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민심, ‘중원 대망론’을 응시하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4.06.1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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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 최대 이변 연출…여권의 오만과 무능에 철퇴

“중원(충청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다. 우리 정치사와 딱 맞아떨어지는 명제다. 14대 김영삼 대통령 이래 18대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는 지금껏, 충청권의 패자(覇者)가 대권을 거머쥐었다. 단 한 차례의 예외도 없었다. 영호남을 각기 본거지로 양대 세력이 팽팽한 대결을 펼쳐온 한국 특유의 정치 구도에서 충청권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한국 정치 구도상 집권이 여의치 않았던 김대중(DJ·15대)·노무현(16대) 대통령의 등장은 충청권의 이 같은 위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39만557표를 앞섰다. 말 그대로 숨 막히는 신승(辛勝)이었다. 당시 DJ는 대전 10만8000, 충남 24만7000, 충북 5만2000여 표 등 충청권에서만 40만8819표를 더 얻었다. 충청권이 아니었다면 진보 진영으로의 평화적 정권 교체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새누리당에 몸담고 있는 이인제 의원이 당시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와 독자 출마한 게 결정적이었지만, 당시 이인제 후보(국민신당)가 보수층 표를 분산시켰더라도 충청권 맹주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의 DJP 연합이 성사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재선에 성공한 안희정 충남지사는 야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 뉴시스
DJ를 이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대권에 재도전한 이회창 후보를 57만980표 차로 눌렀다. 노 후보는 영남권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충청권에서 앞선 25만6286표에 힘입어 대통령이 됐다. ‘충청권 승리=대통령 당선’ 등식은 한갓 상징적인 징크스가 아니다. 국토의 허리에 자리하면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비판적·선별적 투표 행태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다.

예측불허 ‘지그재그’ ‘쏠림’ 투표 행태 여전

이런 충청 지역 정서가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또 ‘일’을 냈다. 충남·충북·대전·세종 4개 광역단체장을 몽땅 새정치연합에 안겨줬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전면 실시된 이래 진보 성향 정당에 광역단체장 모두를 몰아준 것은 처음이다. 이변이라는 평가가 진정 어울린다. 특히 충청권 승자가 대권을 거머쥔 ‘관례’를 떠올리면 ‘대사건’이다. 당장 드러난 모양새만으로는 그렇다. 2017년 12월에 치러질 19대 대선까지는 아직 3년 반여의 시간이 있고, 그 사이 무슨 변고가 터져나올지 미지수지만, 여권으로서는 끔찍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거기에 강원도지사마저 새정치연합에 또 뺏김으로써 허리를 완전 절단당했으니 여권이 당혹감 속에 허둥대는 게 하등 이상하지 않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 충청 유권자들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줬다. 박 후보는 충남 56.7%, 충북 56.2%, 대전 50.0%, 세종 51.9% 등의 득표율로 이 지역에서만 166만여 표를 건졌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에 비해 28만6000여 표 앞섰다. 이렇게 유리한 정치 지형이 2년 전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이번 선거 직전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도 60%에 가까웠다. 전국 평균보다 10%포인트를 웃도는 수치다. 새누리당 지지도도 상대인 새정치연합의 2배에 육박하는 40%대였다. 그럼에도 이번에 광역단체장에서 전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때문에 ‘세월호 참사’ 변수를 들먹거리지만 당치 않다. 일정 부분 여권에 악재로 작용했을지 몰라도 타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각종 여론조사 수치도 이를 방증한다. 다만 세월호 참사와 ‘안대희 총리 후보자 지명’ 등 그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여권의 오만과 무능이 박근혜 정부 출범 이래 쌓였던 불만과 상승 작용을 일으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핫바지’ 한마디에 죽어가던 JP를 되살려 정치판 전체를 뒤엎은 배경에는 그간 누적된 충청 도민의 소외감이 있었다. ‘충청당’이라는 모멸적 별칭을 듣는 자민련을, 자유선진당을 장기간 껴안아온 것은, 느릿하지만 일단 마음먹으면 좀체 흔들리지 않는 끈질김과 오기가 충청 도민들에게 서려 있어서다. 단체장이나 국회 의석을 몰아줬다가 일거에 ‘회수’하는, 최근 20여 년 사이 몇 차례 반복된 투표 행태도 실은 그 같은 속성의 또 다른 측면이다. 이런 쏠림형(型) 행태는 이번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선거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난 지그재그형과 함께 충청권에 대해 좀 더 전략적 대응이 절실함을 웅변하는 부분이다.    

그동안 적잖은 충청 도민은 박 대통령의 PK(부산·경남) 편중인사를 비롯한 독선·독주에, 새누리당의 무기력에 “우릴 우습게 보는겨”라고 일갈하곤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특별한 행동은 없었고, 때문에 정부·여당 지도부도 그러려니 했다. 박성효 새누리당 대전시장 후보의 우세를 당연시했다. 세월호 정국에서 폭탄주 구설에 오른 유한식 세종시장을 후보자로 그냥 밀어붙인 것 또한 지나친 자신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충청 도민들의 매운 정서는 6·4 선거를 통해 유감없이 확인됐다. 충남 출신 이완구 신임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가 충청 표심을 추스르기 위해 선거 막판 대거 출동했지만 일단 토라진 민심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라면 안 되쥬” 정서는 생각보다 단호했다.

6·4 지방선거 야당 중원 석권의 선봉들. 왼쪽부터 이시종 충북지사·권선택 대전시장·이춘희 세종시장 당선자. ⓒ 연합뉴스·뉴시스
안희정, ‘충청 대통령 대망’ 어필해 재선 성공

차기 대선과 관련해 특히 주목할 또 다른 대목은 재선에 성공한 새정치연합의 안희정 충남도지사다. 종반 들어 다소 흔들렸다지만 그는 선거 기간 내내 우세를 지켰다. 여기에는 단순한 현직 메리트를 넘는, ‘충청 대통령 대망(待望)’이 단단히 한몫했다. 따라서 안 지사가 이런 기류를 잘 활용한다면 이번에 거둔 중원 석권의 기세가 2017년 대선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강원도를 포함한 국토 허리 장악이 새정치연합에는 고무적인 상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야당도 자만은 금물이다. 우선 충청 지역 4개 시·도지사 모두를 차지했다지만, 기초단체장 전적은 전혀 다르다. 충북에서는 새누리당이 11곳 가운데 6곳을 차지했다. 충남에서는 새누리당이 9곳, 새정치연합이 5곳을 나눠 가졌다. 대전에서만 새정치연합이 5개 구청장 중 4곳을 확보해 우세를 보였을 뿐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도가 여전히 새정치연합을 압도한다. 방심하다간 어느 한순간 철퇴를 맞을 소지도 다분하다. 한마디로 충청 표심이 어디로 향할지, 충청 칼날이 누구를 겨냥할지는 현재로선 예측 불허다.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는 충청 도민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지방선거 전체 유권자 수는 4129만6000여 명이다. 그 가운데 충청권은 전체의 10%를 상회하는 418만9000여 명으로, 호남권의 417만6000여 명을 넘어섰다. 불과 1만여 명이지만 달라진 인구 역전 상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충청권이 단순히 대선 캐스팅보트 역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특히 야권이 기존의 영호남 대결 구도를 전제로 충청권 표심을 다루려 한다면, 의외의 역풍에 직면할 소지가 크다. 여야 모두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 충청권이다. 그게 정치권에 던지는 6·4 지방선거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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