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공천 드라마…23년 우정 짓밟히다
  • 차윤주│뉴스1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07.1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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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민 전략공천과 ‘허동준의 난’…안철수만 상처투성이

가히 ‘허동준의 난’이라 부를 만했다. 평소 조용하다 못해 적막함마저 감돌았던 국회 정론관은 7월8일 아침 몸싸움과 고성, 욕설로 아수라장이 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의 7·30 재보선 동작 을 후보 수락 결심을 알린 기동민 후보는 칩거 닷새 만에 고개를 떨구고 나타나 ‘23년 지기(知己)’에게 미안함과 난처함을 표현했다. 하지만 회견장을 점거한 허동준 전 동작 을 지역위원장은 분노를 난사하며 절규했다. 동작 을 잔혹사의 기구한 주인공 허 전 위원장도, 광주에서 표밭을 갈다 당 지도부의 갑작스러운 동작 을 전략공천으로 황망하게 상경한 기 후보도 모두 피해자인 막장 공천 드라마가 절정으로 치달은 순간이었다. 난은 이틀 만에 허 전 위원장의 불출마 선언으로 자체 진압됐지만, 제작 새정치연합, 각본 김철수(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의 공천 드라마가 남긴 여진은 크다.

같이 최루탄 마시던 동지가 ‘원수’로

2014년 7월8일 기동민 전 서울부시장(오른쪽)이 국회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동작 을 재보선 공천을 수락하는 기자회견을 열자 허동준 전 지역위원장이 가로막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한 달여 전 6·4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기자와 만난 허 전 위원장은 “요새 착잡해서 밥이 안 넘어간다”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재선 캠프가 꾸려진 종로5가 백반집에서 그는 밥도 시키지 않고 맥주만 들이켰다. 당은 2000년 총선에서 유용태, 2004년 이계안, 2008년 정동영 등을 전략공천했다. 그나마 2012년 총선에는 경선을 했지만, 이계안 후보에게 유리한 룰이 조성된 사실상의 전략공천이었다. “지역에서 활동한 지 14년이 됐는데 한 번도 출마를 못한 게 말이 되느냐”며 전의를 불태웠지만, 여전히 공천권을 따낼 것이란 확신은 못 가진 눈치였다.

이미 새누리당에선 동작 을에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나경원 전 의원,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 하나같이 ‘빅카드’가 거론되고 있었다. 동작 을의 전 주인도 여권 거물 정몽준 전 의원이었다. 때마침 새정치연합에선 한 번 동작 을 후보 자리를 내줬던 정동영 상임고문의 전략공천설이 흘러나왔다. 이계안 최고위원 출마설도 떠돌았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어쩌면 허 전 위원장도 곧 다가올 비극을 예견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예상보다 더 큰 한 방이 그를 때려눕혔다. 정 상임고문도, 이 최고위원도 아닌, 정치 신인에 가까운 기동민 후보가 느닷없이 전략공천된 것이다. 그것도 23년 ‘절친’이….

사실 재보선에서 전략공천은 비일비재하다. 지역구를 옮기는 일도 다반사다. 잠시 원내에서 밀려났던 거물들이 재보선을 교두보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니 총선급으로 치러지는 7·30 재보선은 지역구만 15개다. 이례적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여야 공히 사람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그런데 광주 광산 을에 출사표를 던졌던 ‘박원순의 남자’ 기동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서울로 떠밀려왔다. 기 후보가 두 살 위지만 허 전 위원장과 함께 둘은 대학 운동권 시절 같이 최루탄 마시고 형·동생 하던 사이다. 세 학번 아래지만 전대협 대변인은 허 전 위원장이 먼저 했다. 중앙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허 전 위원장은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되면서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기 후보에게 전대협 대변인 바통을 넘겼다.

국회에선 같은 ‘영감’(고 김근태 전 의원)을 모시기도 했다. 허 전 위원장은 2002년 대선 경선 당시 김근태 후보 수행팀장으로 근거리 보좌했고, 기 후보는 2005년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 시절 이후 정책보좌관, 국회의원 수석보좌관으로 곁을 지켰다. 처(妻)복이 있는 것도 비슷하다. 기 후보의 부인은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 후보가 올해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에 신고한 재산은 15억8900만원으로 아내와 본인 명의로 된 예금이 12억원이 넘는다. 허 전 위원장 부인은 치과의사다. 경기도 안산에 치과병원이 있다. 그녀는 허 전 위원장의 출마에 앞서 “19년 결혼생활 동안 생활비는커녕 갖다 쓰기만 했지만, 묵묵히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때로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늘 응원하고 있다”고 공개 내조 메시지를 보냈다.

허 전 위원장 입장에선 기 후보와 자신을 견줘보면 서울시 정무부시장 정도가 눈에 띄는 경력의 전부인데 자신을 꺾고 공천장을 쥔 것은 도무지 납득이 안 됐을 것이다. 허 전 위원장이 “23년 지기의 등에 비수를 꽂는 패륜 공천”이라 울부짖으며 기자회견장에 난입했을 때 ‘23년 지기’는 우정을 강조한 게 아니라, “나보다 크게 나을 것 없는 선배”라는 데 방점이 찍혔을 것이다.

18대 대선 후 처음 치러진 지난해 4·30 재보선, 민주당이 노원 병 무공천을 결정하자 지역위원장이었던 이동섭 사무부총장도 반발했지만, 상대는 안철수 전 대통령 후보였다. 지난해 10·30 화성 갑 보궐선거도 새누리당에서 절치부심 표밭을 닦았던 김성회 전 의원이 큰 소란 없이 후보 자리를 내줬던 것은 상대가 친박 좌장자리를 예약한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 전 위원장에게 일종의 ‘인지 부조화’가 작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신인이나 다름없는 기동민 후보가 당선돼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 허 전 위원장으로선 다시 지역구를 회수할 길도 멀어진다. 그야말로 최악이다. 임기 1년11개월짜리 금배지 앞에서 동지로 지낸 23년이 무너진 이유다. “무소속 출마 불사”를 외치던 허 전 위원장은 결국 7월10일 불출마를 선언했다.

“광주의 아들” 외치던 기동민도 피해자

불과 며칠 전까지 ‘광주의 아들’을 외쳤던 기 후보도 피해자이긴 매한가지다. 당이 기 후보에게 서울 출마 권유를 한 건 공심위의 광산 을 후보 면접 다음 날인 6월29일 딱 한 차례였다. 이후 별다른 언질이 없었고 7월3일 공천 결과 발표 직전에야 소식이 전해졌다. 그 사이 이미 기 후보는 광주로 내려가서 정식 출마선언에, 예비후보 공보물 배부까지 광산 을 예비후보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공천 발표가 있기 불과 3시간 전엔 광주로 내려온 박원순 시장과 함께 5·18국립묘지도 참배했다.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는 전국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서울 한 곳은 ‘박원순 간판’에 맡기고, 매물이 넘치고 당선 가능성도 큰 경기(5곳)와 호남(4곳) 지역을 적당히 나눠 갖겠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반대로 박원순 시장은 야권의 심장 광주에 측근이 터를 닦아두길 내심 바랐다. 자칫 기 후보가 본선에서 패하면 당장 차기 대권 주자로서 ‘박원순의 확장성’에 물음표가 붙을 수도 있다. 막장 공천 드라마는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가 썼지만, 박 시장이 주연급 조연으로 후폭풍을 떠안게 된 셈이다. 그에 따른 손가락질은 고스란히 안 대표의 몫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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