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지옥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었다
  • 이규대·조해수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08.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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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일병 ‘폭행 33일’ 범죄의 재구성…철저히 고립된 곳에서 인권 유린

육군 제28보병사단 소속 윤 아무개 일병(20)이 선임병들로부터 구타 및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사망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는 말이 회자될 만큼 가해자들의 범행 수법은 잔인무도했다. 윤 일병은 기본권을 철저히 유린당한 끝에 목숨을 잃었다. 사고 이후 석 달이 지난 시점에 뒤늦게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군의 사건 은폐·축소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시사저널은 이 사건의 실체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입수했다. 사망 사건 발생 후 약 한 달이 지난 5월2일, 28사단 보통검찰부가 작성한 공소장과 내부 보고서다. 이 문건들에는 사건 가해자들이 윤 일병에게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가 구체적인 시간·장소와 함께 적시돼 있다. 더불어 윤 일병의 사망 배후에 끔찍한 인권 유린이 있었음을 최초로 고발한 군 인권센터의 브리핑, 관계자 발언 등을 종합해 사건을 세 개의 각도에서 재구성했다. 윤 일병을 죽음으로 몰아간 4월6일 당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대 전입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윤 일병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의 병영 부조리 속에서 고통받았는지, 마지막으로 윤 일병 개인이 처했던 심리적 고립 상태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다.

ⓒ 일러스트 오상민
이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보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분명하다. 윤 일병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뎌내기 힘들었던, 너무나도 끔찍한 인권범죄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33일간의 공포 속에서 윤 일병의 손을 잡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4월6일 그날,

윤 일병 사망 직전 ‘16시간’의 재구성  

오전 7시30분, 윤 일병의 뺨에 불꽃이 일었다. 이 아무개 병장(25)의 손바닥이 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손찌검은 두 대 세 대 이어졌다. 허벅지에도 서너 번 발길질이 퍼부어졌다. 이유는 ‘잠’이었다. 간밤에 윤 일병이 눈을 붙였기 때문이다. 이 병장은 잠들기 전인 새벽 2시, 윤 일병에게 잠을 자지 말고 앉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선임병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윤 일병은 간밤에 ‘수면 금지’를 지시받기 두 시간 전에도 구타를 당했었다. 질문에 대답을 잘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선임병 넷이 함께 때렸다. 이 아무개 상병(20)이 망을 봤다. 분대장 하 아무개 병장(21)이 뒤에서 윤 일병의 팔을 잡았다. 이 병장이 때렸다. 배를 6대 걷어찼다. 지 아무개 상병(20)도 때렸다. 발로 배를 3~4대 가격했다. 가해자들은 폭행 과정에서 윤 일병의 러닝과 팬티를 찢고 갈아입히는 일을 수차례 반복했다. 윤 일병은 저항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수면 금지’를 지시받기 40분 전엔 아까 망을 봤던 이 상병이 주먹으로 배를 두 번 쳤다.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새벽 2시가 지나고 선임병들이 모두 잠든 후에야 하루 분의 폭력이 겨우 끝났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새로운 하루 분의 폭력이 다시 시작된다. 

일요일인 4월6일도 마찬가지였다. 폭력에는 휴일이 없었다. 오전 7시50분, 이 병장이 다시 윤 일병을 불렀다. 간밤에 잠을 잤다며 때린 지 불과 20분이 지났을 때다. 이 병장이 손바닥을 들었다. 뺨을 서너 대 쳤다. 이 상병과 지 상병을 불렀다. 윤 일병을 때리라고 지시했다. 지 상병이 엎드려뻗친 윤 일병의 양 허벅지를 20여 차례 발로 찼다. 아침 뜀걸음 중 뒤처져 꾀병을 부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항상 그랬다. 모든 폭력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목소리가 작다고 때렸다. 행동이 느리다고 때렸다. 묻는 말에 대답을 못했다고 혹은 잘못했다고 때렸다.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선임병들을 무시한다고, 군기가 빠졌다고 때렸다.

오전 9시, 분대장인 하 병장이 손바닥과 발로 윤 일병의 뺨과 가슴을 쳤다. 목소리가 작고 행동이 느리다는 이유에서다. 얼차려를 시작했다. 분대장으로서 분대원의 기강을 잡는다는 명목이었다. 약 1분씩 다섯 번 ‘기마 자세’를 강요했다. 괴로워하는 윤 일병에게 “다리를 펴지 말라”며 윽박질렀다.

오전 10시, 다시 이 병장이 윤 일병을 때렸다. 묻는 말에 대답을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발로 왼쪽 허벅지를 4차례 걷어찼다. 생활관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윤 일병에게 핥아먹으라고 지시했다. 이 병장은 10시10분쯤 윤 일병에게 액체 안티푸라민을 짜주며 성기에 바르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오후가 됐다. 폭력 및 가혹행위는 더욱 잔인해졌다. 하 병장이 윤 일병을 보며 “기운이 없고 몸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하자 이 병장은 이 상병, 지 상병에게 수액 주사를 놓도록 지시했다. 의무반 소속 병사들이 냉동식품으로 회식을 하던 오후 4시쯤 폭력은 절정에 달했다. “어리바리해서 군기를 잡을 목적으로” 윤 일병의 입을 강제로 벌려 냉동식품을 먹였다. 토해낸 음식은 스스로 핥아먹게 했다.

집단 구타가 이어졌다. 이 병장이 먼저 주먹을 들었다. 윤 일병의 배와 턱을 쳤다.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한다며 뺨을 두 대 쳤다. 쓰러진 윤 일병에게 정신 차리라며 다시 뺨을 때린 후, 주먹과 발로 배를 연신 가격했다. 다른 선임병들도 동조했다. 이 병장이 때리기 힘들다며 지 상병에게 대신 폭행하라고 하자, 지 상병은 윤 일병을 엎드려뻗쳐 시킨 뒤 발로 배를 때렸다. 하 병장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때렸다. 이 상병은 물통을 던지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등 얼굴과 가슴 등을 수차례 폭행했다.

음식물을 쩝쩝거리며 먹는다고, 대답을 늦게 했다고, 입안의 음식 때문에 대답을 잘 못한다고, 정신을 못 차린다고, 형이라 부르며 편하게 하라고 하니 반말을 했다고, 동작이 느리고 목소리가 작다고, 윤 일병은 맞고 또 맞았다. 냉동식품 회식을 전후한 두 시간여에 걸쳐 360차례 이상 구타가 계속됐다. 결국 사달이 났다. 갑자기 윤 일병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소변을 쏟으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끝내 윤 일병은 감은 눈을 다시 뜨지 못했다. 온몸을 뒤덮은 시퍼런 멍과 검붉은 상처 자국이 그가 겪은 끔찍한 고통을 증명할 뿐이었다.

8월4일 육군이 공개한 윤 일병 사망 사건 현장검증 사진. ⓒ KBS 화면 캡처 ⓒ 연합뉴스

자대 배치 이후 사망까지,

‘33일’의 재구성

윤 일병에게는 4월6일 같은 하루가 33일 동안 반복돼왔다. 2월18일 자대 전입 후, 2주간의 대기 기간이 끝난 3월3일부터 구타 및 가혹행위가 시작됐다.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선임병들은 윤 일병의 얼굴·배·가슴·턱·허벅지 등을 수시로 때렸다. 범행은 주로 의무반 생활관 안에서 일어났다. 의무창고, 의무실, 영내 도로 등에서도 폭력행위가 있었다. 윤 일병은 의무반이라는 극도로 폐쇄된 생활공간 안에서 주먹과 손바닥으로, 발길질로, 때로는 마대자루와 확성기 등으로 구타당했다.

이 병장은 윤 일병을 향해 가장 잔인하면서도 빈번하게 폭행을 일삼았던 주범이다. 이 병장은 휴가 기간인 3월17일부터 25일까지를 제외하고는 매일 윤 일병의 뺨을 두세 대씩 때렸다. 휴가를 가는 3월17일 새벽에는 윤 일병이 약 3주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될 정도로 잔혹하게 구타했다. 3월27일 저녁에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다리를 고의로 절룩거린다는 이유로 2시간에 걸쳐 가슴을 30~40회, 허벅지를 10~15회 폭행했다. 자신이 직접 때리든 후임병을 시키든, 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윤 일병을 때리고 기합을 주었다.

의무반 안 폭력의 질서는 흡사 조직폭력배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명확한 위계 서열을 따라,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전염되며 확산됐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 병장은 주요 선임병들을 “나의 좌뇌와 우뇌” “내 칼자루” 등으로 부르며 폭력행위를 독려했다. 선임병들은 이 병장의 지시를 충실히 행동으로 옮겼다. 자신의 의지로 직접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신보다 권력 면에서 하위에 있는 병사에게 다시 폭력을 지시하기도 했다. 한 예로 지 상병은 이 상병으로부터 “윤 일병을 구타를 해서라도 교육하라”는 지시를 받고 충실히 이행했다. 3월21일부터 사망 당일까지 이틀 주기로 윤 일병의 안면부를 3~5대씩 때렸던 것이다.

가해자들은 끔찍한 가혹행위로 윤 일병의 기본권을 짓밟기도 했다. 취침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4월1일부터 3일까지는 아예 잠을 재우지 않았다.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취침 시간이 시작되는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주먹과 발로 얼굴과 가슴을 하루 50여 회씩 때렸다. 이후 기상 시각인 6시 전까지는 기마 자세, 앉았다 일어서기, 양반 자세로 앉아 있기 등을 강요하며 잠을 재우지 않았다. 이 병장은 지 상병 및 하 병장에게 이를 감시하도록 하거나 본인이 수시로 일어나 직접 감독했다. 치약을 윤 일병의 입에 짜 넣고 삼키도록 강요하는 일, 기마 자세로 1~3시간 동안 서 있게 하는 등의 가혹행위도 수시로 가해졌다.

가해자들에게 연민은 없었다. 고통받는 윤 일병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기며 즐거워했다. 3월 말 이 상병과 지 상병은 주범 이 병장의 폭행으로 다친 윤 일병의 허벅지를 계속 찌르며 괴롭혔다. 반응이 웃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지 상병은 퉁퉁 부어 형체가 사라진 윤 일병의 무릎을 보며 “무릎이 사라졌네. XX 신기하다”며 가혹행위를 계속했다. 3월23일에는 전투화를 손질 중인 윤 일병이 허벅지와 무릎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것을 보고 어깨를 눌러 억지로 앉힌 뒤,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20회 찌르며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윤 일병 ‘심리적 고립’의 재구성

 

입대 전 윤 일병은 몸이 허약한 편이었다. 지병은 없었지만 체중이 50kg대일 정도로 왜소한 체형이었다. “군 생활을 통해 몸을 튼튼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 그의 각오였다. 간호학과를 휴학하고 입대한 윤 일병은 의무병으로 복무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자신의 전공 및 진로와 관련해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만큼 윤 일병에게는 군복무를 성실히 수행하려는 각오가 있었다. 하지만 끔찍한 병영 부조리는 청년의 꿈을 짓이겨놓은 뒤 끝내 그의 목숨마저 거두어갔다.

윤 일병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인권 침해를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했다. 폭행 경위를 조사해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지휘관에게 보고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했어야 할 의무지원관 유 아무개 하사는 오히려 폭력을 방조·가담했다. 의무반 소속 11명의 동료병사 중 윤 일병의 인권 침해 실태를 신고한 이는 없었다. 맞선임인 이 아무개 일병(20)은 4월5일 이 병장으로부터 “맞선임인 네가 관리하라”며 질책을 받자 주먹으로 윤 일병을 때렸다. 의무반 안에서 윤 일병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등 외관상 구타를 의심해볼 징후가 뚜렷했음에도 윤 일병을 구해줄 이는 없었다. 오히려 부대 안에는 윤 일병을 향한 비상식적 폭력을 묵인·방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4일 의무지원관 유 하사는 연병장 응급처치 교육 당시 부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윤 일병의 머리를 확성기로 내리쳤다. 행동이 느리다는 게 이유였다. 교육에 참석한 44명의 병사들 중 윤 일병이 폭행당한 사실을 보고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3월 중순 이후 포대장 김 아무개 대위, 대대장 임 아무개 중령이 기록한 면담 결과를 보면 윤 일병은 ‘현재 잘 적응 실시 중에 있으며, 선임들이 착하고 잘 챙겨줘서 아픈 곳도 힘든 것도 없이 임무 수행 중이라고 함’ ‘구타 가혹행위와 내부 부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이라고 돼 있다. 지휘관에게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보고할 경우 발생할 불이익을 우려한 결과로 보인다.

자대 전입 후 윤 일병과 가족들의 접촉은 전무했다. 가족들은 윤 일병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윤 일병의 군 생활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아들로부터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무반 생활관과 가까운 복도 한편에 공중전화기가 있다는 사실, 편지 등을 통해 자신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알릴 수도 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윤 일병의 사생활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으로 통제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윤 일병은 3월28일 부대 개방 행사 당시 부모 면회를 희망했다. 선임병들과 의무지원관 유 하사는 이를 연기할 것을 반강제적으로 권유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윤 일병의 모습을 부모가 보게 되면 폭행 사실이 드러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의 증거 인멸 시도로 곳곳이 찢겨져나간 윤 일병의 수첩에는 ‘4월11일’이라는 날짜, ‘면회 or 외박’ ‘대대 확인’ ‘행정반’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3월27일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로, 4월11일에 가족 면회 또는 외박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윤 일병은 끝내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33일 동안 구타 및 가혹행위가 반복되는 동안, 사망 직전 쏟아진 360여 차례 구타로 신음하는 동안, 그를 ‘생지옥’에서 구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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