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떼고 포 떼고 이젠 ‘마지막 보루’만 남았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4.06.0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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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취임 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불거진 안대희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 사태가 청와대 권력 2인자로 통하는 ‘왕실장’의 거취 문제로 비화한 것이다. 김 실장의 위기는 최고 권력자인 박 대통령의 위기이기도 하다. ‘김기춘 딜레마’에 빠진 박 대통령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국민의 시선이 청와대로 쏠리고 있다.

 
철옹성이 무너지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박근혜정부와 청와대, 여당이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국정 운영의 무능과 혼란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을 일순간에 무너뜨렸다. 집권 후 60% 안팎을 넘나들던 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참사 한 달 만에 40%대로 곤두박질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를 등에 업어 반사이익을 누리던 새누리당도 당장 코앞에 닥친 6·4 지방선거는 고사하고, 7월 재·보선에서 의석 과반수 유지 여부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집권 2년 차에 들어선 박근혜정부와 집권당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형국이다.

5월27일 김기춘 비서실장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회의장 입구에 서 있다. ⓒ 연합뉴스
청와대도 별 도리가 없었다. 성난 민심을 달랠 수습책을 내놓았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인적 쇄신 카드였다. 숱한 경질 요구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온 박 대통령이 남재준 국정원장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권력 핵심부를 도려낸 것이다. 측근을 내치는 데 익숙지 않은 박 대통령으로서는 참담한 일이었을 것이다.

안대희 후보자 낙마로 직격탄 맞은 ‘왕실장’

안대희 전 대법관의 국무총리 후보자 내정은 난국 돌파를 위한 고육책이었다. 절대 권력에 익숙한 박 대통령이 여권의 차기 대권 주자 물망에 오르는 인사를 행정부 2인자로 기용한 것이다. 측근 경질과 강골형 총리 기용은 그만큼 정권의 존립이 위중하다는 걸 박 대통령이 잘 알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고심의 카드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돼버렸다. 안대희 전 후보자가 총리 내정 6일 만에 낙마하면서 박근혜정부에 대한 민심은 더욱 거칠어졌다. 안 전 후보자의 전관예우 논란이 불거질 당시, 기자와 만난 여권 ‘친박(親박근혜)’ 핵심 인사는 “박 대통령이 어렵게 내놓은 민심 수습책의 효과가 50%는 반감돼버린 상황이다. 누가 안 전 대법관을 천거했는지 모르지만, 좀 더 치밀하게 검증하지 못해 대통령을 더 궁지로 몰아넣은 셈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한때 ‘국민 검사’로 추앙받던 안 전 후보자의 예기치 못한 낙마는 박근혜정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세월호 참사 수습에 무능했던 청와대가 고질적인 인사 시스템 부재를 또다시 드러냈기 때문이다. 낙마 후폭풍은 청와대 심부까지 치고 들어왔다. ‘마지막 보루’ 격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야권뿐만 아니라 여권 내에서도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지난해 8월 각종 인사 실패와 국정 운영 혼란으로 비난을 받던 현 정부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김 실장의 위상은 현 정권 어느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김 실장이 현 정부의 그림자 권력 핵심으로 부각되면서 ‘기춘대원군’ ‘부통령’ 등 그를 지칭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김 실장이 등판한 후 공안 정국 논란과 함께, PK(부산·경남) 및 법조계 인사 중용 경향이 강해지자 야권과 여론의 공세가 그를 향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굳건한 신임 속에서 김 실장의 위세는 끄떡없어 보였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쓰나미는 비껴가지 못했다.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 직후 민심 이반이 심해지자, 공식·비공식 채널을 이용해 여권 핵심 인사들로부터 민심 수습책에 대한 의견을 청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는 인적 쇄신의 폭과 대상도 포함됐던 것으로 보인다. 여권 인사 누구도 쉽게 꺼내기 힘든 김 실장의 거취 문제에 대한 의견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안대희 전 총리 후보자의 자진 사퇴 이전까지만 해도 김 실장 사퇴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은 친박 핵심 인사는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최일선에서 보필한 남재준 원장과 김장수 실장까지 사퇴하는 마당에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교체하자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포 떼고 차까지 뗐는데, 김 실장까지 바꾸자는 건 박 대통령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황은 급반전하고 있는 양상이다. 안 전 후보자의 낙마로 청와대 인사위원장인 김 실장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돼버렸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김 실장의 사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과 김 실장 본인이 사퇴 문제를 두고 느끼는 압박 강도가 총리 인선 파문 이후 달라졌기 때문이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5월29일 고위정책조정위원회에서 “정부 출범 2년 차가 되도록 청와대 인사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검증 시스템의 최종 책임자는 청와대 인사위원장인 김 실장”이라고 야권의 인적 쇄신 요구의 정점에 김 실장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5월19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열린 제2차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김무성 의원(오른쪽)이 서청원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전면적이고 철저한 인적 쇄신 단행해야”

안 전 후보자 낙마 후 여당 내부에서조차 공개적으로 김 실장의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국무총리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새누리당 간사를 맡고 있는 이철우 의원은 안 전 후보자의 사퇴 다음 날인 5월29일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총리(후보자)가 사퇴했는데 인사위원장이 책임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본인도 그렇게 느끼시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내 비주류 수장 격인 김무성 의원과 교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도 같은 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며 “읍참마속의 전면적이고 철저한 인적 쇄신을 단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해지면서 김기춘 실장의 거취 문제가 불거질 것으로 점치는 분위기가 여권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일단은 총리와 국정원장, 국가안보실장을 경질하는 데 그쳤지만, 궁극적으로 김 실장의 사퇴도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청와대 안팎에서는 민심 수습을 위해 ‘참사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의 우선 경질→부분 개각→청와대 쇄신’으로 이어지는 3단계 로드맵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당에서 주장하는 전면적인 인적 쇄신보다는, 점진적인 쇄신을 통해 연착륙을 시도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러한 분석의 배경에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 박 대통령의 선거 캠프에서 일하면서 박 대통령을 곁에서 보좌했던 새누리당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일순간에 모든 것을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다”며 “차근차근 일을 처리해나간다는 게 박 대통령의 소신”이라고 말했다.

5월27일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인 이완구 원내대표·주호영 정책위의장·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왼쪽부터)가 의원총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나올 때 나오더라도 모든 것 정리한 뒤에”

김 실장의 교체 가능성은 지난해 말부터 여권 주변에서 꾸준히 흘러나왔다. 올해 들어 김 실장이 사의를 표명한 적이 있지만 박 대통령이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정치권 주변에서 나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일부 친박 인사들 사이에서도 김 실장 교체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세월호 참사와 국무총리 후보자 인선 실패 등으로 김 실장에 대한 사퇴 요구가 더 높아졌지만, 역설적으로 박 대통령이 김 실장의 사퇴 카드를 꺼내들기가 더 어렵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한 여권 인사는 “지금은 김 실장이 그만둘 때가 아니다. 김 실장은 누가 설령 ‘자리에 연연하느냐’고 욕한다고 해서 그것을 무서워하거나 신경 쓸 사람이 아니다. 나올 때 나오더라도 모든 것을 정리해놓고 나올 분이다. 언젠가 물러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당 일각에서는 김 실장이 7월로 예정된 새누리당 전당대회 이후에야 거취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향후 총리와 국정원장 인선이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당권 경쟁에서 청와대와 공감대가 많은 쪽이 승리하는 것을 본 후 김 실장이 거취를 결정할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민심과 당내 여론의 양상에 따라 김 실장이 전격적으로 사의를 밝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실장은 5월29일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킨텍스에서 열린 ‘민군 기술 협력 박람회’ 개막식에 박 대통령과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묘수를 둘지 정가의 촉각이 곤두서 있다. 여론 달래기와 권력 운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박 대통령의 체스판 한가운데 김기춘 비서실장이 있다.  

 

여당 내 반란 진압할 ‘장수’가 절실하다 


민심이 요동치는 상황에서도 인적 쇄신 1호로 지목된 김기춘 비서실장의 교체에 청와대와 권력 핵심부가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데는 복잡한 속내가 있다. 내각과 청와대 핵심 인사들의 연이은 낙마로 인한 국정 운영 공백보다도, 여권 내부의 권력 다툼에 대한 우려가 김 실장의 즉각적인 교체에 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문제의 핵심은 복잡한 당내 사정이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6·4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차기 당권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6·4 지방선거를 거친 후, 새누리당은 새로운 당 대표를 선출할 예정이다. 이미 청와대와 교감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서청원 의원의 출마가 유력하게 나온다. 친박 핵심으로 통하는 최경환 전 원내대표도 거론된다. 당내 비주류로 분류되는 김무성 의원은 대표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 간 물밑 경쟁이 벌써부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당내 권력 다툼이 본격화될수록 불안한 쪽은 청와대일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쳤던 친박이 집권 후 ‘원조 친박’ ‘신박(新朴)’ ‘범박(汎朴)’ 등으로 뿔뿔이 분열하는 상황에서, 여당 내부에서 촉발된 권력 다툼은 바로 박 대통령을 향한 공격, 나아가 레임덕의 전초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청와대를 넘어 당내까지 장악력을 미치는 ‘왕실장’의 카리스마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당권 도전이 유력한 김무성 의원은 ‘비박(非박근혜)’으로 분류되면서 박 대통령과 언제든 각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원조 친박들 사이에서는 ‘요주의 인물’이다. 김 의원은 지난 5월24일 대구시장 선거 지원 유세에서 “무능하고 소신 없는 청와대 비서실도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명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김 실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본인은 고사했지만, 차기 총리 후보에 김 의원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것 또한 주류 일각에서 박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을 차단하기 위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각을 곧추세우는 김 의원의 행보가 심상찮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수도권의 한 친박계 의원은 “김 의원이 언급한 것은 김 실장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면서 “이야기가 와전된 것 아닌가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원조 친박으로 분류되는 여권의 한 인사는 “김 의원으로서는 박 대통령을 공격해 당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같은 PK 출신이면서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김기춘 실장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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