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찌질하다면 “족구하라고 해!”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4.08.2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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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등장한 경쾌한 청춘영화 <족구왕>

지난해 화제의 독립영화 한 편이 부산국제영화제를 강타했다. 관객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범상치 않은 영화가 나타났다는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얼마 전인 8월 초 열렸던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도 관객의 성원은 이어졌다.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기만 하면 관객이 먼저 열광하는 화제작의 제목은 <족구왕>. 범상치 않은 이름만큼이나 놀라운 재미로 꿈틀대는 이 영화는 급기야 여름 대작 한국 영화의 틈바구니에서 주목해야 할 ‘인디버스터(인디영화와 블록버스터의 합성어)’로 떠올랐다.

<족구왕>은 패기 넘치는 영화다. 복학생의 영원한 추억거리지만 이제는 한물간 유행인 ‘족구’를 다룬 것 자체가 일단 그렇다. 오늘날 대학 캠퍼스에서 족구는 그야말로 푸대접의 대상이다. 극 중 한 여학생의 앙칼진 대사에서도 족구가, 더 정확히는 족구하는 복학생이 처한 슬픈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자가 족구하는 복학생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요?” 이 때문에 극 초반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웬만한 욕보다 더 치욕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족구하고 앉아 있네.” 한데 영화를 보다 보면 촌스럽게 바지를 걷어 올려붙이고 땀 흘리며 족구하는 대학생의 모습에 자꾸 묘하게 빠져든다. 게다가 크게 세 번 놀라게 되기도 한다. 빤한 것 같은데 신선해서, 웬만한 코미디보다 더 재미있어서, 뜻밖에 족구 경기가 몹시 박진감 넘쳐서.

ⓒ 상상마당 제공
학적과 취업에 가위눌린 청춘

주인공은 몸짱이나 얼짱이라는 단어와는 수억 광년쯤 떨어져 있는 듯 푸근한 겉모습을 자랑하는 만섭(안재홍)이다. 그는 군대에서 ‘족구왕’으로 이름을 날리다 제대해 갓 복학했다. 학교에 돌아온 만섭의 꿈은 소박하다. 좋아하는 족구를 실컷 하고 연애도 했으면 한다. 학점 관리며 취업 준비에 정신없는 학생들은 이런 만섭을 외계인 취급한다. 그들에게 족구는 찌질한 복학생의 전유물이자 학업 분위기나 망쳐놓는 몹쓸 놀이일 뿐이다. 같은 기숙사 방을 쓰게 된 선배 형국(박호산)은 학점도 엉망이고 토익 성적도 없는 만섭에게 공무원시험이나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만섭의 대답은 한결같다. “저는 연애하고 싶습니다. 족구를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둘 중 어느 것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만섭은 캠퍼스 퀸카 안나(황승언)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썸남’ 강민(정우식)이 있다. 전직 국가대표 축구선수였으나 지금은 그저 이상한 폼이나 잡고 있는 인물이다.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던 만섭과 강민은 급기야 족구 대결을 벌이고, 여기에서 강민을 누른 만섭은 교내의 슈퍼스타로 떠오른다. 급기야 교내에는 때아닌 족구 열풍이 불어닥친다.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복학생이 학교 여기저기서 우유팩이며 공을 차기 시작한다. 열풍은 교내 족구대회로 이어진다. 만섭은 식품영양학과의 허술한 친구들과 팀을 이뤄 우승을 향해 전진한다. 만섭을 보는 안나의 시선도 왠지 좀 달라진다.

족구로 찌질함을 돌파하다

<족구왕>은 여느 청춘영화처럼 복학·취업·연애와 같은 대학생의 현실을 소재로 끌어왔지만 결코 암울하지 않다. 이 영화에는 고시원이나 도서관에 처박혀 라면만 먹으며 현실을 개탄하는 ‘88만원 세대’의 초라함 대신 청춘의 건강함이 있다. 족구 영웅 만섭으로 인해 서서히 변화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새침데기 같지만 나름 속이 깊은 안나, 다이어트를 위해 다시마만 먹는 비리비리한 복학생 창호(강봉성), 족구에 재주는 딱히 없는 것 같지만 먹성만큼은 끝내주는 미래(황미영), 촉망받는 축구선수였지만 지금은 슬픔에 잠겨 살고 있는 강민,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뒤로하고 공무원시험에만 매달리는 형국까지. 이들은 모두 홀연히 나타난 만섭 그리고 족구로 인해 자신이 청춘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용기가 있는지, 사람들의 시선에 필요 이상으로 얽매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젠가 지금을 돌아봤을 때 후회 없이 젊음을 누리고 있는지.

우문기 감독은 현실을 진지하게 비판하는 영화는 찍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지금 대학생에게 취업에만 매달리는 대신 남 눈치 보지 말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메시지는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주인공이 족구왕이 아니라 스타크래프트왕이나 통기타왕이어도 크게 상관없었지만 족구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감독의 연출 의도다. 영화 전체의 톤이 그렇기도 하지만, 족구 토너먼트 경기는 만화 같은 상상력이 빛나는 장면의 연속이라 웃음을 참을 방도가 없다. 동시에 은근히 비장하고 박진감 넘치기도 하는데, 이는 이 영화에 참여한 김선간 무술감독이 실제 족구선수 출신인 덕분이다. 안재홍을 비롯한 배우들은 촬영 한 달 전부터 족구 집중 훈련을 받았다. 복학생의 교내 경기라고 우습게 보면 큰코다친다.

이 영화에는 ‘쌍둥이킥’과 같은 입이 떡 벌어지는 전문 기술도 등장한다. <피구왕 통키> <축구왕 슛돌이> 같은 어린이 만화에 열광했던 사람이라면 그 시절의 향수를 물씬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 동아리 부원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야단스러운 소동과 성장을 담아내는 것은 일본 청춘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워터보이즈>(2001년), <스윙걸즈>(2006년) 같은 작품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제 한국에는 <족구왕>이 있다. 신인 감독의 작품이고, 출연하는 이들도 독립영화계에서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을 뿐, 스타 배우 하나 없다. 그럼에도 <족구왕>은 기분 좋은 에너지와 뜻밖의 감동으로 꽉 차 있다. 우리는 이렇게 건강하고 명랑한 청춘영화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2012년 체코 풋넷 챔피언십 대회에 참가한 전형진씨(왼쪽)와 쌍둥이 동생 휘진씨. ⓒ 이은선 제공
남자들에게 족구만큼 사랑받는 스포츠는 없을 것이다. 학교·직장·공장·군대·야유회·세미나 등 장소 불문, 시간 불문 한국 남자가 끼는 거의 모든 행사에서 족구 경기가 열린다. 그럼에도 족구를 제도권 스포츠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축구의 파생상품(?)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족구는 세계 대회도 있고 2009년 대한체육회 인정 종목이 돼 35만명의 동호인을 둔 생활체육 종목이다. ‘심지어’ 국가대표 선수도 있고 해외 지부도 있다.

전형진씨(21)는 족구에 인생을 걸었다. 쌍둥이 동생 휘진씨와 함께 지난 2012년 체코에서 열린 UNIF(세계풋넷연맹) 챔피언십 대회 2인제 종목에서 4등을 차지했다. 전체 참가 국가는 19개국. 이어 2013년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상위팀 초청 대회 3인조 경기에서 4위를 차지했다. 명실상부한 대표팀 에이스인 것.

풋넷은 유럽에서 행해지는 족구의 사촌. 풋넷의 공은 족구보다 무겁고 1인제·2인제·3인제가 있지만 족구는 4인제다. 차이점이 있다면 족구는 무릎 아래 부위와 목 위 부위를 쓸 수 있지만 풋넷은 팔을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풋넷에서는 족구와 달리 블로킹도 가능하다. 형진씨는 “우리나라에서는 족구 대표선수를 잘 모르지만 유럽에선 지원금도 나오고 전용구장도 있고 관중도 많다. 풋넷이 시스템적으로 더 발전한 것 같다”고 전했다.

한국 족구의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생활 스포츠의 뿌리를 더 단단히 만들었다. 프로 종목을 제외한 유럽의 대다수 구기 종목 선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훈련을 하는 클럽팀 형태다. 한국족구연맹 최강부 16개 팀은 엘리트 선수로 구성돼 있지만 클럽 스포츠 형태로 운영된다. 이들이 활동하는 현대파워텍(서산)·세신버팔로(마산)·이천시청팀 등의 선수는 입사할 때 가산점을 받지만 다른 동료처럼 낮에는 일하고 밤에 훈련한다.

대학 졸업 후에 이런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싶은 형진씨는 대학 진학도 족구와 병행할 수 있는 학교를 골랐다. 한양대 사회교육원 생활체육학과에 다니는 그는 주중에는 그가 속한 클럽 팀인 부천중앙족구단에서 훈련을 하고 주말에만 학교에 나가 공부한다.

족구를 특별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동호회 활동을 통해 족구를 해온 형진씨의 과제는 군 입대다. 동생과 동반 입대 지원을 해서 오는 10월 입대하는 그는 군 생활 중 기량 유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물론 군대 선임이야 최강의 족구 멤버가 오니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지만 세계 챔피언급인 그가 기량 유지를 군대 족구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게 족구 잘하는 비결을 물었다. “비결 같은 것은 없다. 타고나는 재주 그런 것도 없다. 연습만이 살길이다. 부상도 적어 연습 많이 하는 사람이 잘한다.”                                                             김진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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