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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공장의 맛’이 식탁을 점령하다

식료품 대량 생산 시대…설탕·조미료·라면 시장 전쟁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ㅣ | 승인 2014.09.02(Tue) 15:4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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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산업화는 식생활에도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설탕 대중화는 한국인의 입맛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고려 명종 때 이인로의 <파안집>에 처음 등장하는 설탕은 상류층의 약용 또는 기호식품으로 귀한 약재와 같았다. 1920년 평양에 제당공장이 생겼지만 생산이 미미해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하고 설탕을 생산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식자재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에서 원조 물자로 보내주던 ‘악수표’ 밀가루도 우리 식생활을 바꿨다. 값싼 밀가루의 공급은 라면의 대량 생산으로 이어졌다. 1963년 삼양식품의  전중윤은 5만 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明星食品)의 라면 제조 기술과 기계를 도입해 서울 하월곡동에 공장을 차리고 국산 ‘삼양라면’을 생산했다. 가격은 100g짜리 라면 한 봉지에 10원.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으니 저렴한 간식 같은 주식이었다. 하지만 밥과 국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입맛을 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 처음 나온 라면은 이름 탓에 무슨 ‘섬유’나 ‘실’로 오해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1965년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 덕택에 라면은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대중적 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1966년 연 240만개가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개로, 수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300배에 이르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다.

   
값싼 밀가루 공급으로 라면 대량 생산

당시 정부는 절대 부족한 식량 사정을 극복하기 위해 ‘혼·분식 장려 운동’을 벌였다. 1969년 1월부터는 △모든 식당에서는 25% 이상의 보리쌀이나 면류를 섞어 밥을 지어야 하며 △모든 식당은 매주 수·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을 원료로 하는 음식을 판매하지 못하며 △관공서·국영기업체 구내식당은 쌀로 만든 음식을 일절 판매할 수 없도록 강제했다. 말은 혼·분식 ‘장려’였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의 도시락까지 검사해 성적에 반영하는 ‘강제’였다.

라면업계의 후발 주자인 ‘롯데라면’은 롯데공업이 1965년 서울 대방동에 공장을 세우고 출시한 첫 제품이었다. 이후 1968년 강부자를 모델로 ‘왈순마’를, 1970년 닭고기 육수에서 유지를 사용하는 ‘소고기라면’을 출시했다. 1975년 ‘농심라면’을 내놓고 1978년 회사 이름을 아예 ‘농심’으로 바꿨다.

삼양과 농심의 라면 전쟁은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시각문화를 제시한다. 삼양에 밀리던 농심은 1970년 소고기라면을 출시하면서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내세워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광고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 이복식이 이미지나 동작을 상황에 연결시켜 그린 구봉서·곽규석의 일러스트 시리즈가 지면광고를 통해 시선을 끈다. 그간 김용환·홍성찬·안보선 등에 의해 삽화에 지나지 않던 일러스트가 에어브러시라는 도구와 이복식의 손을 통해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그러면서 인물의 특징을 빼어나게 뽑아낸 그림을 만들어내 시각적 충격을 준 것이다. 특히 소구 계층의 폭이 넓은 대중적인 캐릭터로 탄생했다. 이는 시각문화의 변화인 동시에 한국 일러스트의 전환점이자 미학을 완성시킨 사건으로 캐릭터가 하나의 인격체가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물먹는 하마’ 등의 캐릭터로 부동의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라면 봉지=붉은색’이라는 공식을 지키고 있다. 붉은색의 힘이다. 농심이 삼양을 꺾은 결정적인 수훈갑인 신라면은 삼양라면의 주황색보다 더 빨간 색이었다.

‘미원’과 ‘미풍’의 조미료 혈전

라면 전쟁보다 더 격한 전쟁을 치른 게 ‘미원’과 ‘미풍’으로 대표되는 조미료다. MSG(글루타민산나트륨) 조미료의 대명사가 된 미원은 1956년 신선로를 상표로 등록한 동아화성공업(주)이 처음 만들어냈다. 이후 미왕산업으로 1960년 발효 조미료를 생산하다 1962년 미원(주)과 합병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제품 아지노모토로 입맛이 길들여졌기에 광복 이후 합성 조미료 제조회사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후 선발 주자 미원이 조미료 시장을 선점하자 원형산업이 생산하던 ‘미풍’을 1963년 삼성의 제일제당이 인수·합병해 국자 모양의 로고와 함께 ‘아지노모도 미풍’을 내놓았다. 1964년 ‘여인표 미풍’으로 바꾸고 1965년 ‘백설표 조미료 미풍’을 출시했다. 1967년 미풍을 제일제당이 합병하고 1968년 ‘국자표 미풍’을 출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면에 미원은 초지일관 붉은색 신선로를 상표로 내세우며 조미료 시장을 평정한다. 삼성이 시도해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품목이라고 할 정도로 미원은 승승장구했고, 이들의 대대적인 판촉 활동으로 대한민국 음식은 MSG 맛으로 통일되고 골목 안 곳곳에는 붉은색 신선로 속에 한자로 ‘미원’과 예의 붉은 국자 그림의 ‘미풍’을 알리는 철제 광고판이 골목 풍경의 일부가 됐다. 이는 ‘신선로=한국 음식’이라는 전형성이 확립되는 데 일조했다.

제일제당은 절치부심한 끝에 1975년 천연 재료와 고향의 맛을 강조한 ‘다시다’를 출시하는 한편, 1977년에는 ‘아이미’를 시장에 내놓으며 대반격을 시도한다. 제일제당은 자기네 제품명을 딴 우리나라 최초의 브랜드 캐릭터 인형을 제작하며 제품보다 비싼 털 스웨터를 사은품으로 제공하고 요리 강습 주부교실 등을 열었다. 또 이복식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강력한 시각적 무기로 동원했다. 그가 그린 맛의 천사 아이미 캐릭터로 한태원은 포스터를 만들어 그해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인 클리오 국제광고제 인쇄 부문에서 한국 최초로 상을 받는다. 이런 마케팅 공세에도 ‘빨간 신선로’ 미원의 아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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