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시험 응시료 400만원 썼는데 아직 백수네요”
  • 김지영 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4.04.09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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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 따느라 등골 휘는 20대…학원·교재비 합치면 700만원 넘어

영남대 한문교육과 4학년으로 오는 8월에 졸업하는 박상현씨(가명·25). 그가 취업을 위해 딴 자격증은 무려 13개다. 금융 분야 8개(파생상품투자상담사·증권투자상담사·펀드투자상담사·개인종합재무설계사(AFPK)·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국제재무위험관리사(FRM)·은행자산관리사(FP)·투자자산운용사(CIM))와 토익·토익스피킹(토스)·테셋·모스 마스터2007(MOS MASTER)·한자진흥회 2급 등이다. 응시료만 무려 428만8300원이 들었다. 

특히 국제 FRM은 접수비만 169만원이다. 총 두 과목인데 전 과목이 영어로 출제돼 평균 합격률도 40~50%에 불과하다. 박씨는 1차에 떨어져서 국제 FRM 접수비에 100만원을 더 지불해야 했다. 박씨는 두 번 도전 끝에 국제 FRM 전 과정 자격증을 획득했다. 여기에 든 돈만 238만원이다. 국립대 한 학기 등록금과 맞먹는다.

ⓒ 일러스트 김세중
토익과 ‘토스’를 포함한 컴퓨터 자격증까지 합하면 박씨가 입사지원서류 통과를 위해 지불한 시험 비용만 총 428만8300원이다. 학원비와 교재비까지 합치면 761만3100원이다. 박씨는 국제공인재무분석사(CFA)까지 딸 생각이다. CFA 1회 응시료는 120만원에 달한다.

시험 응시료, 대학 등록금과 맞먹어

숙명여대 행정학과를 지난 2월에 졸업한 서민영씨(가명·27). 부산에 있는 부모님에게 월세(40만원)를 포함해 한 달에 100만원을 받는데 지금까지 시험 응시료로 109만원이 들었다. 특히 서씨는 지난 2월 토익 980점을 받았는데 이 점수를 받기까지 서씨가 쓴 토익 접수비만 지난해 64만6800원이다. 영어 말하기 시험인 ‘오픽’ 접수비도 23만원이 넘는다. 현재 서씨의 오픽 점수는 최고 등급(AL) 바로 밑인 ‘IH’다. 서씨는 “요즘 서류 통과가 되려면 오픽 최고점인 AL을 받아야 한다”며 “최고점을 받을 때까지 다달이 오픽을 볼 생각이다”고 말했다.

취업 지망생들이 자격증을 따느라 허리가 휘고 있다.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가 대학생 46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대학생 57.3%가 사교육을 받고 있다. 한 해 사교육에 쏟아붓는 돈만 207만원이다. 대기업 취업 정보 사이트인 에듀스가 분석한 ‘지원 분야별 합격자 스펙 통계’를 보면, 증권회사 취업자 셋 중 한 명이 자격증 5개, 금융·보험업 취업자 48.8%가 평균 1~2개의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금융·보험업에서 3~4개의 자격증을 가진 취업자는 25.6%, 5개 이상도 11.6%에 달했다.

‘필기시험만 잘 치르면 채용이 보장된다’는 공공기관 채용 불문율도 깨지고 있다. 유기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해 207개 공공기관을 조사한 결과 신입사원 18.1%가 민간 자격증을 1개 이상 갖고 있었다. 2011년에는 민간 자격증을 보유한 신입사원이 14.5%였다.

특히 토익은 취업 지망생이 가장 돈을 많이 쓰는 시험이다. 2010년 이후 토익 응시자는 매년 200만명이 넘는다. 지난해에만 207만8397명이 토익 정기시험을 치렀다. 응시자 77%가 21~30세였다. 한국의 20~29세 청년 3명 중 1명은 토익을 보는 셈이다. 토익 스피킹(토스) 응시도 급증했다. 몇 해 전부터 기업체에서 지원 자격에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을 의무적으로 기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31만명이 ‘토스’에 응시했다. ‘토스’가 처음 생긴 2008년 응시자가 1만5000명인 것을 감안하면 폭발적인 증가세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인식을 강조하면서 한국사도 스펙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응시자 수는 17만8000명으로 5년 전과 비교해 3배 가까이 늘었다. 사법고시를 제외한 주요 5급 고시와 지역 인재 7급 공무원 시험을 보려면 한국사가 2급 이상 돼야 하기 때문이다.

스펙 인플레이션 현상에 편승한 응시료 장사도 쏠쏠하다. 금융투자협회 자격시험 응시료 수입은 지난해만 38억원이다. 국사편찬위원회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으로 지난해 36억4400만원의 응시료 수입을 거뒀다. 5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이 수입이 늘어난 것이다. 토익은 ‘백수 시대’의 최대 수혜자다. 한국토익위원회는 응시료로만 연간 840억원 넘게 벌어들이고 있다.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 “내가 ETS(미국 교육평가원)를 먹여 살린다”는 자조적인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일부 언론사도 자격증 시장에 가세

언론사도 ‘스펙 장사’에 일조하고 있다. KBS·한겨레·경향신문 등에 지원하려면 의무적으로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러야 한다. 지원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자격증을 딸 수밖에 없다. 김지현씨(30·가명)는 “오래전부터 한겨레신문사에 가고 싶었는데 한겨레 서류를 합격하려면 한국어가 2-급 이상 돼야 한다”며 “지금까지 8번 이상 한국어를 봤는데도 2급이 안 돼 한겨레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자체적으로 자격시험을 만든 언론사도 있다. KBS는 2004년 한국어능력시험을 만들어 지난해만 7억4879만1000원의 응시료 수입을 거뒀다. 2012년에는 응시료를 2만7000원으로 35% 올렸다. 한국경제신문은 경제학 시험인 ‘테셋(TESAT)’을, 매일경제신문은 ‘매경테스트’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외대 경제학과를 지난 2월에 졸업한 손 아무개씨(27)는 “테셋 고득점을 받으면 한국경제에 지원할 때 가산점을 준다고 해서 1급을 받기 위해 시험을 두 번 치렀다”며 “서류에서 테셋을 반영하는 기업체가 늘어나면서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친구들은 인터넷 강의도 들으며 3~4번 응시한다”고 말했다. 매경테스트도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재응시율이 20%에 이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매년 평균 815개의 민간 자격증이 신설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취업 후 ‘장롱 자격증’으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해 한 시중은행에 입사한 배 아무개씨(28)는 “수십만 원을 들여 금융 3종 세트와 자산관리사 자격증까지 땄지만 현재 창구에서 고객 응대를 하고 있다”며 “취업하기 위해 습득한 금융 지식과 영어, 컴퓨터 기술은 지금 거의 다 잊어버렸다”고 털어놓았다. 김덕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박사는 <민간자격제도 질 관리방안>에서 “2005년부터 국가공인 자격시험의 질이 제자리걸음”이라며 “자격검정시험의 신뢰성과 공정성이 낮고 취득자 관리도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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