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고향에서 계속 살 수 있게 하는 게 중요”
  • 임수택│편집위원 ()
  • 승인 2014.03.0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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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치매 잡기 5개년 계획 ‘오렌지 플랜’에 예산 본격 투입

2013년도 일본 정부의 예산은 92조6115억 엔(약 965조9379억원)이다. 이 중 31.4%인 29조1224억 엔이 사회보장 관련 비용으로 포함돼 있는데, 이게 해마다 증가한다. 사회보장 관련비의 대부분은 의료비와 요양비다. 요양보험에 지출되는 돈만 9조4000억 엔으로 사회보장 관련비의 32%에 달한다. 막대한 돈이 사회보장 관련비로 지출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고령화다. 3명이 1명을 돌봐야 하는 인구 구조는 일본의 그림자다. 전체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고령자들이 겪는 각종 질환은 의료비를 증가시키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치매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은 고령자 질환은 치매다. 460만명을 넘어섰는데 뇌졸중 환자보다도 많다. 일본 정부가 추산했던 환자 수보다 1.5배나 많아졌다. 고령자만 놓고 봤을 때 전체의 15%가 치매 환자다. 70~80대 연령층으로 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80대 이상 고령자에서는 절반 정도가 치매 환자로 분류된다. 65세 이상 고령자를 5세 단위로 쪼개보면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발병률이 2배씩 높아지고 있다. 특히 현재 64~66세가 되는 단카이 세대(베이비붐 세대)의 나이가 들수록 치매 환자 역시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는 게 문제다.

한 노인이 도쿄의 거리를 걷고 있다. 일본의 고령자 가운데 전체의 15% 정도가 치매 환자로 추산된다. ⓒ AP연합
“치매 환자 가족은 철도회사에 배상해라”

일본에서도 치매는 가족들에게 고통스러운 존재다. 본인의 문제만으로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 문제를 동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각한 경우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치매 환자가 발생했을 때 생길 수 있는 가족의 무한 책임을 보여주는 사례는 상당히 많다.

지난해 8월9일 치매에 걸린 91세 남성이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철도회사인 JR도카이는 유족을 상대로 열차 지연에 따른 피해 보상을 제소했다. 나고야 지방재판소는 “가족들이 환자를 위해 수립해둬야 할 안전 대책이 미흡했다”며 유족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치매 환자의 부인과 장남에게 철도회사가 입은 피해 보상액 720만 엔(약 73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판결의 요지는 이랬다. 같이 살고 있는 부인이 치매 환자를 24시간 보살펴야 하는데도 태만하게 돌본 과실이 있고, 같이 살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장남은 환자가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한 책임에 심각성을 느껴 집에서 돌보는 대신 외부에서 돌보는 쪽으로 변화하는 흐름은 일본에서도 나타난다.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고우야마 도시미 씨는 “일본의 경우, 한국과 비슷한 유교 문화권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하지만 치매는 돌봐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보살피는 가족이 지쳐간다. 생활 자체도 어려워지면서 최근에는 공공시설을 이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 관리의 흐름이 가족에서 공공시설 이용으로 바뀌면서 제도도 따라 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요양보험제의 변화다. 1994년 고령자를 위한 요양대책본부를 만든 이후 여러 논의를 거친 끝에 2000년 4월부터 실시되고 있는 제도다. 지방정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는데, 아이치 현에서는 현 정부가 치매 환자를 돌보겠다는 캠페인을 내세워 주목받았다.

문제는 캠페인과는 별개인 시스템의 효율적인 운영이다. 관리를 위해서는 이름·얼굴·병명 등 환자의 상세한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데 환자와 가족들이 정보 공개를 주저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환자를 돌보겠다는 취지를 내세웠지만 자칫 환자와 가족들을 압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치매로 예산 부담이 커진 중앙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11개 부처가 공동으로 대처한다. 예를 들면 경찰청은 치매 환자들이 운전면허를 갱신할 때 사고 방지 대책을 준비하고 있고, 소비자청은 악질적인 방문 판매에서 치매 환자를 보호하는 방법을 마련했다. 금융청은 금융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환자들이 겪을 수 있는 피해 및 불편에 대한 대책을 강구 중이다.

일본 정부가 의결한 2014년도 예산안에서 주목해야 할 항목이 ‘오렌지 플랜’ 예산이다. 치매에 관한 대책을 정리한 ‘오렌지 플랜’을 추진하기 위한 재원으로 32억 엔, 우리 돈 약 320억원을 마련했다.

2012년 11월17일 도쿄의 한 공원에서 노인들을 위한 체조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 EPA 연합
정보 교환 위한 ‘치매 카페’ 개설 준비

오렌지 플랜은 치매를 초반부터 공세적으로 다루기 위한 계획이다. 의사·간호사·복지사로 구성된 ‘초기 집중 지원팀’은 치매의 평가와 가족 지원 등 초기 지원을 종합적이고 집중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여러 직업군으로 구성된다. 전문가 팀이 직접 집으로 방문해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환자나 아직 심하지 않은 환자 등을 대상으로 수개월 동안 상담과 회복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초기 집중 지원팀을 신설해 전국 100곳에 설치하고, 2017년까지는 전국 모든 지역에서 실시한다는 게 일본 정부의 방침이다.

환자 근처에서 가족을 돕는 지역 지원 추진원도 470개 지역으로 확대해 배치하며 초기에 치매 진단을 정확히 할 수 있도록 전문성을 지닌 의료기관 역시 현재 175개에서 300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일본 정부의 방향은 ‘치매 진단을 빨리 내려 조기에 대응한다’로 압축될 수 있다.

오렌지 플랜이 제대로 작동할 경우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 일본 내부에서는 “조기 대응 시스템이 작동하면 치매 환자들이 정든 고향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며 이것은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진단한다.

2014년 관련 예산은 2013년에 비해 상승했다. 앞으로도 추세는 이럴 수밖에 없다. 2015년 이후에는 일본에서 시행되는 치매 방지책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산 역시 그에 상응해 증가하게 된다. 여기에 이미 준비 중인 정책들이 있다. 가족을 대상으로 치매 간호 교육을 전개하고 의견을 교류할 수 있는 장소인 ‘치매 카페’ 개설을 준비 중이다. 지역 사회에서 환자를 도울 수 있는 시민 후견인을 육성하는 방안도 마련되고 있다. 오렌지 플랜에 포함된 초기 집중 지원팀과 지역 지원 추진원은 2015년부터는 시범이 아닌 전국적 사업으로 전환된다. 후생노동성은 앞으로 더 많은 곳에서 대응책이 시작되는 2015년을 준비하기 위해 구체적인 매뉴얼 제작 작업을 하고 있다.

물론 그늘도 있다. 지난 2월4일 후생노동성이 개최한 오렌지 플랜과 관련한 세미나에서는 우려 섞인 발언들이 나오기도 했다. 쿠로이와 우치 가나가와 현 자문위원은 “오렌지 플랜의 내용에는 찬성하지만 재원과 인력 확보 의지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2013년의 경우 전국에 있는 치매 질환 관련 의료센터에 ‘지난해의 반액으로 운영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중앙정부의 의지를 지방정부가 의심하는 이유”라며 국가의 대응을 문제 삼았다. 진통이 있지만 장기적으로 대비책을 고민하고 있는 점에서만큼은 우리보다 앞서 있다. 일본의 고령화를 뒤쫓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계획이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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