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길목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한다
  • 김수지│역사연구가 ()
  • 승인 2014.08.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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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 역사 기록과 유사 이순신, 13척으로 왜선 133척 수장

영화 <명량>에 대한 감동이 진정되면 관객은 “영화가 정말 사실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선조 30년(1597년) 9월 전남 진도군 울돌목 일대에서 벌어졌던 실제 명량대첩은 영화 <명량>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영화가 사료(史料)를 그대로 모사할 필요는 없다는 상식을 가지고 몇 가지 확인해보자.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배와 왜선은 각각 몇 척이었을까. 조선 수군은 13척이었다. 원균의 패배 이후 선조가 조선 수군을 해체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나중에 한 척이 더 추가됐다. 왜군의 선박 수는 정확하지 않다. 기록에 따라서 200여 척에서부터 333척까지 제각각이다. 그러나 조선 수군 13척이 왜선 133척을 수장시킨 것은 사실이다. 133척은 당시 왜군 함대의 선단 구성에서 나온 숫자다. 명량해협 안으로 들어온 왜군 함대는 적장 4명이 지휘한 4개 함대였는데 1개 함대가 33척 또는 34척으로 구성됐으니 133척은 정확한 척 수에 가깝다.

근대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 ⓒ 시사저널 포토
또 선조 30년 11월10일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승전 보고 장계에 ‘적의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오기에’라는 말이 나오니 직접 전투한 왜선은 130여 척이 맞다. 적선 133척이 전멸당했다는 것은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나오는 ‘적선 중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던 것은 겨우 10척이며 우리 배는 모두 무강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133척은 전멸했고 후방에서 지켜보던 배는 도주했다는 말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일부당경 족구천부”

당시 해전의 승패를 결정지은 핵심 사안 중 하나는 조선의 주력선 판옥선(板屋船)과 왜군의 안택선(安宅船)의 차이였다. 판옥선은 소나무와 참나무 못을 이용해 만들어서 바닷물에 잘 썩지 않고 견고했다. 반면 왜군의 안택선은 얇은 삼나무로 만들었고 쇠못을 사용했기 때문에 부식이 잘돼 가벼운 충격에도 완파되기 쉬웠다. 조선 수군이 당파(撞破·부딪혀서 깨뜨림) 전술을 쓸 수 있었던 이유다.

이는 무기의 차이로 연결된다. 안택선은 얇은 재질 때문에 애초부터 포를 장착할 수 없었다. <선조실록>(선조 29년 6월26일) 기사에는 ‘왜선은 얇기 때문에 함선에 대포를 장치할 수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왜는 포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던 대신 서양의 포를 수입하거나 아니면 조선의 포를 약탈해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포를 장착할 수 없었고 장착한다고 해도 포를 쏘면 그 반동으로 배가 파손될 정도였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다. 안택선과 달리 조선의 판옥선은 견고했고 배 밑바닥이 평평해 흘수(배가 물에 잠겨 있는 깊이)가 얕았다. 흘수가 얕으면 방향을 선회하는 데 부담이 적다. 판옥선의 바닥엔 노꾼이 대략 110명 있었고 그 위층에 포를 장치하고 전투원이 승선했다. 원거리에서 왜군의 안택선을 조준해 포격할 수 있었는데, 배의 전후좌우 4면 모두에 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360도 회전하는 동안 어느 각도에서나 포를 쏠 수 있었다. 안택선을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배 밑바닥의 노꾼과 위층 포격수의 일심동체적 협조가 중요했다.

임진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거북선은 총 3척이었다. 거북선은 맨 앞에서 적진 깊숙이 돌격하는 돌격대였지만 원균의 칠천량해전 대패 때 모두 불탔다. 거북선이 남아 있었다면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을 좀 더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명량해전의 대승은 이순신 장군의 철저한 준비와 신념에 찬 전술 운용 덕분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하러 가는 길은 흩어진 무기와 식량과 군사를 수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 <명량>에 나오는 것처럼 승군(僧軍)도 모집했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정유년(1597) 8월8일에 승려 혜희(惠熙)에게 의병장 사령장을 주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이순신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적을 울돌목으로 유인해 싸울 전략을 세웠다. 정유년 9월15일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이순신은 척후병을 통해 적이 조선 수군을 격멸하고 나면 곧장 서울의 한강으로 진격한 뒤 육군과 합류해 서울을 재점령하려 한다는 계획을 알게 됐다. 이순신은 왜군의 이런 수륙병진책을 역으로 이용했다. 왜군이 수륙병진책을 쓰기 위해선 지름길인 울돌목을 지나는 것이 일본군에 유리한 것인 양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이순신은 울돌목에서 4.7㎞ 떨어져 있는 벽파진에서 8월29일부터 9월15일 밤까지 정박하면서 왜군을 유인했다. 조선 수군은 왜군에게 일본군이 지나가지 못하게 울돌목의 입구인 벽파진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순신 함대는 벽파진에 정박해 있는 동안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모두 4차례나 적의 기습을 받았다. 이순신은 4차례의 기습을 모두 격퇴시키면서 수군 장병의 사기를 수습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 ⓒ 문화재청 제공
이순신함 홀로 왜선 수십 척과 1시간 악전고투

명량해전 전날인 9월15일 이순신은 모든 장수를 모아놓고 이렇게 당부한다. “병법에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요,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한 사나이가 오솔길 목을 지키면 능히 천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라고 한 것은 지금 우리 처지를 말한 것이다. 너희가 내 명령을 위배하면 군법으로 처단하고 추호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완전히 어두워진 밤 8시 이후 조선 수군 13척은 극비리에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우수영리)으로 이동한다. 운명의 결전일인 9월16일 낮 12시쯤 벽파진을 지나 울돌목으로 들어온 왜군 함대와 울돌목을 앞에 둔 이순신함대가 마주한다. 이순신함대 13척이 일렬로 전개할 수 있는 수역의 폭은 불과 120m였고, 적선 133척이 들어오는 수역의 폭은 400여 m였다. 싸울 장소는 이순신이 정했지만 시간까지 정할 수가 없어 조류는 조선군에 불리한 역류가 흐르는 시점이었다. 이순신이 탄 배를 영화에서는 대장선이라고 부르는데 이 배는 다른 배보다 1.5배 정도 크고 포와 전투병도 그만큼 더 많았다. 이순신함은 닻을 내려 역류에 배가 흘러가지 않게 고정시키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배는 400m 폭의 수역을 가득 채운 적선의 위세에 놀라 닻을 올려 배들이 조류에 흘러가게 했다. 영화 <명량>은 당일 전투 상황을 대체로 〈난중일기〉에 나온 대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함 홀로 수십 척의 적선을 맞아 포위된 상태로 악전고투했던 상황은 사실이다. 포위당한 수군이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하자 이순신은 병사를 독려하면서 지자·현자총통 같은 모든 포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나머지 12척의 배는 멀리 떨어진 채 대장선의 악전고투를 보고만 있었다.

이런 상황은 역류였던 조류가 조선군에 유리한 순류로 바뀌는 오후 1시쯤까지 이어진다. 역류가 순류로 바뀔 무렵 이순신은 초요기를 올리고 나발을 불면서 수하 장수를 불러모은다. 안위의 배가 먼저 달려오고 뒤이어 김응함의 배가 왔다. 안위의 배에 왜군이 오르기 시작해 사투가 벌어졌다. 이순신은 안위와 김응함을 질타하면서 전투를 독려하고 안위의 배를 포위한 왜군 배를 포격으로 물리친다. 명량해전에서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함이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홀로 울돌목을 지켜내면서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부하 장수에게 했던 “일부당경 족구천부”가 사실임을 온몸으로 입증했던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것은 실로 천행’이라고 썼지만 명량해전이야말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실천으로 웅변한 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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