 2013.12.2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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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끝자락에 이르면 가까운 사람들의 안부가 사뭇 신경 쓰이게 됩니다. 송년회 등 부쩍 늘어난 술자리도 그런 안부 물음의 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준비하는 손길에도 같은 마음이 담길 것입니다.

이 연말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특별한 목소리로 안녕을 묻는 안부 인사가 뜨겁게 오가고 있다고 합니다(60쪽 사회면 기사 참조). 첨단 기술의 은총을 입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망이 아닌 ‘대자보’라는 구닥다리 통신 수단을 이용한 것들입니다. 마치 ‘열려 있어도 열리지 않은’ 소통의 역설을 반증하는 듯합니다.

며칠 전 이른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나붙어 ‘안녕 인사’ 열풍의 진원지로 떠오른 그 대학에 가보았습니다. 대학 후문 담벼락에는 아닌 게 아니라 100여 장의 대자보가 빈자리 없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대부분 지금껏 안녕한 척하며 살아왔을 뿐 사실은 전혀 안녕치 못하다는 심정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맨 처음 대자보를 붙인 청년의 안녕하시냐는 물음에 대해 아픈 성찰로 답한 것들입니다. 내용들은 거개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철도 파업 등으로 안녕하지 못한 시대를 ‘안녕하게 지내온’ 데에 대한 반성문에 다름없습니다. 필자는 대학생부터 가정주부, 중학생, 60대 노인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 불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안녕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잘못 살았다. 이제는 안녕하지 못하다고 솔직하게 외치겠다.’ 정작 진짜 반성문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떵떵거리는데 애먼 사람들이 단체로 반성문을 쓰고 있는 이상한 형국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1항과 제35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두 국민이 안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기본권을 가지고 있음을 명시한 것입니다. 그런 국민들이 지금 자신들의 안녕을 자꾸 되묻고 있습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2013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 결과’도 이런 흐름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경제적 부의 분배가 불공정하며(83.6%), 양극화가 심각하다(86.9%)고 느끼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 나라 국민의 안녕 정도를 지표화한 것 중 하나로 국가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지수는 OECD 회원국 36개국 중에서 바닥권(27위)일 정도로 낮습니다. GDP(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15위의 경제력이 무색한 순위입니다. 반면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수위를 다투는 부탄이라는 나라의 경제력은 우리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삶이

안녕하다고 느낍니다. 이 나라의 국왕은 궁궐을 의회에 내어주고 허름한 집에서 기거합니다. 그러고는 국민이 행복하지 않으면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탄이 더불어 행복하고 더불어 안녕한 나라가 된 데에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안녕’ 자체가 안녕치 못하다고 말해지는 지금, 한 해의 끝은 여전히 어수선합니다. 시사저널이 이번 호에 선정해 내보내는 올해의 인물들마저 애석하게도 그다지 밝은 면면이 아닙니다. 새해에는 제발 국민 모두가 ‘안녕함의 슬픔’ 대신 따뜻한 안부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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