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쇠와 옹녀는 사랑, 색골남녀 아니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07.1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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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연출가 고선웅

연출가 고선웅(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은 요즘 연극계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다. 대한민국 희곡상·연출상 등 웬만한 연극계 상은 다 받았고 그가 연출한 <푸르른 날에>는 4년째 5월이면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될 정도로 흥행 보증수표다. 뮤지컬과 연극, 두 장르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는 그가 이번엔 창극에 손을 댔다. 그것도 “고선웅에게 창극을 해보자고 했는데 단박에 손을 번쩍 들고 ‘변강쇠를 해보겠다’고 나섰다”(김성녀 국립창극단 단장)고 한다.

신재효가 정리한 사설(대사)만 남고 가락이 유실된 <변강쇠전>은 고선웅이 대본을 다시 쓰고 연출을 맡고, 소리꾼 한승석(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이 소리를 붙이면서(작창) 2014년 6월 <변강쇠 점찍고 옹녀>(<옹녀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길어야 닷새 공연하던 창극이 6월11일부터 7월6일까지 근 한 달간 공연을 펼쳤다는 것은 대기록이다. 그것도 창작 창극으로 객석 점유율 85% 이상을 기록한 것은 뮤지컬보다 더 좋은 성적이다. 소외되고 무시됐던 창극이 창작 창극을 중심으로 빠르게 공연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 시사저널 임준선
고선웅은 낯선 분야인 창극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설을 읽어보니 매력도 있고 굉장히 좋았다. 외설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격조가 느껴졌다. 그리고 옹녀가 생각보다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 주인공이란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후반부에 드라마적인 구조가 실종되면서 이야기가 멍텅구리가 된다는 점이다. 이 부분만 대본에서 손을 보면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두렵지 않았고 대본을 쓸 때나 무대에 올릴 때나 공포심이 안 들었다.”

현대 연출가가 뛰어든 창극 세계

그는 <옹녀전>을 되살리면서 옹녀와 변강쇠를 성욕에 찌든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도록 성격에 변화를 줬다. 이를테면 옹녀는 ‘색녀’가 아니라 ‘삶을 개척하는 강단 있는 여성’으로 강쇠가 팔도 장승의 ‘음모’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이를 키우며 인생을 살아간다. 고선웅은 “내가 작품을 할 때는 세상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마음이 선량해지는 그런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옹녀전은 18금(禁) 창극이지만 그리 야하지는 않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강쇠가 색골이긴 하지만 다른 여자랑 관계를 하는 대목이 원작에도 나오지 않는다. 사랑이 담긴 작품이 오랜 생명력을 갖고 멋진 작품이다. 옹녀는 사랑이다. 색골남녀가 아니다. 강쇠와 옹녀는 경계를 넘어서 사랑을 했다. 하지만 원작은 색골남녀·인과응보로 끝을 낸다. 나는 21세기 옹녀가 그걸 극복하고 사랑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래서 생명의 탄생을 덧붙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행복해질까’라는 고민을 한다”고 덧붙였다. 그게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물론 기존 사설에 등장하는 강쇠의 옥문관 ‘관찰기’나 옹녀의 양물 ‘관찰기’나 극 후반에 등장한 대형 목제 딜도의 발칙함은 원작의 ‘19금’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하지만 고선웅이 재정의한 주인공 캐릭터나 독일에서 영상을 공부하고 온 이원호가 성기 이미지와 매트릭스 이미지까지 그래픽으로 활용한 무대미술, 한승석의 민요와 판소리, 클래식과 뽕짝을 넘나드는 음악은 무대를 현재형 감성으로 이끌어냈다.

그는 특히 한승석과 합이 잘 맞았다고 고마워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딱 집어내고 제대로 써줬다”는 것이다. 한승석은 최희준의 <하숙생>과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르나>에서 ‘운명의 여신’을 삽입하고 창작 판소리, 민요, 정가, 비나리, 서도민요, 진도 다시래기 등 음악을 폭넓게 썼다. 강쇠와 옹녀가 전국을 떠도는 설정이라 각 지역의 소리 유산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안숙선 명창의 애제자답게 ‘판소리의 기본’에 집중했다. 반주 악기에도 양악기는 배제됐다. 김성녀 감독 체제에서 만들어진 창작 창극의 ‘실험’에 문제를 제기하던 진영도 이번 작품은 이렇다 할 흠을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태숙 연출의 <장화 홍련>과 서재형의 <메디아>가 과감하게 실험적인 면을 선보이면서 창작 창극의 발판을 먼저 다졌기에 나는 가기 쉬웠다. 이번 작품에서 오히려 전통에 더 가깝게 돌아가는 ‘실험’도 할 수 있었다. 내용만 좀 더 모던하게 다듬었다. 창극단 지도위원도 감동받았다고 말씀해주시고, 어르신들도 많이 오시고 좋아하시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창극’과 ‘창극이다, 아니다’는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국립창극단의 최근 창극은 진일보한 것이다. 이런 논란이 나오는 것 자체가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뭔가를 해봐야 이런 시도 저런 시도가 이어서 나오지 않겠나.” 

고선웅은 창극이라는 장르 자체를 호평했다. “창극이 경쟁력이 큰 장르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판소리는 전승하는 것에 급급했는데 정통성을 보존하되 다른 부분에 변화를 준다면 시장에서 경쟁력이 충분하다. 오죽했으면 내가 광맥이라고 했겠나. 코미디부터 슬픔, 한, 골계미, 해학 이런 여러 감정이 판소리를 타고 관객을 쉽게 사로잡는다.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관객의 이런 반응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연극배우는 창극배우에게 열린 자세 배워야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가사를 다듬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남한산성> 연출을 경험한 그는 창극과 뮤지컬의 차이에 대해 “소리는 즉석에서 소리의 힘만으로 전달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소리만으로 신명을 끌어올리기도 하고 계면조로 소리를 내면 관객이 바로 슬픔에 빠져든다. 창극배우가 가장 열려 있는 배우라는 것도 알았다. 풀어진 상태에서 어떤 것을 주문해도 즉석에서 해결하고 플러스 알파까지 넣어준다. 이런 열린 자세는 연극배우가 창극배우(소리꾼)에게 배워야 할 대목이다.”

87학번(중앙대 신문방송학)인 그는 그 세대의 대다수가 그렇듯 판소리와 특별한 인연은 없다. 다만 1993년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펑펑 울었던 강렬한 기억이 있다. “송화와 동호, 유봉이 길을 떠나면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는데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이 영화를 군에서 퇴역한 뒤 전남 무안에 정착한 부모님이 서울에 오셨을 때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엄마가 77세, 아빠가 80세인데 그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연극의 본질은 대중적인 것이다. 나보다 똑똑한 관객이 훨씬 많다. 대중의 취향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조화롭게 함께 가는 작품을 하고 싶다.”

세간에선 그의 작품을 ‘마술적 사실주의’ 또는 ‘희극과 비극의 공존’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그는 “재미”라고 했다. “재미의 종류가 여러 가지지만 어쨌든 재미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쓴 대본을 대본대로 똑같이 올려보기도 했지만 그게 굉장히 어렵다. 취향이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원작 희곡을 그대로 올리는 분이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난 들이댄다.” 불임 남자가 주인공이었던 <성인용 황금박쥐>(2003년), 세종대왕 며느리의 스캔들을 다룬 <마리화나>(2008년), 셰익스피어 희곡을 비튼 <칼로막베스>(2010년)와 <리어외전>(2012년)이 그렇게 탄생했다는 것이다.

“창극에서 새로운 광맥을 발견했다”는 그가 앞으로 어떤 ‘재미’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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