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의 기도, 얼어붙은 대륙 녹이나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4.08.1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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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권위 부정하는 중국에 러브콜 보내는 프란치스코

3월16일 중국 상하이(上海) 시 외곽의 아파트에서 한 신부가 향년 9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그의 이름은 판중량(范忠良). 중국 가톨릭의 지하교회를 상징하는 신부 중 한 명이었다. 판 신부는 1951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 바티칸 교황청이 타이완 정부와 수교하자, 한평생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중국 내 모든 가톨릭 신부와 신자에게 바티칸과의 관계 단절을 명령했다. 판 신부는 이에 불응해 1955년 중국 당국에 체포됐다. 그는 ‘반혁명’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아 서부 오지 칭하이(靑海)성의 노동교화소에서 복역했다. 이 기간 동안 판 신부는 시신안치소에서 일하며 살아 있는 신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대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판 신부는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뒤에야 풀려났고 상하이로 가서 지하교회를 이끌었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판 신부의 공로를 인정해 주교로 서품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세운 천주교애국회(天主敎愛國會)는 이 서품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국은 판 주교를 가택에 연금했다. 오랜 징역과 연금에 시달려야 했던 판 주교는 몇몇 사제와 신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영면했다.

중국에 가톨릭이 전래된 것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나라 태종 때 가톨릭의 이단 종파인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들이 포교를 위해 중국에 들어왔다. 한때 외국 종교라는 이유로 퇴출됐던 가톨릭은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중국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시 중국 포교에 앞장선 단체는 예수회였다. 특히 이탈리아 출신 마테오 리치는 명나라 황실의 고문이 될 정도로 큰 환영을 받았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과 민간 풍속에 가톨릭 교리와 의식을 결합시켜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날로 확장하는 ‘양교(洋敎)’에 사대부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호칭과 제사 문제를 두고 벌어진 전례(典禮) 논쟁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바티칸 대신하는 어용 교단 설립

청나라 초기 뒤늦게 중국에 온 도미니코 선교사들은 예수회의 중국화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두 선교회의 전례 논쟁은 1704년 교황 클레르몽 11세가 도미니코가 옳다고 판결하면서 일단락됐다. 이 판결에 강희제는 격노했고,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고 내정을 간섭한다는 이유로 포교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중국에서 가톨릭은 ‘반중국적’ ‘비애국적’이라고 매도돼 탄압받았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은 강력한 선교의 자유를 얻어냈다. 수백 명의 가톨릭 신부가 중국에 앞 다퉈 들어와 선교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강희제 때 몰수됐던 교회 재산을 강압적으로 회수하면서 큰 민폐를 끼쳤다. 일부 신부는 신도와 일반인이 충돌할 경우 치외법권이란 특권을 앞세워 무조건 신도를 비호했다. 이런 그릇된 선교 방식은 반(反)가톨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폭발하면서 도처에서 성당이 불살라졌고 수많은 신부와 신도가 피살됐다.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가톨릭은 중국에서 점차 번성해갔다. 1900년 70만명이었던 신도는 1920년대 200만명을 넘었다. 그러나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가톨릭은 또다시 긴 고난의 여정을 걸어야 했다. 특히 1951년 중국과 바티칸이 외교 관계를 단절하면서 중국인 신부와 신도는 온갖 박해를 당했다.

판중량 주교와 더불어 궁핀메이(?品梅) 추기경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 이를 상징한다. 궁 추기경은 20대에 신부가 되어 오랜 사목 활동 끝에 1950년 상하이 교구의 주교로 서품됐다. 1956년 중국 당국에 체포된 후 ‘반혁명’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무려 30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다.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비밀리에 추기경으로 서임됐는데, 이는 중국 내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추기경이었다. 궁 추기경은 바티칸의 호소와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1986년 석방됐지만, 가택연금을 당하며 감시를 받았다. 1988년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해서야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됐다. 하지만 궁 추기경은 2000년 미국에서 선종할 때까지 조국 땅을 다시는 밟지 못했다.

관계 단절 이전에 중국 가톨릭에는 20개 대교구(敎區)와 92개의 일반 교구가 있었다. 여기에 교황 직속 관리구인 대목구(代牧區)와 관리구도 각각 29개, 2개에 달했다. 가톨릭은 교황을 정점으로 한 바티칸 교황청이 세계 각국의 주교 등 종교직을 서품한다. 중국 정부는 이런 교황의 권위를 무시하고 1957년 ‘어용(御用)’ 천주교애국회를 설립했다. ‘자선자성(自選自聖)’ 원칙을 내세우며 주교를 독자적으로 임명하며 모든 경신례(敬神禮)는 천주교애국회 소속의 성당에서만 이뤄진다. 미사도 바티칸과는 다른 라틴 방식으로 봉헌한다. 이런 당국의 지시에 불응하거나 저항하면 체포돼 감금당하거나 고문 등 혹독한 탄압을 받는다. 2012년 7월 주교 서품식에서 “나는 주교로서 모든 삶을 바치기 위해 천주교애국회의 일원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마다친(馬達欽) 보좌주교가 대표적이다. 마 주교는 서품식을 가진 다음 날 당국에 체포된 후 상하이의 한 신학교에 연금됐다. 같은 해 12월에는 주교직도 박탈당했다. 지금도 일주일에 3차례 공산당 정치 교육을 받으며 핍박받고 있다.

프란치스코 “중국인은 위대한 민족”

그동안 중국과 바티칸은 관계 정상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2010년에는 수교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바티칸이 타이완과의 단교를 끝까지 반대하면서 무위로 끝났다. 지난해 3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 미사에 마잉주(馬英九) 타이완 총통이 참석해 관계가 악화됐다. 현재 전 세계에서 중국을 대신해 타이완과 외교 관계를 맺은 국가는 바티칸을 포함해 모두 23개국으로, 유럽에서는 바티칸이 유일하다.

그러나 지난 3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을 공개하면서 이목을 끌었다. 교황은 이탈리아 ‘코리에레 델레 세라’와의 인터뷰에서 “교황이 된 지 3일 후 시 주석에게 편지를 썼고 그도 내게 답장을 보내왔다”며 “중국인은 위대한 민족이고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교황이 취임 후 중국을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6월 교황청의 한 고위 인사는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를 통해 “바티칸은 중국이 회담 장소와 시간을 확정하길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팡싱야오(房興耀) 천주교애국회 주석도 “중국은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희망하고 있다”며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말했다. 만약 회담이 성사된다면 2010년 이후 양측이 처음 만나게 된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중국 내 가톨릭 신자는 570만명이다. 하지만 지하교회 신자까지 합치면 1200만명이 넘는다. 지하 교회는 로마 교황청을 따르며 중국 정부의 폐쇄 대상이다. ‘가톨릭 개혁의 아이콘’ 프란치스코 교황이 중국 대륙에서 직접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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