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디지털 감옥’을 건설하고 있다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04.0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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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분석으로 주목받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

정치가는 대중을 향해 ‘투명 사회’를 만들어 부패 없는 나라,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자들 중에 뒤끝이 좋지 않아 불신을 남기고 정치에 대한 혐오까지 불러일으킨 예가 적지 않다. 투명하게 공개한다면서 ‘칼을 쥔 자’는 불투명한 짓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중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투명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아우성친다. 과연 대중이 원하는 투명 사회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오늘날 ‘투명성’이란 단어는 마치 유령처럼 모든 삶의 영역을 떠돌고 있다. 정치에서는 물론이고 경제에서도 투명성이 강조된다. 투명성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된다. 투명성이 신뢰를 낳는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믿음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하필이면 신뢰가 급격하게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단히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에 재직 중인 한병철 교수의 분석은 이렇게 평이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곧바로 투명 사회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충격적인 주장을 이어간다. 그는 신간 <투명 사회>를 통해 “투명 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 사회”라고 강조한다.

ⓒ 문학과지성사
‘투명 사회’ 만드는 시스템적 강제력

사람들은 대개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투명한 사회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한 교수는 이처럼 긍정적인 가치로 간주되어온 투명성 개념에 부정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 있는 현대인은, 알게 모르게 거대한 ‘디지털 통제 사회’의 건설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한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해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런 과정에서 투명성이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해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을 지니게 된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사회를 장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투명성에 폭력이 숨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하랴. 그는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 미디어 또한 점점 더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이용해먹는 디지털 파놉티콘(원형 감옥)에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투명성이 결국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거주민은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심지어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한 채 스스로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정보’로 바꿔버림으로써, 우리를 모든 것이 완전히 털리고 발가벗겨진 ‘유리 인간’의 상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 상태, 모두가 동일해지는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 점점 더 투명성을 강요한다. 투명성은 낯선 것과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투명 사회에서는 점차 타자가 소멸되고 나르시시즘의 경향이 강화된다.

“투명 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단지 공동의 관심을 좇거나 하나의 상표를 중심으로 모인 에고의 집합(브랜드 커뮤니티)처럼,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가 생겨날 뿐이다.”

정치가 잡담처럼 얄팍해진 까닭

투명 사회를 부패 근절과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결코 깨달을 수 없을 투명성의 시스템적 폭력성을 파헤친 한 교수의 지적은 정치가 가벼워지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불가피하게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 성격을 띠게 된다. 정치는 잡담처럼 얄팍해진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에 일정한 시간의 굴레를 씌우는데, 그 속에선 천천히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 지향적 비전은 점점 더 희소해진다. 천천히 무르익어야 하는 것에 대한 배려는 점점 더 줄어든다.”

한 교수는 투명성이 시스템의 외부를 보지 못하고,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최적화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정치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관리하는 역할로 축소되고 만다. 선거와 쇼핑이 비슷해지고, 통치 또한 마케팅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모든 것이 직접적으로 공개되는 이런 사회를 ‘포르노적 사회’라고 규정한다. 모든 의미가 사라지고 보이는 것에만 가치가 부여되는 전시 사회라는 말이다. 그래서 투명성의 전체주의적 본질에 대한 전복적인 성찰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투명성을 절실히 요구해왔다고 설명한다. 투명 사회를 긍정 사회로 바라보던 생각을 되돌아보라고 덧붙인다.

“투명 사회에서 의견은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의견은 이데올로기처럼 전체를 장악하고 전체를 꿰뚫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투명 사회에 대한 한 교수의 부정적인 분석에는 일상에 대한 성찰도 들어 있고 정치 현실에 대한 해설도 포함돼 있다. 진중한 의견을 내놓아도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을 듣는 상황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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