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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이 ‘악마의 소굴’ 만들었다

군사 정부가 잉태하고 축소한 형제복지원 사건 전말

이규대 기자 ㅣ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04.02(Wed) 10: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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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사회의 건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2년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내세운 국정 4대 지표 중 하나다. 취임 2개월 후 국무총리에게 보낸 지휘서신에는 그가 꿈꾼 복지가 무엇이었는지 드러난다.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는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 부처 협조하에 일제 단속 보호 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 대통령은 ‘일제 단속 보호 조치’를 복지 정책으로 여겼다.

뿌리는 전임 군사정부에 있었다. 1975년 12월15일자 내무부 훈령 410호는 ‘공무원이 부랑인을 신고·단속·수용·보호하고 귀향, 사후 관리하는 데 성실하고 책임 있게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전국 각 시·도와 경찰에서 내부 업무 지침으로 전달·활용됐다. 노동을 통해 산업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시민에게 ‘부랑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시설에 수용하도록 하는 법적 근거였다. 공교롭게도 형제복지원이 국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것도 이때다.

   
1987년 당시 외부에 잠금장치가 달린 형제복지원 수용 시설과 당시 검찰 상부의 수사 중단 압력 정황을 보여주는 문건.
1980년대 접어들어 고도 성장이 이어지자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팽창한다. 전문가들은 사회복지 관련 법률이 마련되고 사회복지 시설이 대거 등장하게 된 시기가 이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사회복지의 패러다임은 군사 정부의 그늘 아래 있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1980년대에 법적 규제를 받게 되는 시설들은 대부분 수용과 통제라는 관점에서 설립되거나 운영됐다”고 지적했다. 국가가 복지 대상자를 단속해 민간 사회복지법인에 수용·통제하는 것을 복지 사업이라 여겼다는 뜻이다.

형제복지원은 ‘전두환 복지’ 대표 상품

사회복지의 책임을 민간에 외주화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조금만 지급했을 뿐 관리·감독 의무는 방기했다. 이런 군사정부 시절의 사회구조 속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잉태됐다.

1980년대 초·중반 형제복지원이 급속하게 성장한 것 역시 당대의 사회구조에 기인한 바 컸다. 보조금 지급액이 시설에 수용한 인원의 ‘머릿수’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수용 인원을 확보해 외형을 불리는 것이 사회복지법인의 막대한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것이 경찰과 공무원이 임의로 ‘부랑인’을 적발해 복지시설에 넘길 수 있는 구조와 맞물렸다. 경찰관의 경우 형제원 입소자 1인당 5점씩 근무평점이 상승하는 이득을 얻었다. 결국 시설에 수용될 필요가 없는 이들까지 ‘부랑인’으로 낙인찍어 시설에 감금시키는 대규모 인권침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형제복지원이 발간한 책자 <새마음>에 따르면, 1986년 당시 전체 수용 인원 3975명 중 3117명이 경찰, 258명이 구청 의뢰로 수용됐다. 2회 이상 재입소자는 1000여 명으로 무려 30%가 시설을 나간 후에도 재입소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당시 신민당 진상조사단은 보고서에서 ‘면담한 대부분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 입소됐으며, 이는 도시 미관을 위한다는 행정적 독단과 범죄 예방이라는 미명하에 감옥 대용으로 편의적으로 악용됐음이 조사 결과 드러났다’고 밝혔다.

공권력에 의한 강제 입소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는 여러 정황을 통해 드러난다. 한 예로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7년 2월11일, 울산 주민 김 아무개씨(당시 52세)는 자신의 딸(당시 12세)을 납치해 강제 수용시킨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소했다. 1985년 2월, 20대 괴한에게 납치된 딸이 파출소에서 “가족이 있다”고 호소했음에도 경찰은 “고아원에나 가라”며 형제복지원에 수용시켰다는 것이다. 딸은 2년여 동안 복지원에서 청소일 등을 하다 행방을 수소문한 아버지에 의해 겨우 구출될 수 있었다. 이처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랑인’으로 분류돼 시설에 감금됐다는 사건 피해자들의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사건이 불거진 1987년은 전두환 정권이 위기를 맞던 시기였다. 박종철씨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불이 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형제복지원 사건을 정부가 민감한 뇌관으로 여긴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해 1월22일 갓 부임한 정호용 당시 내무부장관은 부산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야당인 신민당 조사단을) 왜 형제복지원 내부까지 안내해 말썽을 만들었느냐”며 크게 꾸짖었다.

   
경북 울주군에서 촬영된 형제복지원 강제 노역 현장. ⓒ 김용원 변호사 제공
사실 형제복지원은 ‘전두환표’ 사회복지·정화 정책의 대표 상품에 가까웠다. 1986년 당시 전국의 부랑인 시설은 모두 36곳. 이들에게 지원된 연간 87억원의 국고보조금 중 형제복지원의 몫은 18억5000만원에 달했다. 형제복지원의 수용 규모가 전체 부랑인 시설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기 때문이다. 박인근 전 원장은 정부로부터 1981년 4월 국민포장, 1985년 5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이런 형제복지원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은 자칫 정권 차원의 위협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같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사건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불가능했다는 것이 당시 수사 담당자였던 김용원 전 검사의 증언이다. “초기부터 수사를 하지 말라는 압력이 윗선에서 상당했고,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건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관철됐다”는 것이다.

윗선에서 “수사 말라” 압력 거세

울산지청 소속의 김 전 검사는 경북 울주군의 강제 노역 시설을 우연히 발견하게 돼 수사에 착수했다. 곧 부산에 있는 형제복지원을 방문한 후 큰 충격을 받는다. 인권침해가 자행된 현장임을 곳곳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울산지청의 제한된 인력만으로는 전면 수사가 어려웠다. 상급 기관인 부산지검에 수사 인력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사건 수사를 위해 이미 투입한 경찰 병력마저 “뭘 수사한다고 하느냐. 당장 철수시키라”고 하는 등 물리적으로 수사를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용 실태 및 가혹 행위 여부, 사망자들의 사망 원인, 공무원과의 유착 여부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수사 및 기소가 불가능했다는 것이 김 전 검사의 설명이다. 1987년 1월21일에는 상부 명령에 의해 업무상 횡령 혐의 수사가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횡령 증거가 어디에 있나. 막연한 짐작만 갖고 하는 것 아닌가”라는 윗선의 압력이 거셌다.

그럼에도 김 전 검사는 횡령죄 입증에 주력했다. 10억원 이상 국고 횡령이 적발될 경우 무기징역 구형이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3개월간의 수표 추적 결과 1985~86년 2년간의 국고보조금 39억원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11억4254만원을 박 전 원장이 횡령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대검찰청에서 “횡령 액수를 7억원 이하로 하라. 이것은 직무상의 명령이다”는 엄명을 하달했다. 횡령 액수는 6억8178만원으로 축소됐다.

겨우 ‘특수감금 혐의’만 기소 내용에 포함된 인권침해 사실 역시 끝내 인정되지 않았다. 2심 판결까지 유죄로 인정되던 혐의는 대법원 선고에서 부정됐다. “적법한 사회복지 시설에서 수용한 조처이기 때문에 정당한 직무 수행”이라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하급심 재판부에서는 세 차례나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끝내 대법원 판결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건 수사가 진행 중이던 1987년 5월20일, 전두환 대통령이 소년체전 방문을 위해 부산을 찾았다.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부산시장에게 전두환 대통령은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사건은 제대로 수사되지 못했다. 특히 사건 피해자들의 인권이 유린당한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법 처리도 이뤄지지 않았다. 군사정부가 내세운 ‘복지 사회의 건설’이 낳은 결과였다.                


“5공 정권이 깊숙이 개입한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했던 김용원 전 검사

30여 년 전의 일임에도 기억은 구체적이었다. 차마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김용원 전 검사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군사 반란으로 집권한 정부 아래서만 가능했던 비극”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의 구제 및 배상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 시사저널 구윤성
당시 직접 목격한 형제복지원의 실태는 어땠나.

국가의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시설 운영이 법인 대표자의 양심에만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대규모 횡령과 인권침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횡령된 국가보조금은 주로 (수용자들의) 숙식비다. 그걸 빼돌리면 수용자들은 헐벗고 굶주릴 수밖에 없지 않나.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각종 질환을 앓는 등 건강 상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피해자들은 가혹한 폭력 행위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전두환식’ 복지 개념은 결국 부랑인이나 거지 등을 몽땅 잡아 한데 가두라는 것이다. 군대나 수용소 등 대규모 인원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은 잘 훈련된 인원들이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복지원에는 그런 체계가 전혀 없었다. 유일한 수단이 폭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용인 중 일부를 소대장·중대장으로 앉혀 시설을 관리하는데 통제 수단이 때리는 것 말고 무엇이 있었겠나. 무차별적인 폭력이 일상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윗선의 압력을 받았나.

사건 수사를 시작한 지 이틀 후 오전에 부산시장이 전화를 했다. “박 원장 구속하면 안 된다. 큰일 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이유를 듣지는 못했다. 다만 이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면 5공 정권에 타격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대검찰청·부산지검 등 검찰 상부에서 제대로 수사를 못하게 통제했다. 초반에 빠르게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기왕 구속된 이상엔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말라고 봉쇄하는 식이었다. 나와 검사실 계장 둘이서 3개월간 추적해 겨우 업무상 횡령 사실만 밝혀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윗선의 압력으로 축소됐다.

‘특수감금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말도 안 된다. 사건의 핵심이 인권침해인데, 이는 결국 특수감금이라는 죄목하에 포함된 것이다. 하급심은 모두 인정한 죄목을 대법원만 기각했다. 당시 대법원은 정치권력의 시녀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재판에서 전부 정권의 손을 들어줬던 시대다. ‘유죄라고 판단되나 하급심으로서는 대법원의 법률적 판단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2심 재판부의 최종 판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1993년 복지원 사건을 언급한 책을 출간하자, 박인근 전 원장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던 적이 있다.

검찰 수사 결과 무혐의가 나왔다. 과거 자신이 구속돼 실형을 산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는 듯하다. 국민훈장까지 받고서 검찰 수사 때문에 거대한 사회사업 시설이 공중분해된 것 아닌가. 자신의 전성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더라. 검찰 수사가 엉터리였다며 나를 비난한 글도 본 적이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재조명되는 현 상황에 대한 소견을 듣고 싶다.

이제 형사처벌은 불가능하다. 공소시효가 한참 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는 있다. 형제복지원의 인권침해로 사회 적응 능력을 손상당한 사람들이 많다. 5공 정권이 깊숙이 개입된 피해의 구조에 초점을 맞춰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 물론 세월이 지나 어려운 부분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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