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한 전시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 베르사유=김세원│가톨릭대 교수 ()
  • 승인 2014.07.1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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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베르사유 궁에서 만난 이우환 화백

‘Lee Ufan-Versailles(이우환-베르사유) 공식 개막행사 초대. 시간: 오후 4시~8시 반. 입장: 아르메 주차장 근처 왕궁 철문.’ 햇볕은 따사롭지만 바람은 강한 지난 6월16일 오후 초청장을 들고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작가(78)를 만나러 베르사유 궁으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지난 1년여에 걸친 그의 작업의 결과물들이 어느 곳에, 어떻게  펼쳐져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3㎞ 떨어진 베르사유 궁전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영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프랑스 절대 왕정의 상징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박물관으로 쓰이는 왕궁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높이 2.7m, 폭 35cm의 솜으로 만들어진 낯선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 두 개가 함께 배치된 그의 작품 <관계항-솜으로 만든 벽> 앞에 그가 있었다. 청바지에 청색 재킷, 인디언 핑크 셔츠를 받쳐 입은 작가는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회고전 때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 김세원 제공
“주제는 공간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

“오늘날 사람들은 빠른 속도와 정보의 과잉, 대량소비에 지쳐 있습니다. 현대미술에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그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오브제를 새로 만들기보다는 소재를 줄이고 덜 만들어 주변 공간을 새롭게 열어 보임으로써 사람들이 작품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서로 다른 상상과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간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주제입니다.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 제목은 몰라도 신기하다는 느낌만 받아도 됩니다.”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궁내에 다른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과 함께 작가를 따라 궁전 본관 후문을 나서자 궁금증이 풀렸다. 프랑스 평론가 미셸 누리자니, 일본 전시기획자 시미즈 도시오, 조각가 심문섭씨, 재불 사진작가 염중호씨, 표미선 한국화랑협회 회장, 김복기 월간 <아트 앤 컬처> 대표 등 미술계 인사 30여 명이 동행했다.

계단 아래 아득히 펼쳐진 정원과 인공 운하로 이어지는 언덕에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아치가 솟아 있었다. 길이 33m, 폭 30cm의 스테인리스 판을 아치 모양으로 구부리고 양옆에 커다란 돌덩이를 배치한 후 가운데 길이 2.6m, 폭 1.4m의 철판을 깐 이번 전시의 대표작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였다.

“나는 항상 하늘을 비껴 우뚝 선 무지개처럼 큰 도로 위에 아치를 만들어 그 아래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별을 만들어 사막의 밤처럼 별들이 아치 위로 내려앉아 속삭이도록 하고 싶었어요.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적인 정원과 역사적인 숲에 둘러싸인 이 넓은 공간에서 나의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돼 정말 기쁩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가르며 풍경에 미묘한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 강철 아치로, 하늘의 별은 돌로 지상에 내려온 셈이다. “언제 어디서나 문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그의 말대로 뭉게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 그 아래 10㎞ 이상 좌우 대칭으로 펼쳐진 여의도 크기의 바로크식 정원과 숲, 물이 찰랑대는 운하와 양옆으로 도열한 조각상들이 아치가 만든 ‘반구형 액자’ 속에 완전히 새로운 풍경으로 들어와 앉았다.

이번 초대전에 전시된 작품들은 돌과 철판을 소재로 한 ‘관계항(Relatum)’ 연작 총 10점이다. 작품 속의 돌은 수만 년 전부터 있었던 자연을, 철판은 문명화된 산업사회를 상징한다. 작가는 방문자들의 동선을 고려해 정원을 거닐며 작품을 보고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궁 내부의 1점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9점을 모두 정원에 설치했다. 시소나 지렛대를 연상케 하는, 높이 1.8m의 돌덩어리와 쇠막대기로 만들어진 <거인족의 지팡이>가 아이들의 눈높이로 가족 관람객에게 다가간다면, 길이 5m, 폭 1.5m의 구불거리는 수평·수직의 철판 20개를 풀밭 위에 홑이불처럼 널어놓은 <바람의 눈물>은 하늘과 구름을 품어 안았다. 궁전 앞 정원 중심축을 따라 양쪽으로 펼쳐진 정원과 인공 숲으로 조성된 미로의 이곳저곳에 배치된 그의 작품들은 방문객들에게 ‘숨은 보물찾기’를 제안한다. 

베르사유 궁은 2008년부터 제프 쿤스를 시작으로 매년 세계적 작가를 선정해 전시회를 열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역사적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차원에서다. 생존 작가에게 최고의 영예인 이 전시회에 대해 작가는 “이만한 규모로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기회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고백할 만큼 모든 것을 전시에 쏟아부었다. 지난해 초 초대작가로 선정된 이후 50번이 넘게 현장을 다녀갔고 작품의 소재인 돌덩이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 알프스를 넘나들었다.

“베르사유에서 보기 힘든 가장 모험적인 전시”

베르사유 정원의 나무와 풀들은 자를 대고 잘라 원뿔·직육면체 등의 기하학적 도형을 연상케 해 인공미의 극치로 불린다. 하지만 일반에 개방하지 않았던 언덕 중간 비밀의 숲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듯 풀과 나무들이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작가가 숲 한쪽 공터에 지난 3월 뿌린 씨앗이 싹을 틔워 자라나는 중이었다. 이 숲 한가운데 녹슨 철판을 세워 만든 둥근 울타리 안에 흰 돌들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돌덩어리를 배치한 설치물 <별들의 그림자>에 평론가들의 찬사가 모아졌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돌들의 그림자를 고려한 배치였다. 누리자니는 “무한과 관계, 자연과 우주의 본질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작가는 자신의 철학을 베르사유 공간에 담아내면서도 새로운 울림을 더했다”고 말했다. 

350년 전 천재 정원 설계사 앙드레 르 노트르는 “언덕 위 궁전 발코니에서 온 누리를 굽어볼 수 있는 좌우 대칭의 정원을 만들라”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의 명을 받아 여의도 넓이의 늪지대에 철저하게 계산된, 완벽하게 기하학적이고 건축학적인 정원을 설계했다. 이 작가는 르 노트르가 구현한 정교하고 완벽한 세계에 동양적 사유에 바탕을 둔 ‘여백의 미학’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 듯하다. 두 시간에 걸친 작가와의 베르사유 산책은 아폴론 분수 앞에 네모나게 구덩이를 파고 돌덩이를 안치한 <무덤-르노트르를 위한 오마주>로 끝났다.

프랑스 르몽드는 6월12일자에서 “돌과 철판으로 된 그의 작품은 장소 위에 군림하거나 정복하지 않는다. 대신 풍경에 삽입되면서 기존에 잘 알려진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새로움을 던져준다. 이번 전시는 베르사유에서 보기 힘든 가장 모험적이고 시적인 영감을 창조하는 전시의 대표로 기억될 것이다”라는 평을 실었다. 이번 전시는 11월2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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