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로 하나 되고, 축구로 싸운다
  • 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4.06.25 11:5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쟁 중 적군과도 경기…월드컵 때마다 지구촌 들썩

축구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인류에게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다. 월드컵이 국제적으로 올림픽을 능가하는 관심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축구의 인기가 그렇게 높지 않다. 하지만 월드컵만큼은 범국민적인 관심사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축구와 야구는 각각 영국과 미국에서 19세기 중반쯤 생겼다. 당시는 영국이 세계 패권국으로서 오대양을 누빌 때였다. 반면에 미국은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국제적으로 고립주의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미국 야구가 아닌 영국 축구가 영국 배를 타고 전 세계에 전파됐다.

우리나라에도 고종 19년인 1882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의 승무원들에 의해 축구가 들어왔다. 그때 상투머리에 한복을 입은 조선 백성과 영국 선원들이 축구를 했다고 한다. 그 직후 또 다른 영국 군함 엥가운드호가 상륙했고, 이 배의 승무원은 서울까지 들어와 축구를 선보이면서 공도 선물했다. 이 때문에 한국 축구는 영국 핏줄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데, 사실 영국은 전 세계를 누비며 축구를 전파했기 때문에 세계 축구가 모두 영국 핏줄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4 브라질월드컵 H조 대한민국과 러시아의 조별리그 경기가 열린 6월18일 서울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거리응원을 펼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미국은 야구를 전파하겠다는 생각이 크지 않았다. 미국의 야구 리그는 처음부터 기업 논리로 발전됐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사업 기반을 다지는 데 관심이 컸다. 해외 전파는 당장 이윤을 만들어주지 않아서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국의 야구사업자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자신들의 독점적 사업 기반인 메이저리그를 정착시키는 데 주력했다. 거기에서 충분히 수익을 뽑은 후인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해외 진출에 힘을 쏟게 되고 그래서 노모 히데오나 박찬호 같은 선수가 메이저리그 시장 확대의 사명(?)을 띠고 간택되었다. 미국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까지 만들면서 야구 세계화에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축구로 기울어진 대세는 뒤집기 어려웠다. WBC를 만드는 과정도 그야말로 미국적이다. 축구에선 영국 사업자가 아닌 국제협회를 통해 국제대회가 열리지만 WBC는 메이저리그가 주최했다. 미국 야구사업자의 독점을 향한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축구는 야구와는 달리 기업 논리가 아닌 각 지역별 클럽 중심으로 발전됐다. 야구에서는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리그에서 몇몇 팀이 영원히 기득권을 누리지만, 축구 리그에는 모든 클럽이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다. 워낙 클럽이 많다 보니 결국 강등 시스템이 도입됐다. 미국은 야구를 수익을 뽑아낼 창구로 인식했지만, 영국은 축구를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고 타국과 교류할 매개로 인식했다. 클럽도 해외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결과는 축구의 세계화다.

축구는 인류 최대의 관심사

이런 외적인 조건과 더불어 축구 자체에 내재된 특징도 축구의 승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축구는 쉽고 준비물도 간단하다. 공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마저 없다 해도 만들면 그만이다. 1차 대전 당시 한 전선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이 즉석에서 공 대용품을 만들어 함께 축구를 즐겼다가 양측 수뇌부를 긴장시킨 적이 있을 정도로 축구는 간단하게 즐길 수 있다. 한국전쟁 때도 유엔 참전군 사이에 간이 축구 경기가 열렸다. 글러브·방망이 등 복잡한 준비물이 없어도 되고 룰도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조건의 나라에 손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또 그렇게 간단하기 때문에 축구는 가난한 나라라도 얼마든지 선진국을 이길 수 있는 스포츠다. 야구·농구 등 다른 구기 종목에선 후진국이나 특정 인종의 대륙이 두각을 나타내기 매우 어렵다. 반면에 축구는 대규모 구기 종목 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나라가 대등하게 겨룰 수 있고 특히 식민지를 겪은 신생국이 구(舊)제국을 꺾을 수 있기 때문에 전 지구적인 열광을 받는 것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축구는 본능에 부합한다. 쉽고 후진국도 참여할 수 있는 종목 중에 권투도 있지만, 축구가 인류의 최대 관심사가 된 것은 여기에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원시 시대 때부터 인간은 각 부족별로 집단을 이뤄 함께 전쟁을 벌여왔다. 부족 간 전쟁의 현대 대리물이 바로 축구다. 축구를 통해 인간은 부족의 위세를 과시하고 타 부족에 맞서 승리하려는 본능을 충족시킨다. 다른 종목도 애국주의로 대중을 흥분시키지만 그중에서도 축구가 유별난 것은 바로 이런 대리 전쟁이기 때문이다. 축구로 이겼을 때 가장 통쾌하고 축구로 졌을 때 가장 열불이 난다.

그래서 축구는 폭력과 매우 밀접하다. 과거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사이에 축구 경기를 계기로 실제 전쟁이 터진 적이 있을 정도다. 유럽은 오랫동안 축구팬이 저지르는 폭력 사태로 골머리를 앓았다. 중남미에서도 축구팬들 사이의 폭력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축구로 펼쳐지는 대리 전쟁은 꼭 국가 간의 일만이 아니다. 축구는 일종의 부족 전쟁으로 지역감정이나 계급 대립도 첨예하게 표현한다. 예컨대 스페인에선 마드리드를 포함한 중앙 지역과 바르셀로나 지역, 바스크 지역 사이의 대립이 축구로 표현된다. 바로 그런 지역감정이 스페인 대표팀이 종종 실력 이하의 졸전을 펼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에선 가난한 지역과 부유한 지역 사이의 계급 대립이 축구 경기에서 폭발해 수십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한국, 미국과의 특수 관계로 야구가 더 인기

그런데 한국의 축구는 차갑다. 한국은 야구를 즐기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미국 말고 야구를 하는 나라로는 동아시아의 한국·일본·타이완, 중앙아메리카의 쿠바·도미니카공화국 등이 있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야구가 번성한 건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가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야구의 아기자기한 맛에 익숙해진 사람은 축구를 지루하게 여기게 됐다. 한국에선 지역감정도 축구가 아닌 야구와 결합해, 1970년대에는 고교야구가 지역정서를 대변했고 1980년대 이후엔 프로야구가 그 역할을 맡았다.

미국과의 특수 관계가 형성되기 전까진 한국에서도 축구 열기가 뜨거웠다. 식민지 시절엔 서울팀과 평양팀의 경평전이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였다. 경평전이 열리는 날엔 평양 기생들까지 휴업할 정도였다. 당시 선수였던 김영근 등이 한국 최초의 대중 스타로 불린다. 아녀자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설레었다고 한다. 경평전은 기호 지역과 서북 지역 사이의 지역감정이 분출되는 장이었고, 당시 축구 경기엔 유럽처럼 폭력사태가 빈번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축구로 격돌하는 것도 큰 관심을 모았다.

한국전쟁 이후 축구에 대한 관심은 차츰 식어가지만 축구 국제대회 열기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인에겐 ‘변방 콤플렉스’와 함께 ‘국위 선양 열망’이 있다. 세계인에게 주목받는 축구 대회야말로 변방 콤플렉스를 떨치고 국위를 선양할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월드컵은 뜨겁다. 민족의 한이 월드컵에서 분출된다. 축구가 외면받는 나라에서 4년에 한 번씩 태극전사 신드롬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