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노역’, 향판만 탓할 일인가
  •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 승인 2014.04.02 09:3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판·검사의 재량 큰 것이 원인…벌금액 하루 상한 등 공표해야

‘황제 테니스’ ‘황제 골프’ ‘황제 노역’ 등등. 황제 딱지가 붙으면 비난과 분노의 강도는 급상승한다. 불평등과 차별을 조금도 참지 못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은 비난 폭탄을 전 방위에서 날린다. 이렇게라도 감정 해소의 과정을 거쳐야 바로잡히기도 하니 순기능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불평등이자 불공정이다. 관심 밖에 있는 것들은 잊혀 사라진다.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문제가 많아도 시정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전문가나 시민단체가 경고음을 낼 때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언론과 국민의 법 감정이 작동하면 고쳐지기도 한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자 대구에서도 일당 2000만원의 노역장 유치가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사건은 아주 불공정하지만 그저 묻힐 수도 있었는데 재수가 없거나 힘 있는 현직 재벌 총수가 아닌 전직 회장이어서 때늦은 야단법석을 벌이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형 집행을 정지하고 은닉 재산을 전 방위로 찾아나서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검찰·사법부·국세청 등 국가 기관의 꼴이 말이 아니다. 온갖 자극적인 단어로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3월26일 광주진보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광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당 5억원’ 노역을 선고한 사법부를 비판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룹 회장이라면 그까짓 벌금 내고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모기업이 부도 처리된 그룹의 전직 회장이라지만 자존심이 있지 교도소에서 연탄재나 치우고 쓰레기 줍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자신의 일당을 너무 높게 쳐주니 명예나 자존심은 제쳐두고 그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회장의 일당을 터무니없이 높게 쳐준 지역 판사 덕에 그 회장의 하루하루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모르지만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의 벌금을 내지 못해 하루 일당 5만원으로 몇 달간 교도소에서 소중한 자유를 속박당하고 있는 몇 만 명의 벌금 미납자에게는 하루하루를 절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우리처럼 평등의식이 강한 국민들에게 사법부가 꾀해야 할 최우선 이념이 재판의 형평성인데 비난받을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노역장 유치 기간이 재판부의 재량에 따라 선고되다 보니 재벌 총수들에게는 수천억 원의 벌금형을 내리고도 노역장 유치 기간은 몇 달만 선고된다. 하루 노역금이 보통 5만원이지만 누구에게는 5억원으로 쳐주니 ‘고무줄 잣대’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노역장에서조차 ‘유전무죄’의 차별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노역장에서는 대부분 장애인이나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과 같은 경제적 약자이자 사회적 소외계층이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받아야 하는 처지임에도 벌금 낼 돈이 없다는 이유로 돈과 자유를 맞바꾸고 있다. 막말로 가진 것이 몸밖에 없어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그런 범죄자에게 적합한 처벌이 벌금형인데 경제적 불평등이 형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일당 3억원 판결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향검(鄕檢)’과 ‘향판(鄕判)’의 문제로 축소하거나 덮어서는 안 된다. 지방에서 사는 것도 서러운데 토호 세력과 유착하는 향검과 향판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불공평하다. 비겁하기까지 하다. 서울에서도 억대의 교비를 횡령한 학교법인 이사장을 검사가 약식기소한 일이 있고, 서울 판사들이 재벌 총수들의 환형유치 일당을 1억원, 3억원으로 산정한 경우도 있었다. 삼성 이건희, SK 손길승, ‘선박왕’ 권혁 등등.

거대 재벌의 총수여서 그랬는지 이렇게 난리가 나지 않았었다. 이미 2008년 탈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회장이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으면서 노역 일당이 1억1000만원으로 산정되었을 때도 환형유치의 운영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언론과 사법부는 그저 흘려듣고 말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언론과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선입견 때문이다. 그래서 지방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이른바 향판과 향검, 전관예우, 법조 윤리, 재판 당시 양형 기준의 부재, 지나친 환형유치 재량의 폭 등 모든 게 어우러진 문제다.  

‘황제 노역’ 해프닝은 검사와 법관의 재량이 크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환형유치 제도는 피고인이 벌금을 내지 못할 때 노역장에 유치하는 제도인데 유치 기간과 하루 유치 금액은 전체 벌금액을 감안해 판사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

그러니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다. 지방의 판·검사가 지방 토호와 더 많이 유착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언론에서는 허 전 회장의 법조 인맥이 파헤쳐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노역금 일당이 5억원으로 산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서울에서도 억대가 넘는 판결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향검과 향판의 문제로 딱지를 붙이는 것은 법과 양심에 따라 묵묵히 수사하고 재판하는 지방의 검사와 판사들을 근거 없이 모욕하고 비하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이미 억대의 노역장 일당 판결이 있었기에 지방에서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들의 근무지가 지방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한이 매우 크다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통제받지 않는 재량의 폭이 크면 클수록 판·검사마다, 지역마다 불평등과 불공정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 재판 당시에는 횡령배임죄나 조세포탈죄에 대한 양형기준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검사는 벌금형과 그에 대한 선고유예를 구형했다. 1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원을 선고했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1일 2억5000만원으로 환산해 노역장에 유치하도록 했다. 2심에서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에 벌금은 254억원으로 감형했다. 노역 일당은 5억원으로 오히려 두 배로 높여줬다.

이같이 양형 기준과 법원의 유치 기간 산정에 관한 기준이 없다 보니 법관이 재량의 범위 내에서 마음껏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물론 그 재량권 행사에 피고인과의 관계, 피고인 변호인의 전관예우, 피고인과의 각종 인연이 작용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양형 기준이 제정돼 법관의 재량 폭을 통제한 이후 재벌 총수들이 예전과는 달리 집행유예를 받지 못하고 실형이 선고돼 줄줄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상황 변화를 보면 향검과 향판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양형 기준이 시행된 이후 재벌 총수들에게 특혜처럼 적용되던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솜방망이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양형 기준처럼 환형유치 기간과 노역금 산정 기준, 환형유치로 대체하는 벌금액의 하루 상한선 등을 정해 공표해야 한다. 그래야 재판부마다, 지역마다 생길 수 있는 편차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국민이 감시의 눈을 밝혀 편차를 집어낼 수 있다.

물론 기준을 정해 운영한다고 해서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것은 아니다. 그들이 주어진 권한 내에서 제대로 기준을 지키고 있는지 전 방위 감시와 통제가 필요하다.

지역 법관이든 서울 법관이든 잘못된 판결이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해 법원 내외부에서 상시적으로 모니터링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 공론화하고 엄정한 감찰과 징계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