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뿌리는 노론의 당리당략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 승인 2014.05.2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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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탕평책 대신 노론 해체했어야 이완용이 마지막 당수

언제부터인가 정조는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정조가 잠자던 존현각에 자객이 올라왔던 정조 1년(1777년) 7월28일의 사건이 배경인 <역린>이 상영되고 있다. 그간 조선 임금에 대한 인기투표에서 세종이 압도적 1위였다면 어느 순간부터 정조가 등장해 경쟁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임금의 일생을 비교해보면 너무 다르다. 세종이 시종일관 부친 덕분에 순탄한 임금 노릇을 한 반면, 정조는 부친 때문에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태종은 삼남인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은 물론 공신 집단을 과감하게 숙청함으로써 감히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는 깨끗한 조정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자신이 되레 노론벽파에 살해당하면서 아들까지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렸다.

영화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와 책으로 조성된 정조 신드롬

필자는 정조 신드롬의 근본 배경을 이런 권력 구조가 낳은 정조의 운명적 비극에 그 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14년 동안 대리청정하던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와 노론벽파의 결탁으로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여드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살해당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부친이 뒤주 속에서 신음하는 동안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에 가 있었는데, 외가 친척 중에 아무도 부친을 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을 목도했다. 구원은커녕 외할아버지 홍봉한과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이 부친 제거에 앞장섰고 여기에 혜경궁 홍씨까지 가세한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노론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이른바 ‘8자 흉언(凶言)’을 유포하며 세손 제거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열한 살 어린 세손의 처지를 묘사할 때 고립무원(孤立無援)이란 사자성어처럼 적당한 말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 사도세자 제거 작전에 가담했던 혜경궁 홍씨가 아들도 제거해야 한다는 노론 당론에 반기를 들고 영조도 손자 제거 요청을 거부하면서 세손이 숨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에어 포켓’이 만들어졌다.

세손은 노론 영수인 외조부 홍봉한의 신임을 받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고 세손이 즉위해도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홍봉한이 영조에게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겠다고 자청했을 때 세손은 겨우 살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손은 홍봉한이 <정사휘감(正史彙鑑)>을 교재로 가르칠 때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며 생존을 도모했다. 아마도 정조가 즉위 후 적당(賊黨)과도 손잡고 탕평책을 추진한 배경에는 이때 생존을 위해 외조부 홍봉한과 대타협을 이뤄낸 과거가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조가 지금 계속 부각되는 배경에는 정조란 인물이 현재진행형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나라 국(國)자가 들어가는 학문을 업으로 삼는 학자 중에서 정조의 부상이 불편한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 배경과 현황에 대해서는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과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자세하게 밝혔을 뿐만 아니라 필자도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사도세자의 고백 개정판)에서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다만 이 책들은 정조가 사후 200여 년이 지날 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당해왔던 구조적 배경을 조망했다는 점만 언급하겠다. 바로 이 대목. ‘정조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인물이라는 점이 정조 신드롬의 근본적 원인이 아닐까’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례로 정조 독살설을 보자. 몇 년 전 정조 어찰(임금이 쓴 편지)이 처음으로 공개돼 큰 관심을 끈 적이 있다. 그런데 정조 어찰을 최초로 공개한 학자들은 이 어찰이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사료인 것처럼 호도했다. 그만큼 정조 독살설을 뼈아프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200여 년 전의 정조 독살설을 뼈아프게 생각할까. 정조 독살설의 요체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가 정조도 독살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노론벽파의 시각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고 현 시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정조 독살설이 뼈아픈 것이다. 한마디로 노론 당파 학자다. 그런데 이런 학자가 그동안 한국 사회의 역사 서술권과 역사 해석권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현실을 놓치면 안 된다. 중·고교 국사교과서가 노론에게 사형당한 소론 출신의 실학파 유수원을 노론이라고 조작하고, 중상주의 실학이 마치 노론에서 나온 것처럼 호도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정조 어찰을 공개하던 학자가 노론벽파 영수 심환지를 정조의 최측근인 것처럼 호도하고, 정조가 노론벽파를 깊게 신임했다고 호도한 것도 마찬가지다. 5공 때 민정당 정권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이 민정당을 깊게 신임했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정조와 심환지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정조는 독살당했을 리 없다고 전혀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한 방송에서 부친 문제(文帝)를 독살한 수나라 양제, 시저 암살에 가담했던 로마의 브루투스, 그리고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관계를 예로 들어 반박하자 정조 어찰을 독살설 부인의 도구로 삼으려던 노론 후예 학자의 기세가 수그러진 것은 이들이 어떤 근거도 갖고 있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전주 경기전 정조대왕 어진 ⓒ 연합뉴스
정조는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 인물

최근 <대비, 왕 위의 여자>(김수지 지음, 인문서원)라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됐다. 국왕 뒤에서 발을 치고 수렴청정했던 네 대비의 정치적 일생을 추적한 책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정조 사후 지금까지 숱하게 논란이 되고 있는 정조 독살설에 대한 현대 의학적 근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노론 후예 학자들은 “정조 독살설은 시골에서나 떠돌던 야담”이라고 주장했고, 이 땅의 주류 신문이 이를 대서특필했지만 정조 사인에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三司)에 포진한 젊은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그 요체는 심환지의 친척인 어의 심인이 연훈방으로 정조를 독살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연훈방이란 수은을 태워 그 연기를 쬐는 치료법인데, 삼사의 젊은 관료들은 사실상 어의 심인이 심환지의 지시를 받아 연훈방을 시행한 것 아니냐고 공격한 것이었다. 물의가 워낙 거세지자 정조 사망과 동시에 권력을 장악한 정순왕후 김씨와 심환지도 심인에 대한 비호 자세를 거두고 사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 TV 다큐멘터리에서 이 문제를 다룰 때 한 한의사가 나와서 ‘연훈방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봤다. 필자도 한의학 서적을 대강은 볼 수 있지만 ‘연훈방은 문제가 없다’는 한의사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비, 왕 위의 여자>의 저자 김수지는 2010년 아산병원에서 수은으로 쓴 부적을 화장실에서 태우다가 연기에 중독돼 사망했던 한 남성의 사례를 찾아냈다. 이 남성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료진이 수은 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이 사례를 논문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이 남성이 쐰 수은 연기는 정조에게 시행했던 연훈방의 몇 십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자 김수지는 만약 연훈방이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한의사나 학자는 자신이 있다면 정조와 똑같은 연훈방을 받아보라고 말한다. ‘설’은 설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연구가 진척될수록, 그리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더해질수록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설’이 거대한 권력 집단의 음모에 관한 것이라면 대부분 진실로 드러난다.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 민낯의 근원은 인조반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해양경찰청 제공
“정조는 노론에 의해 독살당했다”

필자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정조의 탕평책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정조는 초인적 의지로 부친을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려던 노론벽파에 탕평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나 노론벽파는 정조 사망 직후 정조의 모든 개혁 정치를 폐기하고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 되는 과거로 사회를 되돌렸다. 노론 일당 독재는 노론 내에서도 10여 개 벌열(閥閱)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세도정치로 더욱 퇴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조반정 이후 300여 년간 집권했던 서인→노론→노론벽파→세도정치 세력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지막 노론 당수가 이완용이고,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매국적(賣國賊) 대다수가 노론이었다. 그래서 정조가 탕평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걸고 노론벽파 해체에 나섰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난 10년 이상 한국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노론사관·식민사관의 문제점을 꾸준하게 지적해온 필자는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 낯설지 않다. 선장과 선원이 공모해서 승객을 버리고 사복을 입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장면이나 진입 명령을 받은 해경이 진입하지 않은 장면의 근본을 찾아보면 광복 직후 친일 세력이 다시 득세한 반역사적·반문명적 현실이 있다. 그리고 그 친일 세력의 뿌리는 이미 망한 명나라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에 닿아 있고,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를 독살한 세력에 닿아 있다. 외국 침략자에게 붙어서 제 민족의 피를 빨던 매국적이 매국 행위에 대한 처벌을 받기는커녕 광복된 대한민국의 공직자로 부활했을 때 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이었겠는가. 그야말로 사적·집단적·당파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적·집단적·당파적 이익 추구가 ‘관(官)피아’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온갖 학벌·지역 카르텔로 나타났고, 그 적폐가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수백 송이의 희생으로 한국 사회를 덮친 것이다.

인간 정조의 위대성은 부친을 죽이고, 자신도 죽이려는 세력과도 화해의 정치, 용서의 정치를 펼친 데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때로 단호한 단절이 필요하고 그런 사회가 궁극적으로는 진보했다는 점도 역사적 사실이다. 더구나 부친을 죽인 것까지 용서를 받은 가해자가 반성은커녕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역습을 가한 것이 현실이 된 ‘독살’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정조는 그가 살았던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에도 이런 복잡한 현재진행형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에 정조 신드롬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미완의 과제이기에 계속 재조명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필자의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가 <이산이 꿈꾼 세계(정조의 정치와 철학: イサンの夢見た世界(正祖の政治と哲學)>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도 출간됐는데, 정조에 대해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일본인은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정조 신드롬이 어디까지 갈지 필자 역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사도세자 사건과 맞물릴 경우 그 폭발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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