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간첩 증거 조작 '천만 원 거래' 했나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4.03.11 09:3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살 시도한 김씨 유서에서 밝혀…검찰, 국정원 강제 수사 전환

피로 쓴 세 글자 ‘국정원’.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 증거 조작 의혹의 핵심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던 국정원 협력자 김 아무개씨(61)가 3월5일 서울 영등포의 한 호텔에서 자살을 시도한 후 호텔 벽에 남긴 혈서다. 김씨는 청와대와 검찰, 야당, 자신의 아들 앞으로 A4용지 4장 분량의 유서도 남겼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국정원을 개혁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씨는 현재 중국 국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자살 시도로 이번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국정원이 김씨를 내세워 조작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고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려 한 것 아니냐는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검찰 진상조사팀(팀장 노정환 부장검사)은 검찰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각각 제출한 출입경기록 감정을 통해 관인이 서로 다른 사실을 확인했다. 민변은 이번 간첩 사건의 피고인인 전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34)의 변호를 맡고 있다. 진상조사팀은 검찰 제출본이 사실상 위조된 사실을 밝혀낸 셈이다. 그러나 국정원은 이를 ‘믿을 만한 신분’의 협력자에게서 입수한 만큼 위조됐을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협력자가 ‘독단적으로’ 가짜 출입경기록을 전달했고, 이런 사실을 덮기 위해 이후 제출한 문서들도 꾸몄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협력자의 ‘개인적 일탈’이라는 것이다.

국정원 협력자 김 아무개씨가 3월5일 서울 영등포의 한 호텔에서 자살을 시도한 후 호텔 벽에 ‘국정원’이라는 혈서를 남겼다. ⓒ 연합뉴스
김씨는 지난해 12월 중국 싼허(三合)변방검사참(출입국관리소) 명의의 답변서를 구해 온 인물이다. 싼허검사참은 유씨의 변호인에게 “유씨의 북-중 출입경기록이 ‘출-입-입-입’으로 기록된 것은 전산 오류 때문”이라는 정황 설명서를 발급해줬는데, 국정원은 김씨를 통해 “정황 설명서는 정식으로 발급된 문서가 아니다”는 답변서를 구해 검찰에 넘겼다.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출-입-출-입’ 기록이 맞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였다.

“문서 위조, 국정원도 알고 있었다” 증언

그런데 김씨가 검찰 조사에서 국정원과 상반된 진술을 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국정원 직원이 돈을 주고 시켜서 유씨 변호인이 제출한 (싼허(三合)변방검사참의) 정황 설명서를 갖고 중국에 들어가 ‘정황 설명에 대한 답변서’를 제3의 인물을 통해 위조해 (국정원 직원에게) 전달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이 위조 관련 내용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증언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김씨의 이와 같은 주장은 유서에서도 나타난다. 한 언론이 보도한 유서 내용에 따르면, 김씨는 자식들에게 “대한민국 국정원에서 받아야 할 금액이 있다. 가짜 서류 제작비 1000만원. (이 돈은) 깨끗하게 번 돈이 아니야”라고 밝혔다.

국정원 등 국가 정보기관이 국정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협력자를 통해 외국 공문서를 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들 협력자는 일명 ‘블랙 요원’으로 통하는데, 신분이 노출된 ‘화이트 요원’이 나설 수 없는 민감한 사안에 투입된다. 만약 문제가 발생할 경우 공식 신분인 화이트 요원이 다치는 일이 없고, 국가 정보기관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이런 점을 이번 사건에서도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설령 김씨가 국정원의 요구에 의해 답변서를 구한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국정원 측이 ‘문서 위조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주장할 경우 김씨의 증언 외에 이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검찰 진상조사팀은 김씨 외에 제3의 협력자들을 주목하고 있다. 앞서 검찰은 “(문서 확보에 개입한) 국정원 협력자가 수명이다”고 밝힌 바 있다. 김씨가 관여한 답변서 외에 중국 허룽(和龍) 시 공안국 명의의 유씨 중국-북한 출입경기록 확보에는 또 다른 국정원 협력자가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제3의 협력자에게서 김씨의 증언과 같은 진술을 확보할 수 있다면, 국정원 개입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월7일 검찰이 이번 사건에 대해 ‘조사에서 본격적인 수사로 전환한다’고 발표하면서 국정원에 대한 검찰의 강제 수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법 17조와 23조에 따르면 소속 직원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장의 사전 동의가 있어야 한다. 검찰 조사에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국정원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 수사 당시에도 메인 서버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지지 못했던 이유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관계자들이 2월26일 간첩 조작 사건과 관련한 수사기관의 증거 날조ㆍ은닉에 대한 고발장을 들고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용공 조작 사건의 핵심 ‘영사증명서’

정작 주목할 인물은 ‘영사증명서’를 작성한 국정원 소속의 이인철 선양 영사다.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세 가지 문건 중에서 유씨의 중-북 출입경기록, 싼허변방검사참의 정황 설명서에는 선양 영사관의 영사증명서가 첨부돼 있다. 그러나 이는 선양 총영사의 사전 결재 없이 국정원 대공수사국에서 파견된 이 영사가 독단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만약 이 영사가 조작된 사실을 알고도 영사증명서를 발급했다면, 이는 국정원이 중국 문서에 이어 우리나라 외교 문서까지 조작한 셈이 된다. 

영사증명서는 국정원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나 마찬가지다. 1986년 김양기씨 간첩 조작 사건은 영사증명서가 어떻게 용공 조작 사건에 활용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김씨는 1976~84년까지 재일 공작원 김철주씨에게 국내 학원·민심 동향 등 국가기밀을 수집해 전달한 혐의 등으로 1986년 5월 기소됐다. 당시 안기부(국정원의 전신)는 김씨의 자백 외에는 결정적 증거가 전무한 상태였다. 이때 꺼내든 카드가 영사증명서다.

당시 안기부 소속인 홍 아무개 주일 대사관 영사가 작성한 영사증명서에는 김씨 등의 주소·경력·직업·가족 등 인적사항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허점투성이였다. 기소를 한 달 앞두고 부리나케 작성된 4월22일 영사증명서에는 지도원 김씨의 경력 사항이 1952년부터 조총련 산타마본부 선전부장을 역임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이는 1944년생인 김씨가 8세 때 선전부장을 역임했다는 것으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안기부는 재빨리 영사 증명 내용 정정 확인서를 요청했고, 그 결과 이는 1965~68년으로 정정됐다.

이 사건의 문제는 첫 번째 영사증명서뿐만 아니라 이후 정정 확인서까지 모두 날조됐다는 점이다. 정정 확인서는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부영사 박 아무개씨 명의로 발급됐다. 그러나 최근 국방부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박 전 부영사에게 확인한 결과 “당시 주일 대사관에서 영사증명서나 영사 증명 내용 확인 정정 같은 것을 발급한 적은 없다. 재일 조총련 구성원의 신원 사항에 대해 일본 공안청에 재확인해 영사가 문서를 직접 만들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답변했다. 김양기씨는 1987년 12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형이 확정됐지만, 이후 재심을 거쳐 2009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영사증명서가 법적 증거로 활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에서는 김양기 사건을 다루며 영사증명서가 영사 업무 범위 내의 행위인지, 영사 증명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별도의 판단이 필요해 외교통상부에 정식 공문을 통해 질의했다. 그 결과 “영사증명서를 정의하는 법령 규정이 없으므로 문의한 영사증명서의 발행이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 업무의 범위 내 행위인지 여부에 대해 명확하게 답변하기 어렵다”는 회신을 받았다. 박 전 부영사는 “영사증명서는 영사 확인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국정원(또는 안기부) 출신들이 작성한 영사증명서는 마치 정식 루트를 거친 것처럼 포장된다. <어두운 시대의 소송기술>의 저자 이재승 건국대 교수는 논문에서 “영사증명서는 주문자가 원하는 내용으로 제작된 맞춤 문서이며, 영사증명서의 묘수는 ‘증명해야 할 것’을 ‘증명된 것’으로 둔갑시키는 데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국외 영사관에 파견된 국정원 직원들은 외교부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대사관 영사 자격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국정원 소속이라도 총영사 등 재외 공관장의 지시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국정원 직원들은 본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이들의 활동은 대부분 비밀에 부쳐진다. 입수한 정보는 독자적 루트를 통해 본원으로 보고된다. 심지어 정보보고를 통해 재외 공관장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기도 한다. 상하 관계가 뒤바뀌는 셈이다. 한 전직 총영사는 “국정원에서 파견된 직원은 독자적으로 움직인다고 보면 된다. (총영사였지만) 이들이 어떤 정보를 어떤 식으로 유통하는지 전혀 몰랐고, (이 때문에) 이들이 껄끄럽기도 했다. 나에 대한 정보를 어떤 식으로 보고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정원 파견 직원에게 밉보이면 (총영사) 자리를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2011년 터진 ‘상하이 스캔들’ 당시 김정기 전 상하이 총영사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국정원 출신 부총영사가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진한 지청장도 책임져야 할 것”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지난 2월26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증거가 조작됐다는 의혹과 관련해 이번 사건을 수사하고 재판에 참여한 검사 2명과 선양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국정원 직원인 이인철 영사에 대한 고발장을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했다. 이 사건을 지휘·가담한 ‘성명 불상자’에 대해서도 국가보안법상 무고·날조 혐의로 함께 고발했다.

이인철 영사는 간첩 사건을 수사하는 국정원 대공수사팀에서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사는 유우성씨의 1심 무죄 판결이 난 지난해 8월 갑자기 선양에 파견됐다. 야권은 “대테러·보안 업무 등을 담당하는 대공수사국 직원이 해외 공관에 나가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유씨의 간첩 혐의 입증에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는 데 적임자였던 이 영사가 증거 조작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영사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대공수사팀에 몸담고 있으면서 검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공 사건의 경우 국정원과 검찰 공안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 관계다. 긴밀한 업무 협력을 위해 사적·공적으로 정보 교류가 활발하다. 검찰이 국정원에 파견하는 검사도 대개 공안통이다. 유씨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당시 서울중앙지검의 공안 사건 지휘자는 이진한 전 2차장검사(현 대구지검 서부지청장)였다. 검찰이 사건 수사를 확대할 경우 이 지청장에 대한 수사도 불가피해 보인다. 이 지청장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외압 의혹과 관련해서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현재는 ‘여기자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상태다. 검찰 관계자는 “공안 부서의 특성상 이 지청장과 이 영사는 서로 알고 지냈을 것이다. 만약 이 영사가 계획적으로 증거 조작을 했다면, 불똥은 당시 (공안 사건) 책임자였던 이 지청장에게 튈 수밖에 없다. 검찰 진상조사팀이 어디까지 수사를 확대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고 밝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