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뛰어들기만 했어도 다 살릴 수 있었는데…”
  • 진도=조해수·김지영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4.04.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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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직후 긴박했던 6시간의 사투…사고 현장 가장 먼저 달려간 어민들의 생생한 증언

4월16일 오전 8시40분께. 탑승객 475명을 태우고 인천을 떠나 제주를 향하던 6000톤급 대형 여객선 ‘세월호’는 서해 진도 앞바다인 병풍도 근처를 항해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막 끝난 그 시간, 날씨는 너무나 청명했고 바다도 고요했다. 그러나 8분 후인 8시48분 갑자기 배가 급격히 기울었고, ‘쾅’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대참사는 그렇게 너무나 허망하고 어이없게 시작됐다.

작은 항구도시 전남 진도군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아니 대한민국 전체가 큰 충격과 비탄에 빠져 있다. 4월16일 진도군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18일 현재까지 300명 가까운 실종자들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중에는 수학여행을 떠난 325명의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포함돼 있어, 그 슬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러나 정부와 언론이 보인 모습은 실종자 가족과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4월16일 오전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직후 어선들이 탑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다. ⓒ 해양경찰청 제공
사건 첫날부터 시작된 무차별 속보 취재 경쟁은 셀 수 없는 ‘오보’를 쏟아냈다. 우왕좌왕을 반복하는 정부의 무능력은 해외 언론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여기에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면서,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혼돈과 무질서의 극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180명 가까운 승객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인근 어민들의 발 빠른 대응과 위험을 무릅쓴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로 오보가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사고 당시 가장 먼저 침몰 현장으로 달려갔던 진도군 조도면 어민들은 사고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20분 만에 배 90도로 기우는 등 급속히 침몰

서거차도 이장을 맡고 있는 허학무씨는 오전 9시반쯤, 진도군청으로부터 “대형 여객선 한 척이 20도 정도 기울어 있다. 빨리 도와줘야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씨는 즉각 마을 주민들에게 이 소식을 전파했다. 주민들이 송정호·아리랑호·유진호·우진호 등 어선 4척을 몰고 침몰 현장으로 달려가기까지는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 가장 먼저 간 이는 바로 서거차도 어민들이었다. 허씨는 “맨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배가 20도 정도 기울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모두 다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거차도 어민들이 침몰 지역인 병풍도 북쪽 20㎞ 해상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40분쯤. 세월호의 상황은 예상과는 달리 심각했다. 허씨는 “도착해 보니 여객선이 이미 45도 각도 이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볼 것도 없이 바로 구조에 나섰다. 물에 뛰어내린 사람, 매달린 사람…. 아비규환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여객선 침몰 이틀째인 4월17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고경준 이장이 사건 당일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옆 섬인 동거차도에서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동거차도에서는 모두 6척의 배가 급히 동원됐는데, 당시 구조에 참가했던 장원길씨는 “9시50분쯤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것 같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배가 거의 (옆으로) 누워 있었다. 헬기 몇 대가 공중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고, 해경 선박은 선미에 붙어서 사람들을 싣고 있었다. (해경의) 큰 선박이 2~3척 보였고, 어선들은 수십 척, 아무튼 굉장히 많았다. 구명보트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세월호) 측면 창문으로 사람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인근 섬인 대마도·관매도에서도 속속 어민들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10시를 넘어서는 상황에서는 사고 현장에 모인 어선만도 80척 가까이 됐다. 사고 현장은 유속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빠른 곳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물살이 거셀 뿐만 아니라 6000톤급이 넘는 대형 선박이 침몰하면서 발생한 물살이 더해져, 자칫 어선들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초소형 어선들이 적극적으로 구조에 나서며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해경의 큰 선박들은 덩치 때문에 세월호 가까이에 배를 대는 것이 불가능했다. 큰 선박 대신 구조에 기여한 것은 2톤 미만의 초소형 어선들이었다. 초소형 선박을 몰고 온 대마도 어민 김현호씨는 “소식을 듣고 10씨쯤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것 같다. 배는 이미 (옆으로) 누워 있었다. 앞뒤 잴 것 없이 배를 (세월호에) 붙이고 사람들을 구했다. 선박이 낮다 보니 빠진 사람들이 알아서 배에 매달리기도 하고…. 20여 명 정도를 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구조 현장에 있었던 어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세월호는 오전 9시30분쯤부터 급속히 침몰하기 시작해 단 20여 분 만에 90도가량 뒤집혔다고 한다. 허씨는 “10시가 넘어서는 사실상 구조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단 20분 만에 옆으로 누워버리면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옆 창문으로 빠져나와 배 위에 서 있는 사람이나 이미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 말고는 (구조 인원에) 큰 변동이 없었다”고 말했다.

“내 뒤로 300명 남았는데, 전원 구조라니”

침몰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와중에도 단원고 학생들은 서로를 걱정하기에 바빴다. 초소형 선박으로 20여 명의 목숨을 구한 김대열씨는 “내 배로 실어나른 사람은 거의 다 학생이었다. 몇몇은 배로 올라오고 몇몇은 매달려 있고, 정신없는 상황이었는데 한 여학생이 ‘아저씨, 친구들이 (아직) 안에 있어요. 유리창 좀 깨주세요. 유리창 좀 깨주세요’라고 외치더라”고 말했다. 이후 어민들은 오후 2~3시까지 사고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추가 구조자들이 나오기를 기원했다. 어민 고경준씨는 “배가 뒤집히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빙빙 사고 현장 주변을 돌기만 했다. 오후 1~2시쯤 해군 특수부대 다이버 5명 정도가 투입되는 정도였다. 결국 오후 3시30분쯤 철수했다”고 말했다.

어민들의 도움으로 초기에 구조된 89명은 서거차도로 이송됐다. 서거차도 이장 허학무씨는 “89명 중 학생은 40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큰 부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들 타박상 정도였다”고 말했다. 동거차도 이장 조이배씨 역시 “우리 마을 보건소장이랑 같이 서거차도에 갔다. 거기 가니까 헬기로 80~90명의 구조자를 서거차도로 이송하고 있더라.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보다 많이 안 다쳤더라. 발도 물에 안 젖은 사람도 있고. 구조자들은 모포를 목에 감고 있는 상태였는데, 구명조끼를 못 입은 사람도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러나 육체적 상처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큰 법이다. 구조 현장에 간 남편 김광배씨를 대신해 구조자들을 보살펴주고 있던 김씨의 아내는 “(구조자들이) 모두 다 물에 젖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수건도 갖다 주고 그랬는데, 그중에서 얼굴에 상처를 입은 학생도 봤다. 학생 한 명의 휴대전화가 망가져서 내 것을 빌려줬더니, 부모님이랑 통화하고 울기 시작하니까, (주변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말했다.

진도 여객선 침몰 이틀째인 4월17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도로를 언론사 취재차량들이 차지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배가 갑자기 커브 틀면서 빙 돌았다”

언론들의 무분별한 오보는 구조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허씨는 “당시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이런 보도가 나왔던 것 같다. 그러자 40대 남성 구조자가 갑자기 화를 버럭 내며 ‘내가 선실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했다. 내 뒤로 (선실에) 300여 명이 남아 있었다. 왜 거짓말을 하느냐’라며 소리치더라”고 했다. 

구조자들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의미 있는 증언들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허씨는 “구조자 중 한 명이 ‘배가 갑자기 커브를 틀었다. (그래서) 배가 빙 돌면서, 사람들이랑 집기가 한쪽으로 급격히 쏠렸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여객선은 중심이 굉장히 높다. 갑옷으로 지은 집인 셈이다. 중심이 조금만 무너져도 좌초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씨는 “구조자들이 아침 식사가 끝난 8시40분쯤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 그 이후에 ‘쾅’ 소리를 들었는데, 이 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고, 못 들은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의 세월호 선박자동식별장치(AIS) 분석 발표에 따르면, 세월호는 오전 8시48분쯤 갑자기 우현 선회한 것으로 밝혀졌다. 허씨는 “일부에서 세월호가 1시간가량 (침몰 지점에) 서 있었다고 하던데, 그 말은 유언비어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우리 섬에서 사고 현장이 보였을 텐데, 1시간 전에 배를 봤다는 주민은 없었다”고 말했다.

어민들은 암초에 의한 침몰설에 대해서도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정순배 청년연합회 회장은 “내가 그 근처에서 양식장을 운영한다. 암초는 절대 없다. 정부에서 이 지역을 암반 지역이라고 발표한 것으로 아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주낙을 끌어올리면 뻘이 올라온다. 정부가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리고) 암초에 걸렸으면 승객들도 분명히 그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 승객 일부는 쾅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하지 않나”라고 잘라 말했다. 관매도의 한 어민 역시 “여객선이 작은 고깃배도 아니고 자동항법장치 같은 게 다 있다. 자동차로 치면 내비게이션 2개가 있는 셈이다. (이것만 보면) 앞에 뭐가 있는지도 다 보이는데 암초를 못 피했다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한두 번 운항하는 것도 아니고…”라고 지적했다.

세월호의 항로 이탈과 관련해서는 대부분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고경준씨는 “사고 지점이 병풍도 북쪽 20㎞ 해상이라고 하기에 병풍도 바깥 바다를 향해 진로를 잡았다. 여객선들 대부분은 병풍도 밖으로 지나다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제주도까지) 30분가량 단축할 수 있다. 그런데 배를 몰고 한참 가고 있는데 병풍도를 못 지나서 배(세월호)가 보이더라. 굉장히 의아했다”고 밝혔다. 허학무씨는 항로 이탈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여객선은 병풍도 서쪽에서 남쪽으로 지나간다. 그런데 사고 지점은 병풍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가는 항로에 있었다. 이 길은 여수에서 부산을 지나다니는 화물선 항로다”고 했다.

4월17일 오전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이 목포경찰서에 소환돼 조사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내 배에 탄 최초 구조자 무리에 선장 있었다”

직접 구조에 참가했던 어민들은 한결같이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 모두 바다로 뛰어내렸다면 100% 다 구조할 수 있었다”며 분노했다. 대마도 이장 김진수씨는 “사고가 난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보통 물안개 등으로 (물에 빠진 사람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침이고 배(어선)도 주변에 엄청나게 많았고. 구명조끼를 입었든 안  입었든, 수영을 할 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아무튼 물에만 뛰어들었으면 무조건 다 건질 수 있었다.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의 100% 잘못이다. 여객선에는 이럴 때 사용하라고 망치도 있다. 그걸로 유리창을 깨라고 방송만 했어도…. 아니면 (승객들을) 배 위쪽으로 인도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실에 가만히 있으라고 안내방송을 했다니…. (배가 90도로 누운) 10시가 넘어서는 가구 몇 개 떠내려온 것 빼곤 너무나 고요했다. 승무원들이 조금만 더 빨리 조치를 취했다면…”하며 안타까워했다.

선장에 대한 분노는 어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학무씨는 “최초에 구조된 사람들은 서거차도로 모두 이송됐다. 이 중에 선장이 포함돼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배가 사고가 났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모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당시에는 설마 선장인 줄 알지도 못했지만, 그 뒤에 TV를 통해 선장을 확인해보니 그때 그 사람이 맞았다. 선장 외에도 승무원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뱃사람이라면 가장 마지막까지 배와 승객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준석 선장은 서거차도에서 출발해 오전 11시15분쯤 진도 팽목항에 도착한 페리호에서 내리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진도 조도면 어민들은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지자마자 생업을 뒤로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고 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동안 정부 시스템은 정지되어 있었다. 결국 4월18일 현재까지 300명 가까운 승객들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도면 어민들은 “기다려보자고. 기적이라는 게 있으니께. 어찌 됐든 위령비라도 세워야겄지”라며 그저 한숨만 땅이 꺼져라 내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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