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다” 오리발 내밀며 ‘검은돈’ 챙긴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01.0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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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은행들, 힘센 나라엔 세금 정보 제공 제3세계에선 ‘신규 고객 모집’

독일 축구 분데스리가의 최고 명문 구단인 ‘바이에른 뮌헨’은 2013년 꿈같은 한 해를 보냈다. 분데스리가, UEFA 챔피언스리그, 독일축구연맹컵(DFB)을 잇달아 석권한 데 이어 연말에는 FIFA 클럽월드컵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그러나 구단 단장인 울리히 회네스에게 2013년은 ‘악몽’이었다. 지난해 4월 탈세 혐의를 받고 독일 세무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주간지 ‘포쿠스(Focus)’가 폭로한 것이다. 회네스는 스위스 본토벨(Vontobel) 은행의 익명 계좌를 통해 지금까지 320만 유로를 탈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4년 서독의 월드컵 우승 당시 국가대표로 활약한 회네스는 은퇴 이후 사업가로 변신해 큰돈을 벌었다. 2009년에는 독일의 ‘축구 황제’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뒤를 이어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그의 인기는 현역 시절보다 더 뜨거웠다. 회네스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면 팬들이 그의 응원곡을 따로 부를 정도였다.

ⓒ시사저널 박은숙·EPA·AP연합
‘뜨끔’한 탈세자들, 이어지는 자수 행렬

그러나 탈세 혐의가 불거진 후부터 독일인들은 회네스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회네스가 그동안 “기업인들은 사회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축구계의 큰손은 하루아침에 탈세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울리히 회네스의 탈세 사건은 독일과 스위스가 공조한 ‘검은돈 몰아내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스위스 은행은 검은돈의 종착지로 악명이 높았다. 스위스 은행들이 ‘제3자에게 고객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은행비밀법을 근거로 외국 정부의 탈세자 수사에 제한적으로만 응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탈세자가 자수할 경우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독일 세법 371조도 별 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2006년 상황이 급변했다. 스위스 은행들의 고객 리스트가 담긴 이른바 ‘세금 CD’가 흘러나오면서 탈세자들의 자수가 이어졌다. 특히 2008년에 세금 CD를 통해 도이체포스트(Deutsche Post)의 클라우스 춤빙켈 회장의 탈세 사실이 드러난 게 결정적이었다. 스위스 은행도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 심리가 퍼지면서 자수자가 급증했다. 회네스 탈세 사건이 발생한 2013년에도 상반기에만 1만4500여 명이 자수했다. 역시 ‘회네스 같은 거물도 단속망을 피할 수는 없다’는 불안 심리 때문이다.

그러나 세금 CD도 스위스의 은행비밀법을 이용한 탈세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독일은 물론 영국, 미국 등이 스위스의 은행비밀법 자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해왔다. 독일과 영국은 스위스와 세금협정 초안 제정에 합의했다. 스위스 은행들이 외국 고객의 은닉 자산에 대해 알아서 세금을 매겨 해당 국가 세무부에 납입한다는 내용이었다. 단, 누가 얼마나 많은 돈을 스위스 은행에 맡겨두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보수 성향의 기독민주연합(CDU)과 친기업 자유주의 성향의 자민련(FDP) 연합정부가 과반수를 차지한 독일 상원은 이 조약에 동의했지만,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이 다수인 하원은 반대표를 던졌다. 결국 이 조약은 체결 직전인 2012년 12월 파기됐다. 사민당은 모든 해외 탈세자를 기소할 수 있도록 세금 정보 자동 교환 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회네스가 급하게 자수를 결심한 데는 사민당의 강경안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민당의 안이 채택될 경우 처벌을 피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미국 주도로 체결된 해외계좌납세법(FATCA) 조약은 스위스의 은행비밀법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 조약은 미국에 진출한 외국 금융기관은 미국에 납세 의무가 있는 고객 정보를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미국 내에서 발생한 수익의 30%가 원천 징수된다. 즉, 미국에 지사를 둔 스위스 은행이 미국인 탈세자의 정보를 자진 신고하지 않을 경우 미국에서 낸 수익의 30%를 무조건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협정은 당초 올 1월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스위스는 지난해 검은돈 몰아내기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국외 탈세자를 끈질기게 추적 중인 미국·독일·프랑스 고객들이 주요 관리 대상이었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사설 은행인 크레디트 스위스(Credite Suisse)는 거액을 예치한 독일 고객들에게 ‘2013년 12월 말까지 독일 재무부에 자수하지 않을 경우 계약을 해지하거나 은행이 직접 재무부에 신고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앞으로는 출처와 납세 여부가 분명한 ‘화이트머니(White Money)’만을 다루겠다는 것이다.

남미·중동·아프리카의 ‘검은돈’은 환영

그렇다면 스위스 은행들은 정말 깨끗한 돈만 받을까. 독일의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는 “스위스 은행권이 한편으로는 북미와 유럽연합(EU)의 검은돈을 몰아내면서, 다른 한편으론 남미·중동·아시아·아프리카에서 대대적으로 신규 고객을 모집 중이다”라고 폭로했다. 스위스 은행은 상대 국가의 정치적 상황을 악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인도에서도 정치인들의 스위스 비밀 계좌가 문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이들 국가는 국력도 약하고 정치인에 대한 수사가 엄정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스위스 은행이 안심하고 이들의 돈을 받고 있다는 것이 ‘디 차이트’의 지적이다.

이런 이중 전략은 스위스의 은행비밀법 개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배경이다. 물론 스위스가 결국에는 은행비밀법을 완전히 폐기하리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독일 연방재무부의 한 팀장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스위스는 장차 해외 탈세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검은돈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이상 합법적인 해외 자본이 스위스로 들어오기를 꺼린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예를 들어 현재 독일 기업이 스위스에 합법적인 투자를 해도 곧바로 세무 당국의 조사를 받는다. 이는 당연히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만약 스위스 은행이 합법적인 돈만 받아들일 경우 이러한 부담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고객은 스위스 은행의 주요 고객 중 하나다. 독일은 스위스에 숨어 있는 돈과 결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여론을 신경 쓰는 정치인들은 의외로 독일 재무부의 탈세자 추적에서 우군이 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재무부 관계자는 “사적으로 친분이 있더라도 재계 인사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바로 접촉을 끊어버리는 게 독일 정치인의 생리”라고 말했다.

스위스도 나름으로 준비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스위스 연방 금융시장감독기구(FINMA)는 탈세 방조 혐의로 미국 당국의 조사 대상이 되고 있는 은행들에 수억 달러 규모의 충당금을 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충당금의 용도는 미국 당국이 미국인의 조세 회피를 도운 스위스 은행과 금융인에 대한 사법 처벌을 하지 않는 대신 막대한 벌금을 추징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탈세 등 불법 행위에 관한 정보는 필요할 때 제공하더라도 비밀만은 계속 유지하겠다는 스위스 은행의 전략은 언제까지 먹혀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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