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세자’ 그는 지금 어디에?
  • 이영종│중앙일보 기자 ()
  • 승인 2014.03.2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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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처형 이후 다시 고개 드는 ‘김정남 망명설’

북한 김정은 권력이 요동칠 때마다 어김없이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그의 이복형 김정남이다. 두 사람은 항상 갈등 관계에 있거나 권력 지형의 대척점에 서 있다. 김정은이 권력에서 축출되거나 유고 사태를 맞을 경우 대안으로서 김정남이 유력시된다는 식이다. 아버지 김정일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정은과 김정남, 두 이복형제들이 라이벌 관계였다는 숙명 때문이다.

권력에서 밀려난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김정남이 최근 대북 관측통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 2월 일부 언론이 베이징의 한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남과 그 가족이 지난해 말부터 중국 인민해방군의 한 군구 기지 내 최고위급 간부 숙소에서 중국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정남이 중국 당·정 지도부에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요청을 해 이 같은 조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복동생인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위협이다. 김정남이 가장 믿을 만한 후견인이던 고모부 장성택의 처형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자신도 같은 운명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함께 전해졌다.

2007년 2월11일 베이징 공항에서 취재진들의 카메라에 포착된 김정남. ⓒ 연합뉴스
미 CIA·일 내각조사실도 김정남 동향 체크

중국은 김정남을 유달리 잘 챙겼다. 김정은의 암살 위협에 대해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유사시 북한에 김정남을 필두로 한 친중(親中) 정권을 세우려는 포석이란 말까지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3월 중순에는 또 전혀 다른 내용의 소문이 돌았다. 김정남이 김정은과 결탁해 장성택 처형에 개입돼 있다는 설이다. 엘리트 탈북자가 주축이 된 NK지식인연대는 홈페이지를 통해 “북한 무역 일꾼들 사이에서 ‘김정남이 장성택을 배신했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남이 고모부 장성택의 해외 자금과 비밀 자료를 관리했는데, 이를 자신의 신변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북측에 넘겼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들은 과연 사실일까. 대북 정보 관련 당국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북한 내부 동향을 체크해온 정보 당국자는 “아직 우리에겐 그런 정보가 없다”고 귀띔했다. 정보 당국자가 ‘그런 정보가 없다’고 말한 점은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게 관례다. 탈북자들의 전언 등을 통해 이런저런 루머 수준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는 의미다. 적어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정보라면 정보 당국자의 답은 달라진다. 주로 “그건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로 당국도 그런 수준의 첩보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인을 주는 것이다.

김정남의 동향은 국정원 등 우리 정보기관뿐 아니라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일본 내각조사실 등에서도 최대 관심거리 중 하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평양 내 동선 파악 못지않게 북한 권력에 미칠 파장이 크다는 측면에서다. 대북 정보 관계자에 따르면 김정남과 이복동생인 김정철·정은 형제 및 이복여동생 여정의 경우 한·미 정보 당국이 어렸을 때부터 주시해온 대상이라고 한다. 스위스 유학 시절 이들이 언제 평양과 베른을 오가고 학교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는지 면밀히 체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CIA 등과의 공조는 물론 스위스 공안 당국과의 협력도 포함된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북한이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이들의 생년월일 등 신상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도 이를 통해서다. 정부 당국자는 “출입국 때의 여권 정보 등을 주재국으로부터 정보 협력 차원에서 제공받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김정남이 어디에 체류하는지, 또 누구를 만나는지 등을 현지 정보요원이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는 않고 있다. 지난 1월 김정남이 싱가포르 체류 생활을 접고 말레이시아에 입국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가 나왔을 때도 국정원 측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는 차이가 있다”는 정도로만 입을 열었다.

2013년 8월28일 프랑스 파리정치대학에 등교하는 김정남의 아들 한솔군. ⓒ 연합뉴스
“망명, 사실이라 해도 확인해줄 수 없어”

김정남이 장성택 처형 이후 잔뜩 얼어붙어 있을 것이란 관측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크다”고 정부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은 말한다. 무엇보다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던 고모부 장성택이 처형된 데다, 고모인 김경희마저 공개 활동을 접고 사실상 은둔에 들어갔다. 과거 김정남은 장성택에게 ‘고모부님’이라며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장성택·김경희 부부 역시 장조카인 김정남의 뒤를 보살펴주며 애틋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숙청 직후 장성택이 유사시 김정남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려 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 것도 이런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 때문이란 해석이다. 김정남과 심각한 갈등을 빚은 김정은으로서는 김정남과 장성택의 관계를 의심했을 법도 하다.

이제 김정남을 뒷받침해줄 북한 권력 내부의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김정은이 거리낄 것 없이 김정남 제거를 추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정남의 장기간 공개 활동 자제는 이런저런 의혹을 낳고 있다. 든든한 배경이던 아버지 김정일이 2011년 12월 사망하자 김정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주지인 마카오에서 행적을 감췄다. 싱가포르 체류설이 제기됐지만 구체적 움직임은 드러나지 않았다. 김정남은 2012년 말 국내외 언론에 행적이 노출된 이후 현재까지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 김정남이 서방으로 망명했거나 적어도 미국 CIA 등 정보기관의 통제하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이처럼 오랜 기간 노출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물론 국정원은 망명 가능성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김정남 망명이 사실이라 해도 그 전말을 파악할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란 설명이다. 대북 관련 부처에서 일하는 한 당국자는 “사실이라 해도 우리 외교 당국이나 정보기관이 이를 확인해줄 수는 없는 극히 민감한 사안이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아들 한솔이 프랑스의 대학에 그대로 다니고 있다는 점을 들어 망명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아버지가 망명했다면 한솔도 함께 잠적했어야 한다는 논리에서다. 하지만 북한 김정은에게는 김정남과 한솔은 의미가 다르다는 점에서 한솔까지 학업을 중단하고 망명길에 오를 이유는 없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김정은이 굳이 서방 국가에 체류 중인 조카까지 제거하는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란 점에서다.

김정남의 망명이 현실화한다면 김정은은 상당한 부담을 떠안게 된다. 김일성의 장손인 김정남이 해외에서 반(反)김정은 목소리를 높인다면 평양의 파워엘리트들뿐 아니라 주민들에게 미칠 영향이 작지 않을 것이다. 막내 동생이 겨눈 칼끝을 피해 해외를 떠돌아야 하는 비운의 왕세자 김정남의 잠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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