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vs 아베 “제대로 맞장 한번 떠?”
  • 임수택 편집위원 ()
  • 승인 2013.12.3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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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 치닫는 일본…대국화 나서는 중국

2012년 1월 일본 서점가에서 한 권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10만여 권이 팔리며 화제가 됐다. <아버지 김정일과 나>라는 제목의 책은 도쿄신문 고미요지 기자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과 수년간에 걸쳐 주고받은 메일, 2~3차례 만나 나눈 대화 내용 등을 정리한 것이다. 고미요지는 이 책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된 상황에 “나 자신도 놀랐다”고 말했다.

왜 일본인들은 북한 문제에 그토록 관심이 많을까.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에 익숙한 일본인들은 유일하게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할 국가로 북한을 지목한다. 대중의 여론이 이런데 정치인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보수 정치인들은 북한을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활용하고 국민을 하나로 뭉치는 데 이용해왔다.

패전 이후 일본의 대북 적대 기조는 계속 유지돼왔지만, 최근에는 적대의 대상이 바뀌는 흐름이다. 중국의 부상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일본에게 가장 위협적인 대상은 중국으로 바뀌었다. 민주당 정권 시절의 대중국 관계는 비교적 상생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민주당 정권 초대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기오는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민주당 2인자였던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 역시 ‘친중(親中)파’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Xinhua 연합 , 아베 신조 일본 총리 ⓒ AP 연합
“중국을 포위하라” 아베의 전 방위 외교 전쟁

이런 흐름은 곧 바뀌었다. 일본 정가에서는 중·일 간 갈등이 시작된 시기를 2010년으로 본다. 2010년 중국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포기한 대신 중화 문명의 부흥을 부르짖는 대국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주변국과 영토 문제를 놓고 충돌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중국 쪽에서 의도적으로 문제화했다고 생각한다. 갈등의 단초는 2010년 9월7일 일어났다. 센카쿠 열도 주변에서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이 나포됐는데, 중국은 즉각적으로 일본에 희토류 공급을 중지하겠다는 초강경 자세로 나왔다. 일본 전자산업에 필수 요소인 희토류가 부족할 경우 공장이 멈춰서는 상황을 눈앞에 둔 일본은 결국 선장을 석방시키며 백기를 들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 사회에서는 중국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중국을 위협적인 국가로 느끼기 시작했다.

일본 내 대표적 우익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 도지사는 민간이 소유하고 있던 센카쿠 열도를 도쿄 도가 구입하겠다고 나섰는데, 당시 민주당의 노다 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극우 인사가 나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중·일 관계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한 끝에 결국 센카쿠 열도를 정부가 사들이게 된다. 그런데 상황이 일본 정부의 생각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중국은 자국의 영토를 사고팔았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노다 정부는 이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했고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읽은 정치인이 아베 총리다. 1차 총리 임기를 1년 만에 끝낸 아베는 재등장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고 그때 눈에 띈 것이 바로 ‘중·일 갈등’이었다.

2012년 12월 다시 총리에 오른 아베는 중국에 대한 포위망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아베는 1년 내내 쉬지 않고 전 세계를 돌며 “중국이 아니라 일본을 선택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취임 이후 아베는 거의 매달 외국을 찾았다. 방문한 나라는 29개국이며 정상회담을 가진 국가만 100여 개국에 달한다. 일본에서 개최한 ‘아프리카 개발회의’, 2013년 12월15일 폐막한 ‘일본-아세안 특별정상회의’까지 더하면 아베는 전 세계 외교에서 2013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아베 정부의 기본 외교 자세에 대해 “이웃 나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중국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베가 직접 방문해 아세안 국가 정상들을 만날 때 주로 이야기했던 주제는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전 및 동남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위협이었다. 반면 아세안 국가들은 일본과의 경제 협력에 초점을 맞췄다.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국가들도 ‘중국 포위’라는 화제를 의식적으로 피했다.

이번에 열린 일본-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도 비슷한 엇갈림이 있었다. 일본은 아세안에 5년간 2조원의 공적 개발 원조(ODA)를 제공할 의사를 밝히며 대신 아세안 각국을 설득해 중국의 방공식별권에 반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세안은 성명서에서 “비행의 자유 및 민간 항공의 안전 확보에 관한 협력을 강화한다”는 추상적인 내용을 담는 데 그쳤다. 아사히신문은 “아세안 참가국들 중에 중국과 친밀한 국가가 많았던 탓”이라고 분석했다.

아세안 각국과 중국의 협력 기반 역시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의 ODA 원조, 원전 수출 등 대규모 경제 협력 전략이 중국과의 경쟁을 조건으로 하는 투기적인 전략이란 점을 상대국이 인식하고 있어서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강한 중국’과 ‘강한 일본’이 동시에 존재한 적은 없다. 19세기 중엽까지 중국이 패권 국가였을 때는 일본이 약했고,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고 강하게 성장했을 때는 중국이 약했다. 지금처럼 중국과 일본의 힘이 대등하게 팽배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셈이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커지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인식의 차이에 있다. 일본은 중국의 문제를 ‘패권주의’로 본다. 중국 내부에서 문제를 찾고 있다. 일본 자신들의 과거사 청산, 역사 인식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관련한 진단은 미진하다. 집단적 자위권을 확립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등 강경 보수의 길을 걷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야스쿠니 참배, 외교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

아슬아슬하던 두 강대국 간 갈등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쪽은 아베였다. 아베는 2013년 10월25일 월스트리트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중국이 법치가 아니라 무력으로 아시아 상황을 바꾸려고 하는 것을 우려한다”며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항해 일본이 아시아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2013년 12월26일 아베는 결국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지지율이 하락하는 추세에서 보수층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주변국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충돌이 실제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리라고 보는 시각은 적다. 문제는 서로가 자신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적인 주장에 얽매여 발을 빼려야 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될 경우다. 현재 둘 사이에 문제가 되고 있는 센카쿠 열도는 단순한 영토 분쟁만을 뜻하지 않는다. 주변 해역에 존재하는 천연자원에 대한 경제적 이익 문제도 담고 있으며 국민적 여론 때문에라도 밀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 내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외교적 위기에 대비해 현재의 외교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지만 아베 내각은 새해에도 역시 ‘대항 외교’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필연적으로 대립해야 하는 일본은 미국과 관계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한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기대하고 있다. 양쪽의 ‘외교’ 내에 한국이 포함돼 있는 셈이다. 한·미·일 삼각 동맹 관계의 틀 속에만 있던 우리 역시 전략적으로 중요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물론 선택의 최우선은 국익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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