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안 계시니 ‘성적표’도 초라하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3.12.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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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한화·CJ 등 오너 구속된 그룹 실적 악화 대형 투자 지연 등 후유증 앓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총체적 위기 상황이다.”

최근 기자가 만난 10대 그룹 임원들의 한결같은 볼멘소리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국내 재벌 기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삼성·현대차 등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그룹은 실적 악화 ‘폭탄’을 맞았다. 30대 그룹 중에서 3분기 누적 매출과 영업이익이 동시에 증가한 그룹은 다섯 곳에 불과했다. 특히 SK·한화·CJ·LIG그룹 등은 총수 부재로 인한 어려움이 더했다. 네 곳 중에서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이 증가한 곳으론 SK그룹이 유일했다. 그나마 SK도 새롭게 계열사에 편입한 SK하이닉스의 선방으로 체면을 유지했다. 주력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SK네트웍스·SK텔레콤의 수익성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들 그룹은 오너가 구속되면서 비상 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오너의 경영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수펙스추구협의회·비상경영위원회·그룹경영위원회 등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 구속된 회장을 대신해 계열사 CEO(최고경영자)들이 집단으로 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하지만 집단 경영 체제는 곧 한계에 부딪혔다. 오너가 자리에 없다 보니 대규모 투자나 미래 먹거리 발굴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 투자 규모도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

2010년 5월12일 전경련 회장단회의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허창수 GS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박용현 두산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이준용 대림 회장, 조석래 전경련 회장, 최경환 지경부장관, 현재현 동양 회장, 최용권 삼환기업 회장, 최태원 SK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 연합뉴스
재계에서는 현재 오너 공백이 장기화될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수석부회장 형제가 동시에 구속돼 있는 상태다. LIG그룹 역시 구자원 회장과 장남인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이 함께 구속됐다. SK그룹에서는 대법원의 파기 환송을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8월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역시 대법원에서 일부 혐의에 대한 파기 환송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구자원 회장의 경우 주력 계열사인 LIG손해보험(LIG손보) 매각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회사 지분을 매각해 손해를 입은 CP(기업어음) 투자자들에게 보상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재계는 LIG손보의 매각 작업이 마무리되면 LIG그룹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사저널은 오너가 구속돼 위기가 가중되고 있는 주요 재벌 그룹의 현주소를 들여다봤다.

SK, 주력 계열사 실적 악화 골머리

지난 6월28일 중국 베이징 조어대(釣魚臺)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중국 최대 국영기업인 시노펙과 SK종합화학은 이날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합작 법인을 설립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투자비만 3조300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이 자리에서 왕티엔푸 시노펙 총경리는 “최태원 회장이 왔어야 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 회장과 왕 총경리는 2006년부터 합작 법인 설립을 논의해왔는데 사업 진행이 삐걱거릴 때마다 최 회장이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실을 보는 자리에 최 회장이 빠져 왕 총경리가 상당히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최 회장은 국내 주요 그룹 총수 중에서도 구속 기간이 가장 길다. 올 초 징역 4년으로 법정 구속됐으며, 항소심에서도 징역 4년이 유지됐다. 경영 공백이 적지 않았다. SK의 주요 계열사 16곳 중 무려 12곳의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최 회장이 대표로 있는 SK이노베이션은 매출이 6조원 가까이 빠졌다. 시간이 갈수록 실적 하락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다. 주요 계열사의 3분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4.1%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64.2%나 하락했다. SK해운·SK증권·SK건설 등이 줄줄이 적자를 기록했다. SK네트웍스·SK증권·SK커뮤니케이션즈 등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이 그나마 선방했다. 올 3분기까지 SK하이닉스의 누적 매출은 10조8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5%나 성장했다. 누적 영업이익도 2조6000억원으로 턴어라운드(실적 개선)에 성공했다. SK텔레콤도 매출 12조3072억원, 영업이익 1조5014억원을 기록했다.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실적이다. 하지만 SK텔레콤의 실적 호전에 대해선 자회사인 하이닉스의 지분법 이익 계상에 따른 착시 효과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 주도로 2011년 말 하이닉스를 인수할 당시만 해도 SK와의 시너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며 “계열사들의 실적 악화에는 업황 부진과 함께 최 회장의 경영 공백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했다.

SK그룹이 최근 M&A(인수·합병) 시장에서 잇달아 쓴맛을 본 것도 최 회장의 공백 탓으로 평가된다. SK E&S와 SK텔레콤은 각각 STX에너지와 ADT캡스 인수를 추진했다가 접었다. 수펙스추구협의회가 현재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지만 한계도 있다. 1조원대 이상의 큰 매물을 오너 없이 인수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미 SK텔레콤·SK케미칼·SK종합화학 등 주요 계열사들은 투자를 줄여나가고 있다. 16개 계열사 중 유·무형 자산 취득액이 늘어난 기업은 4곳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오너 공백에 따른 SK 계열사의 실적 악화와 반쪽짜리 의사 결정 구조의 문제는 내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화, 80억 달러 공사 땄지만 후속 수주 놓칠 판

한화그룹도 현재 김승연 회장의 구속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해 8월 법정 구속됐다. 이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됐고, 일부 혐의에 대해 대법원이 파기 환송하면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3년여 동안 검찰 수사와 재판에 대응하느라 한화그룹은 큰 손실을 입었다. 올 3분기까지 한화그룹 전체 계열사의 매출액은 28조3470억원으로 전년 동기에 비해 6.8%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8990억원으로 30% 가까이 줄어들었다. 영업이익률은 4.4%에서 3.2%까지 낮아졌다.

주력 계열사인 한화케미칼은 지난해 1121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올해 3분기에도 939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김승연 회장이 주도해온 태양광 사업의 적자가 가중된 탓이다. 한화그룹 고위 관계자는 “독일 및 말레이시아 정부와의 협상력이 약화된 게 원인”이라며 “김 회장이 있었다면 고위 관료들과 담판을 벌여 추가적인 협상 이익을 끌어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한화도 현재 김연배 한화투자증권 부회장 주도로 비상경영위원회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M&A나 신규 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마다 발표해왔던 신규 투자 계획도 올해는 공표하지 않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연말 인사를 하지 못했다. 지난해 인사는 올해 비상경영위원회가 꾸려진 뒤에야 단행됐다. 올해 연말 인사는 내년 2월께로 연기된 상태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12월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하기 위해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법원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CJ, 신성장 동력 잃고 표류 중

무엇보다 우선권을 확보한 사업의 공사를 추가 수주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예로 한화건설은 2012년 80억 달러(8조4200억원) 규모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을 수주했다. 국내 건설 역사상 최대 수주 규모다. 이라크 총리는 “한화는 이제 이라크 회사”라며 향후 진행될 100만호 신도시 건설 계약에서도 우선권을 약속했다. 김 회장이 이라크 총리와 면담을 통해 구두 합의를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 회장의 구속으로 후속 수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라크 재건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가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이라크 사업에서 김 회장의 존재는 절대적”이라며 “총수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주요 경영 현안에 대한 판단이 지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단기 성과 위주의 근시안적 경영 풍조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2010년 “창립 60주년을 맞는 2013년까지 그룹 매출 38조원을 달성하겠다. 이 중 절반 이상이 해외 매출이 되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2020년까지 그룹 매출 100조원, 영업이익 10조원, 글로벌 매출 비중 70%를 넘어서는 ‘그레이트 CJ’를 완성하는 것이 이 회장의 계획이었다. 지난해 CJ그룹은 13조686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올 3분기 누적 매출은 소폭 늘어난 15조7921억원이다. 현재 상태라면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재현 회장이 지난 7월 탈세와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된 영향이 컸다. CJ그룹은 지난 7월 그룹경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채욱 CJ주식회사 겸 CJ대한통운 대표, 김철하 CJ제일제당 대표 등 전문 경영인뿐 아니라 오너 일가인 손경식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도 위원회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나 신규 시장 진출 논의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글로벌 기업 M&A를 통해 덩치를 키우고 글로벌화하기를 기대했던 이 회장의 꿈 역시 깨질 처지다.

실제로 CJ제일제당은 최근 라이신 생산력 글로벌 1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 업체와 인수 협상을 벌이다가 중단했다.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 사료업체 인수 작업도 여섯 곳 중 한 곳만 성공했다. CJ대한통운은 미국과 유럽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글로벌 물류업체 인수를 추진해왔다. 이 협상 역시 의사 결정 지연으로 중단된 상태다. CJ와의 인수 협상이 결렬되면 외국 경쟁 업체가 인수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CJ프레시웨이는 미국과 베트남 현지 유통망 확대를 계획했지만 진척이 없는 상태다. 한국형 헬스 앤 뷰티 스토어로 중국에 진출한 CJ올리브영도 고전 중이다. 2호점인 상하이 환치우강점을 끝으로 추가 점포 개설이 지연되고 있다. CJ그룹 관계자는 “최근 중국에서 헬스 앤 뷰티 스토어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발 빠르게 대응해도 모자란데 추가 출점과 같은 대규모 투자가 더디다”고 말했다.

주요 계열사의 실적 역시 악화되고 있다. CJ 계열사 중에서 CJ오쇼핑만 전년에 비해 영업이익이 증가했다. CJ제일제당과 CJ E&M, CJ헬로비전, CJ씨푸드 등은 영업이익이 3.3~102.5% 감소했고, CJ프레시웨이와 CJ대한통운은 적자로 전환됐다. 이로 인해 지주회사인 CJ주식회사는 3분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 감소한 1774억원을 기록했다.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도 5995억원으로 26.9% 감소했다.

1200억원대 횡령 및 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12월1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을 마치고 휠체어에 탄 채 법원을 빠져나오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효성·LIG·동양도 ‘오너 리스크’ 촉각

효성·LIG·동양그룹도 현재 오너가 검찰 수사를 받거나 구속된 상태다. 이로 인한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효성그룹은 조석래 회장이 탈세 및 배임·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연말 인사나 내년 사업 계획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고 있다. 해외 클라이언트나 거래처에서 본사에 소명을 요구할 정도다.

특히 효성그룹의 경우 올해 연결 매출은 소폭 감소했지만,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2.7%에서 4.9%로 상승한 상태인데 조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그룹 실적 악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효성그룹 관계자는 “그룹 매출의 70%가 해외에서 발생한다”며 “외국 경쟁사에서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 문제를 갖고 의도적으로 흠집 내기를 하고 있어 내년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법원은 12월19일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전휴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는 “주요 범죄 혐의에 관한 소명 정도, 피의자의 연령과 병력 등을 감안하면 구속의 필요성이나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이를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냐”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12월17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여의도 신축 회관 준공식에 참석한 것을 두고 재계 기 살리기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며 “준공식 참석 이틀 후에 조석래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고 말했다.

LIG그룹의 경우 오너가 구속되면서 그룹 지배 구조 또한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 경영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지난해 LIG그룹은 자산 20조3000억원, 연결 매출 11조8000억원을 기록했다. 이 중 90% 정도가 LIG손해보험에서 나온다. 지주회사인 ㈜LIG나 LIG넥스원·LIG에이디피·휴세코 등에서 나오는 매출은 미미한 수준이다.

LIG그룹은 구자원 회장과 장남인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이 지난 9월 구속되면서 승부수를 던졌다. 주력 계열사인 LIG손보의 지분을 팔아 CP 피해자들의 피해를 보전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LIG손보의 매각 작업이 마무리되면 LIG그룹은 방산회사인 LIG넥스원을 주축으로 하는 제조 그룹으로 바뀌게 된다. 그룹 규모도 현재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다. 이와 관련해 LIG그룹 관계자는 “회사 매각을 위한 주간사 선정 작업을 비공개로 진행 중이다. 12월 안에 주간사 선정이 마무리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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