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못한’ 그들이 칼자루 쥐었다
  • 김성윤│문화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
  • 승인 2013.12.2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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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 대중 결집시켜

역사는 언제나 청년이라는 순수한 형상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청년은 불가능하게 된 지 오래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대학생들이 청년의 얼굴로 ‘안녕들 못하다’고 말을 걸고 있다. 이 현상은 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기존 운동의 문법을 혁파하는 청년 메시아가 강림했으니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아서? 속된 말로 우리 사회가 ‘골’로 가지만은 않을 것 같으니 안도할 수 있어서? 아니면 그들과 함께 무엇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제 막 대자보가 붙고 학생들이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흐름을 예단해 평가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지금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지난 10여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몇몇 질문들을 남긴 채 사라지고 마는 이벤트가 될 수도 있고, 그 어떤 한계치를 넘어 ‘새판’을 짜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

12월17일 동국대에서 열린 ‘안녕하지 못한 동국인들의 성토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그중에서도 ‘안녕’이란 말이 모든 가능성의 시발점이 됐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말 그대로 안녕치 못한 사람이 넘쳐나는 까닭에 이 말은 수많은 사람을 불러낼 수 있다. 대자보 종이로, 웹사이트 게시판으로, 그리고 거리로. 이 프레임에선 보수 성향인 일베나 자유대학생연합조차도 (비록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안녕치 못하다며 대답할 정도다. 우리 중 누가 안녕하고 싶지 않겠는가.

‘안녕들’ 대자보가 철도노조의 파업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조직화된 대학생이 아닌 이들이 노동과 공공성 의제에 참여했다. 2008년 촛불 정국에서 노동운동 진영이 참여하자 군중이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양상이다. 또한 괴담 내지 유사 과학에 의존했던 당시와는 달리, 민영화 문제에 대한 분석적 판단을 갖추고 있다. 민영화가 아니라는 정부·여당과 보수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방어에 꿋꿋하게 맞서는 모양새다.

모호한 언어가 한계 될 수도

어떤 언어가 보편적이고 적합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한데 모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발목이 잡힐 가능성도 없진 않다. 안녕이라는 모호한 언어 아래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안녕들’ 대자보는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질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한계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구조적인 문제를 직접 목격하는 순간이 도래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흐름은 언제 어떻게 ‘포텐’(잠재력)을 터뜨릴지 모르지만, 딱 그만큼 언제 어떻게 휘발될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확실히 칼자루는 안녕하지 못한 그들이 쥐었다. 물론 이 칼자루를 얼마나 날카롭게 벼릴지 우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안녕하지 못하다고 외치며, 지금 젊은 그들이 묻는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직은 그 칼날이 어떤 아버지를 겨눌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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