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탄원서 맡기세요, 87% 감형 보장합니다”
  • 조유빈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4.08.2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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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반성문·탄원서 등 대필 성행 무자격자가 법률기관 제출 서류 대신 쓰면 불법

중국에 시진핑 체제가 들어선 이후 공산당 내부에서는 ‘자아비판’이 강화됐다. 당 간부들에게 ‘민주생활회’라는 집단토론회 때 자신을 비판하게 한 것이다. 이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간부들은 최소 3000자에서 길게는 1만자에 이르는 반성문(자아비판서)을 써야 했다. 홍콩 일간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지난 6월 중국 당 간부들의 반성문을 대신 써주는 대필업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명색이 공산당 간부인 사람이 반성문을 대신 쓰게 한다는 다소 믿기 힘든 보도지만 그만큼 중국 사회에서 대필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중국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대필의 영역이 갈수록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2010년부터 대학 입시나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 대필이 성행했는데 최근엔 연애편지·반성문·탄원서까지 ‘진화’했다.

ⓒ 일러스트 정찬동
과거에는 곳곳에 글을 대신 써주는 ‘대서소’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글을 모르거나 법률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글을 써줬다. 문맹 시대의 소산이었다. 그 대서소가 2000년대를 전후로 대부분 사라졌다. 그리고 10년 후. 문맹자는 거의 없어졌지만 새로운 형태의 대필이 성행하고 있다. 유명인이 자서전을 작가에게 맡기는 경우는 흔하다. 대필을 업으로 삼는 작가들도 생겨났다. 이제 대필은 대서소를 방문해야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화·메일·문자메시지만으로도 충분히 대필을 의뢰할 수 있다. 기자가 대필을 의뢰하고 전달받기까지 그 과정을 따라가봤다.

대필 A4용지 한 장에 3만~5만원

우선 하나의 사례부터 소개한다. 한 남자가 평소 흠모하던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여인은 수차례 거절했지만 남자는 또다시 찾아가 편지를 내밀었다. 오랫동안 알아오면서 함께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긴 장문의 편지였다. 여인의 마음이 움직였다. 카톡을 ‘날리는’ 요즘 시대. 편지를 받고 아날로그적 감성이 발동했을지도 모른다. 여인은 앞으로 잘 만나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 편지는 그가 쓴 것이 아니었다. 대필업체에서 써준 ‘한 장당 3만원짜리’ 편지였다.

연애편지도 대필한다. 심지어 대필업체들은 이혼한 사람들에게 “상대방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며 편지를 맡길 것을 권한다. 일명 ‘재혼편지’다. 어떻게 두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대필업체가 연애편지를 쓸 수 있을까. 인터넷 홈페이지, 개인 블로그나 카페 등에서 ‘대필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자는 한 대필 작가에게 편지를 의뢰했다. 편지의 가격은 보통 A4용지 한 장당 3만~5만원. 의뢰 과정에서 모든 질문과 답변은 메일로만 이뤄졌다.

사이가 소원해진 군인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맡기고 싶다고 하자 대필 작가는 여섯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질문지를 보내왔다. 연애 기간과 처음 만난 장소,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추억, 편지에 넣고 싶은 에피소드 등을 묻는 내용이었다. 서로 소원해지게 된 이유, 특별히 하고 싶은 말도 기재해달라고 했다. 질문지를 보내고 3일뒤, 메일로 의뢰했던 편지가 도착했다. 질문지로 보낸 내용은 편지글에 나름대로 반영돼 있었다. 그러나 의뢰인이 질문지에 적어 보낸 내용을 단순히 정리해 이어붙인 글이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군 폭행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지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리더라” 정도에 그쳤다. 오타와 틀린 띄어쓰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상투적인 표현들도 많았다. ‘성의 없는 편지’였다.

반성문과 탄원서 대필도 대필 작가들의 메뉴로 떠올랐다. 반성문과 탄원서는 법원이나 검찰청에 제출해 선처를 호소하는 글이다. 보통 반성문은 본인이, 탄원서는 당사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3자가 작성해 제출한다. 한 대필 작가에게 “남동생이 폭행사건에 휘말렸다”며 폭행 사건 탄원서를 의뢰했다. 비용은 장당 5만원. 또 다른 대필 작가는 한 장으로는 효과적이지 않다며 2~3장을 쓰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대필 작가는 사건 번호와 사건 제목을 포함한 사건 경위, 담당 검찰 혹은 재판부, 탄원인과 피탄원인의 관계 등을 물어왔다. “봉사활동 기록, 학교생활 기록 등은 필요하지 않으냐”고 묻자 그제야 대필 작가는 “중요한 정보이니 보내달라”고 했다. 모든 걸 기재했을 경우 혹시나 모를 개인정보 유출이 걱정됐다. “담당 검찰이나 재판부까지 꼭 기재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럼 비워둘 테니 제출하기 전에 기재하라”고 했다. 3일이 지난 후 글이 도착했다. ‘존경하는 검사님’으로 시작하는 글은 탄원서 형식을 갖춘, 미사여구를 동원한 글이었다. 글은 ‘선처라는 당근을 줌으로써 더 큰 뉘우침을 이룰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교화는 없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됐다.

법률기관 제출 서류 대필하면 3년 이하 징역

‘업무방해죄’나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할 수 있는 자기소개서 대필과 달리 편지는 계약이나 금전 거래와 관련된 글이 아닌 이상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게 없다. 대학생 이 아무개씨(25)는 “글을 잘 못 쓰는데 여자친구가 편지를 받고 싶어 한다. 기념일에 한 번 (대필 업체를) 이용해볼 생각”이라며 “대필 작가에게 돈을 주는 것만 제외하면 개인적으로 친구에게 부탁해 편지를 쓰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 반성문·탄원서 등 법률기관에 제출하는 서류를 대필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서류를 법무사나 변호사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대필하는 것은 불법이다. 법무사법 제2조에 따르면 법무사의 업무는 ‘다른 사람이 위임한 법원과 검찰청에 제출하는 서류의 작성’이다. 대한법무사협회 관계자는 “탄원서나 반성문은 법무사법 2조 1항에서 규정하는 '법원과 검찰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해당한다. 업무 관여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해당 서류를 대필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고 말했다.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서류를 작성해 제출한다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물론 대필이 아니라 직접 반성문·탄원서를 작성하는 경우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블로그나 카페를 이용해 ‘대필업’을 하는 대필 작가들은 대부분 법무사·변호사 자격증이 없다. 한 대필 작가에게 “법무사나 변호사가 아니어도 탄원서 대필이 가능하냐”고 묻자 “문제가 없다. 대필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또 다른 대필 작가는 “중요한 것은 검사나 판사를 설득할 수 있는지 여부”라며 “탄원서는 법률적 지식보다는 문장력이 중요하다.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가장 저렴한 비용”이라고 홍보하기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무조건 의뢰인을 확보하려는 과장 광고도 문제다. 한 대필 업체는 블로그를 통해 ‘탄원서·반성문 작성 시 감형률 87%를 보장한다’고 광고한다. 소송의 당사자라면 누구나 조금이라도 감형되기를 원한다. 조급한 마음에 탄원서나 반성문을 검색하는 사람들에게 ‘감형률’을 언급하며 비싼 가격에 대필을 의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한 법무사는 “반성문·탄원서를 썼다고 해서 100% 감형되는 것은 아니다. 반성문·탄원서는 법률적 효과가 없기 때문에 감형 여지는 많지 않다”며 “대필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보다는 사건을 납득할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또 “고소장을 쓸 때도 보통 3~4시간씩 두 번 이상 의뢰인과 만나고, 서류를 확인한 후 충분한 대화를 통해 내용을 숙지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법률 문서를 작성할 수 있다”며 대필업체의 간단한 의뢰 시스템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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