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수석이 김기춘 실장 사퇴 극구 말렸다더라”
  • 양정대│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4.03.26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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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폭 넓히는 ‘기춘대원군’, 최근 정치권·사정기관 인사들 잇따라 만나

3월10일 정오. 청와대 인근 한 식당에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새누리당 초선 의원 10여 명 사이에 뼈 있는 농담이 오갔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김 실장이었다. 그는 “나에 대한 소문이 많던데 알아보니 ‘여의도발(發)’이랍디다”라며 웃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나오는 사퇴설이나 건강 이상설의 진원지로 여의도 정치권을 지목한 것이다. 그러자 한 의원이 “여의도에서는 오히려 ‘청와대발’이라고들 하던데…”라고 되받아쳐 좌중에 웃음이 퍼졌다. 청와대 내부에서 김 실장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은근히 빗댄 것이다.  

“야당 의원들과도 만나시라”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최근 여당 의원들과 잇따라 식사 회동을 갖고 있다. 3월 한 달간 기자가 공식 확인한 것만 벌써 다섯 차례다. 3월7일 국회 기획재정위·보건복지위 소속 초선 의원들과의 오찬을 시작으로, 11일에는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환경노동위 초선 의원들과, 12일에는 안전행정위·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소속 의원들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14일에는 외교통일위 소속 의원을 중심으로 일부 다른 상임위 의원들과 점심 식사를 했고, 17일에는 국방위·국토교통위 소속 의원들과 만났다.

ⓒ 시사저널 이종현
대체로 청와대 근처에서 1시간~1시간30분가량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 방식이었고, 상임위별로 묶인 초선 의원들이 대상이었다. 외부로 드러난 것만 놓고 봐도 새누리당 초선 의원 80명 중 절반이 넘는 40여 명과 식사를 함께 한 것인데, 전반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국토위 소속 한 초선 의원의 말이다.

“특별한 주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규제개혁 얘기가 나왔고, 최근 논란이 된 부동산 세제나 그린벨트 해제 등에 대해 의원들이 쓴소리를 좀 했다. 김 실장은 주로 듣는 입장이었고 메모지에 꼼꼼히 적기도 하더라. ‘야당 의원들과도 좀 만나시라’는 얘기에 김 실장이 아주 정중하게 ‘꼭 그러겠다’고 말하던 게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김 실장은 새누리당 초선 의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굉장히 부드러웠다”(안행위 소속 한 의원)고 한다. “(앞으로) 소통에 힘쓰겠다”는 다짐을 수차례 했고,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국회에 계류 중인 각종 경제·민생 법안을 서둘러 처리해달라는 요청도 빠뜨리지 않았다. 김 실장을 가까이서 처음 봤다는 한 비례대표 여성 초선 의원은 “솔직히 그동안 언론 보도나 주변에서 들은 얘기로는 깐깐하고 권위주의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번에 만나보니 사심 없이 일하는 분 같더라”고 첫인상을 전하기도 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김 실장과 새누리당 초선 의원들의 오찬 회동에 대한 보도가 나가자 이례적으로 이를 확인해줬다. 그는 “‘비서실장이 의원들과 밥도 못 먹느냐. 여의도에 가기 어려우니까 청와대 인근에서 만난 것이고, 소통하고 친교하며 건의 사항도 들은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식사를 하겠다’는 게 비서실장의 말씀”이라고 대신 전하기도 했다.

사실 청와대 비서실장이 여당 의원들과 식사를 하는 것은 과거 정부에서도 종종 있었다는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런데 김 실장의 최근 ‘식사 정치’를 두고는 좀 다른 해석이 나온다. 김 실장이 지난해 8월 청와대에 입성한 후 보였던 모습과는 다른 행보라는 점에서다. 이는 자연스럽게 김 실장이 최근까지도 끊이지 않는 사퇴설을 잠재우려 노력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동시에 청와대 주변의 권력투쟁설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황식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가 3월17일 선거사무실에서 정몽준 후보를 기다리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김 실장, 만남 알려지길 바라는 눈치”

김 실장이 취임한 뒤 최근의 초선 의원 연쇄 오찬이 있기 전까지 새누리당 의원들과 식사를 한 사실이 언론에 확인된 건 세 차례뿐이다. 지난해 9월 새누리당 의원들 중 자신과 같은 검사 출신이거나 해군·해병대 출신 의원들을 비서실장 공관으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한 게 처음이었다. 그는 1960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이듬해부터 해군·해병대 법무관으로 복무했다. 10월 초에는 최경환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와 공관에서 만찬 회동을 가졌고, 열흘쯤 뒤엔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 함께 청와대 인근 음식점에서 황우여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지도부를 만났다.

첫 번째 모임이 사적인 자리라는 성격이 컸던 데 비해 이후 두 차례 모임은 사실상 정기국회 입법 과제와 당시의 정국 현안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자연히 정치적 의미가 더해질 수밖에 없는 회동이었고, 민주당 등 야권은 김 실장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당시 우원식 민주당 최고위원은 “정기국회 입법 때문이라면 응당 청와대 비서실장이 여당 원내대표단을 찾아오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니냐”고 지도부를 청와대 쪽으로 부른 것을 비난하며 “과연 ‘왕실장’다운 모습”이라고 꼬집었다. 그의 발언은 김 실장이 취임한 이후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이 군 사이버사령부 등으로 확대되는 와중에 이른바 ‘이석기 파동’이 일어나면서 공작정치 논란이 거세지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청와대가 나서서 공안 정국을 주도하는 사이 새누리당은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던 셈이다.

이후 김기춘 실장이 새누리당 의원들과 접촉했다는 얘기는 도통 들을 수 없었다. 지난해 말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의원 및 원외 인사들과 수차례 식사를 함께 할 때도 김 실장의 존재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3월11일 김 실장과의 식사 자리에 참석했던 환노위 소속 한 의원의 말이다.

“김 실장이 우리와 만나는 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눈치더라. 자신의 사퇴설을 우리에게 먼저 꺼낸 것도 그렇고. 10여 명이나 되는 의원을 한꺼번에 만난다는 건 보안과는 거리가 먼 일 아니냐. 자신이 건재하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나도 식사 다음 날 청와대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김 실장이) 건강에 별문제가 없고 조직 장악력도 여전하다더라.”

정치권에서는 김 실장이 최근 여의도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을 두고 집권 2년 차 핵심 과제인 규제 완화에 드라이브를 걸고 기초연금법 등 민생법안 처리에 속도를 내려는 박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김 실장은 “민생법안 통과를 위해 적극 나서달라”는 주문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청와대의 한 핵심 인사도 “박 대통령과의 교감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권력 내부의 힘 겨루기와 연관 짓는 시각도 상당하다. 지난해 말부터 김 실장의 사퇴설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자신의 외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때를 전후해 사퇴설이 처음 흘러나온 뒤 김 실장 자신의 와병설, 부인의 암투병설 등이 잇따라 나왔고, 최근에는 여의도 정치권에서 실명으로 후임자 하마평까지 나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 실장은 외부로 알려질 게 확실한 여당 의원들과 식사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2013년 8월8일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이정현 홍보수석과 악수하고 있다. ⓒ EPA연합
1월 검찰 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확인

이와 관련해서는 매번 ‘청와대 문고리 3인방’과의 알력설이 나온다.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 십수 년간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이들 가신 그룹과 김 실장을 포함한 ‘7인회’ 원로 그룹 간 권력투쟁설이다. “김 실장을 거치지 않은 보고가 박 대통령에게 올라가자 김 실장이 이에 발끈해 사의를 표명했다더라”는 얘기가 그럴싸하게 포장돼 떠도는 것이다. 한 청와대 비서관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일은 없지 않느냐”고 했다. 이 비서관은 그러면서 “올해 초 이정현 홍보수석이 김 실장의 사퇴를 극구 말렸다는 소문도 있었다”고 전했다. 김 실장이 박 대통령의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사퇴설을 일축하고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여의도와의 스킨십을 늘리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김 실장은 또다시 정치적 논란을 피해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바로 6월 지방선거 개입 논란이다. 서울시장 후보로 뒤늦게 스타트를 끊은 김황식 전 총리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 실장과 이런저런 상의를 했다”고 밝힌 게 발단이다. 그렇잖아도 청와대와 친박계가 김 전 총리를 지원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해온 정몽준 의원이 공개적으로 ‘박심(朴心)’ 논란을 부추겼고, 김 실장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6·4 지방선거와 관련해 정쟁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당연히 야당의 십자포화도 쏟아지고 있다.

김기춘 실장이 지난 1월 검찰 행사에 참석한 사실도 확인됐다. 대검찰청에서 열린 ‘검찰 동우회 신년교례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이 검찰총장 출신이기는 하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자칫 파장이 확산될 수도 있다. 의례적인 행사 자리였다지만 야권에서는 그가 전국 단위 선거를 앞두고 굳이 현직 검사들과 만난 이유가 뭐냐는 볼멘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최근 여의도에서는 김 실장이 다른 사정기관 간부들과 접촉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단순히 여당 의원들과의 스킨십 행보만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 실장 자신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현재 여권 내 권력 지도의 한 축이 김 실장임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국정원을 둘러싼 논란에 이어 최근 간첩 증거 조작 사건 파문 등으로 남재준 국정원장과 김 실장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경우가 많은 때 사실상 해프닝에 가까운 김 전 총리의 말실수가 정국의 뇌관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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