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움직이는 왕비의 '보이지 않는 손'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4.05.2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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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시리킷 왕비의 측근인 프라윳 육참총장이 쿠데타로 전권 장악

1932년 태국에서 절대군주제가 무너진 이후 태국 군부는 18번에 걸쳐 쿠데타를 시도했고, 이 중 11번을 성공했다. 5월20일 태국 군부는 또 한 번 계엄령을 발동했다. 외신은 일제히 태국 군부가 19번째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 진위는 계엄사령관을 맡은 프라윳 찬오차 태국 육군참모총장(60)의 다음 행보에 달려 있었다. 그는 “계엄령을 발동했을 뿐 쿠데타는 아니다”고 누차 강조했다.

사실 계엄령 발동 시점부터 누가 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인지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군이 움직였지만 태국 정부는 계엄령을 미리 통보받지 못했다. 계엄령을 발동한 참모총장은 실질적으로 지도자 자리에 올라섰고 광범위한 권력을 갖게 됐다. 중재자를 자처하듯 프라윳은 5월22일 여당과 야당, ‘탁신파’와 ‘반(反)탁신파’ 시위대의 대표 등을 소집했다. 20일과 21일에 이은 세 번째 모임이었다. 야당과 반탁신파 대표들은 현 정부의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여당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거부했다. 3일간의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자 프라윳은 “정부가 양보하고 각료들이 총사퇴하라. 그러지 않으면 전권을 장악하겠다”며 대화 중단을 선언했고 쿠데타를 단행했다.

쿠테타가 일어난 5월22일 방콕 외곽에서 벌어진 친탁신파 시위를 군인들이 진압하고 있다 © EPA연합

반탁신파 의도대로 흘러가는 쿠데타

프라윳은 직후 TV 화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국가를 둘러싼 상황이 악화돼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며 “모든 세력에게 공정한 국가 개혁을 하기 위해 군이 전권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쿠데타를 왕실이 추인한 부분이다. 결국 이번에도 태국의 정치 투쟁은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해소되지 못했고 19번째 쿠데타가 일어난 것으로 기록됐다. 1990년대 이후에만 3번째며2006년 쿠데타 이후 8년 만의 일이다.

쿠데타지만 흘러가는 모양새는 반탁신파가 원하는 그림에 가깝다. 군부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다. 반탁신파의 방해 등으로 지연되고 있는 하원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본래 궤도에 올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전문가들은 “비(非)민선의 과도 정부를 설립하고 정치 개혁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미래에는 민간 정부를 구성하는 하원 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시기와 방법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반탁신파에 서 있는 민주당은 2001년 이후 하원 선거에서 탁신계 정당에 4연패 중이다. 따라서 정치 개혁안도 탁신파 부활을 어떻게 막아내느냐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의회 구성이나 선거 제도를 반탁신파에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핵심이라는 얘기다.

프라윳의 생각도 비슷하다. 계엄령을 발동한 5월20일 그는 정부 부처와 선관위 등의 대표자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유혈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면 선거를 강행해서는 안된다”며 반정부 성향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계엄령조차 통보받지 못했다. 그 정도로 태국에서 군은 독특한 존재이며 정부의 통제에서 자유롭다. 태국에도 육·해·공군을 아우르는 국군 최고사령관이 있지만 명예직에 가깝다. 실질적인 권한은 인사와 예산이 다른 군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집중된 육군참모총장이 쥐고 있다. 태국군의 구심점은 왕실이다. 강한 구심력이 작동한다.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프렘 틴술라논다 추밀원(국왕의 자문기관) 의장도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총리에 올랐다. 프렘 의장은 육군을 경주마에 비유한다. “정부는 말 위에 올라탄 기수다. 기수보다 머리가 앞서 있는 경주마가 국왕을 정부보다 더 빨리 마주하며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말한다.

왕비의 측근으로 알려진 쿠데타의 주역 프라윳 찬오차 육군참모총장 © EPA연합

태국 육군의 정식 명칭은 ‘ROYAL THAI ARMY’인데 ROYAL이란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국왕의 군대’라는 의식이 강하고 그것이 군인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동안 육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제1보병연대장을 역임해야 했다. 제1보병연대장이 중요한 이유는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특수근위연대이기 때문이다. 제1보병연대장을 역임한 후 제1보병사단장을 거쳐 제1관구사령관(태국에는 네 명의 관구사령관이 있다)이 되는 것이 최강의 출세 루트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규칙이 흔들리고 있다. 프라윳 참모총장의 전임자인 아누퐁 파오친다 전 참모총장은 탁신 전 총리를 축출한 2006년 9월의 쿠데타를 지휘했다. 성공한 쿠데타의 보상은 참모총장으로의 승진이었다. 그 역시 제1사단장을 거쳐 제1관구사령관 코스를 밟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제1보병연대장이 아닌 제2보병연대장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쿠데타를 일으킨 프라윳 참모총장도 같은 루트를 밟았다. 그 역시 제2보병연대장 출신이다. 제1보병연대는 국왕을 경호하지만 제2보병연대는 시리킷 왕비의 경호를 담당한다. 국왕의 측근에서 육군의 정점에 오르는 게 과거의 엘리트 코스였다면 이제는 왕비의 지근거리를 거쳐야 정점에 오르는 구조가 된 셈이다.

2006년 쿠데타 이후 왕비 경호를 거쳐야 육군 장악

이런 흐름은 2006년 쿠데타 이후에 생겼다. 2008년에는 국방장관·육군참모총장·참모장·제1관구사령관 등 육군의 주요 직책 모두를 제2보병연대장을 거친 사람이 차지했다. 육군의 새로운 출세 코스의 구심점이 왕이 아닌 왕비라는 점은 태국 정국을 보는, 그리고 2006년과 2014년의 쿠데타를 보는 핵심 포인트다. 왕비가 그동안 노골적으로 반탁신파를 지원해왔기 때문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프라윳 참모총장 역시 군의 주요 인사 중 왕실과 가까운데 특히 왕비의 신뢰가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동안 프라윳의 발언에는 왕실, 특히 왕비의 의중이 반영돼 있는 것으로 해석돼왔다.

2010년 2월14일 ‘위키리크스’를 통해 하나의 외교 전문이 공개됐다. 보통 태국 왕실에 대해서는 현지 언론은 물론이고 외신 역시 민감한 부분은 보도하지 않는다. 2008년 2월 실각한 탁신 전 총리가 탁신계 정당인 PPP(국민의 힘)의 승리 이후 귀국하자 반탁신 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일명 옐로셔츠)는 반정부 시위를 벌이며 정부 해산을 요구했다. 정부 청사에 난입하고 공항을 점거하는 등 시위는 확산됐고 같은 해 12월, 헌법재판소는 PPP를 선거 부정 등의 혐의로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헌재 판결 직후 아피싯 웨차치 민주당 정권은 선거 없이 과도 정부를 구성하며 권력을 잡게 된다. 이 문서는 2008년의 시위 정국 때 태국 왕실의 동향에 관한 미국 외교 전문이었다. 2008년 10월1일 태국 주재 미국대사는 같은 해 9월 헌법재판소에 의해 물러난 사막 순다라벳 전 총리를 만났다. 사막 전 총리는 TV
요리 프로그램에 요리사로 출연해 출연료를 받은 것이 태국 헌법에서 정한 공직자 겸직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사임해야 했다.

그는 시리킷 왕비를 끄집어냈다. “시리킷 왕비가 프렘 추밀원 의장과 왕당파를 통해 (반탁신파의 시민단체인) PAD를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왕에 관해서는 “나는 높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으며, 총리 재임 중에는 국왕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6년 쿠데타에서는 시리킷 왕비와 프렘 추밀원 의장을 실질적인 쿠데타의 리더로 지적하는 풍문이 적지 않게 떠돌았다. ‘중립’이라는 왕가(王家)가 사실 반탁신 쪽에 서 있다는 얘기였다. 쿠데타가 끝나고 발표된 군 인사에서 왕비를 경호했던 아누퐁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일이 이때 처음 일어났다. 2008년 10월에는 친탁신파인 레드셔츠를 매우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시리킷 왕비가 PAD의 시위 참가자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다. ‘왕족의 한 사람이 노골적으로 반탁신파 편을 든다’는 생각에 레드셔츠는 이날을 ‘각성의 날’이라고 불렀다.

태국 거리에서는 푸미폰 국왕과 시리킷 왕비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사저널 김회권

탁신파, 민병대 조직 움직임…군부 내 갈등도 변수

쿠데타로 상황이 급변한 태국이지만 결국 밑그림은 반탁신파와 군부 그리고 시리킷 왕비가 그리는 그림대로 흘러가고 있다. 탁신파는 정치적으로 몰락했고, 또다시 군이 등장했으며, 반탁신파가 주장하는 대로 정치적 논의가 흘러가는 모습이 2006년과 닮았다.

물론 변수는 있다. 하나는 탁신파의 대응이다. 2006년에는 그대로 당했지만, 이번에는 친탁신파인 UDD(독재저항민주연합전선)의 반발이 심상찮을 전망이다. UDD 간부 중 일부는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내전도 불사하겠다며 민병대 창설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 지난 2월에는 북동부 이싼 지역을 중심으로 젊은이 60만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탁신파 조직을 결성하는 구상이 발표됐다. 군부 내 분열도 또 하나의 관심사다. 엘리트 코스에서 밀려난 제1보병연대 출신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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