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우리는 노예”
  • 김지영 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4.09.2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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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부 모두 외면하는 주한미군 한국인 노동자들

지난 8월 동두천 미군기지 식당에서 일하는 한 한국인 노동자가 자택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을 맨 사건이 발생했다. 숨진 김 아무개씨(47)는 동두천 미군기지에서 20여  년 동안 접시를 닦으며 생계를 꾸렸다. 그는 주당 56시간씩 일해 200여 만원을 받았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이혼한 가장으로서 고등학생 자녀 둘을 어느 정도 뒷바라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용주인 미군 측이 김씨의 노동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주당 56시간이던 근무 시간은 40시간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월급도 150여 만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는 목을 맨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119 대원들에게 발견됐다. 김씨의 지인은 “(김씨가) 갑자기 근무 시간이 줄어들어 생활고로 힘들다는 유서를 남겼다. 빚도 있어 가장으로서 부담이 컸을 것”이라고 전했다.

주한미군이 글로벌 경제 위기를 들어 한국 노동자를 부당 해고하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 뉴스1
“한국인 노동자 줄여 기지 이전 비용 충당”

주한미군에서 일하는 1만2000여 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고용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김씨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도 있다. 최근 주한미군이 한국인 노동자를 사소한 이유로 해고하거나 노동 시간을 일방적으로 줄이는 꼼수로 한국인 노동자들을 감원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해고된 일자리는 미국인으로 채워지고 있다.

15년 동안 미군기지 안 ‘커뮤니티뱅크’에서 대출·외환 업무를 담당하다 지난 3월 말 해고된 양도규씨(42)가 대표적이다. 양씨의 해고 사유는 업무상 횡령이었다. 양씨가 근무한 ‘커뮤니티뱅크’는 출퇴근과 점심 시간을 정시에 맞춰 정확하게 컴퓨터 전산 시스템에 등록해야 하는데 양씨가 이를 어겼다는 게 회사 측 얘기다. 양씨는 “일하다 보면 출퇴근 등록을 깜빡하고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등록하기도 하는데 이걸 가지고 (시간을 속여 임금을 더 받았다는 명목으로) 월급을 횡령했다고 한다”며 “출근 증빙 자료를 제출해도 회사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커뮤니티뱅크 오산기지 지점에서 전체 직원 중 한 명을 제외하고 양씨를 포함해 9명이 일괄 해고됐다. 해고된 사람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양씨가 떠난 자리는 미국인으로 대체됐다. 양씨는 해고가 부당하다며 지난 5월 소청을 제기했지만,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소청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재취업에 연거푸 실패한 양씨는 현재 이민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 말까지 대구 미군기지 내 호텔 객실 청소를 했던 최영옥씨(62)도 청소 중 발견한 고객의 속옷 등 옷가지를 호텔 카운터가 아닌 자신의 청소용 카트에 담았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양씨와 최씨처럼 주한미군 기지에서 부당 해고되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의 자료를 보면, 2007년 1만2850명이었던 한국인 노동자는 올해 1만2190명으로 5%가량 줄어들었다. 반면 주한미군은 2007년 이후 줄곧 2만8500명으로 변동이 없다. 미군 수는 줄이지 않고 한국인 노동자만 감축한 것이다.

실제로 주한미군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정규직을 줄이고 파트타임을 늘리는 ‘아이디얼 스태핑(Ideal Staffing)’ 정책을 펴고 있다. 현재 주한미군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 중 45%가 정규직인데 주한미군은 이를 2016년까지 20%로 줄이고, 줄어든 비율만큼 파트타임직과 수시 고용으로 채운다는 계획이다. 의정부 미군기지 내 클럽에서 서빙을 하는 윤정선씨(49)도 아이디얼 스태핑 정책으로 석 달 전부터 근무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한 주 최장 40시간에서, 지금은 20~22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 그 바람에 월급도 50여 만원이나 깎였다.

주한미군이 지속적으로 인원을 감축하는 대외명분은 미국 경제 악화다. 2008년 경제 위기로 미국이 국방비를 줄임에 따라 한국에 주둔한 미군도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주한미군한국인노조는 미군이 한국인을 해고해 절감한 비용으로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위한 건설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손지오 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서울지부장은 “방위비 분담금은 총액으로만 확정된다. 항목비로 나눠져 있지만 항목 외 다른 목적으로 쓰여도 강제할 수단이 없다”며 “최근 몇 년간 전체 방위비 분담금에서 인건비는 줄어들고 군사비는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줄인 인건비로 이전비용을 충당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주한미군한국인노조 자료를 보면, 실제로 올해 전체 방위비 분담금 대비 한국인 노동자 인건비는 37.3%(3430억원)로 지난 20여 년 동안 유지됐던 40% 선이 무너졌다. 반면 올해 군사시설 건설비는 2007년 대비 약 38% 늘어난 4110억원으로 전체 방위비 분담금의 44.7%를 차지한다.

한국 정부,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

더 큰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주한미군 내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한미군한국인노조는 사태 해결을 위해 일본처럼 간접고용제를 적용하거나 총액으로 협상하게 돼 있는 방위비 분담금협정을 항목별로 바꿔야 한다고 요구한다. 간접고용제를 적용할 경우 한국인 노동자의 고용주가 미국 정부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바뀌어 한국인 노동자가 부당 해고를 당했을 경우 국내법을 통해 구제할 수 있게 된다. 또 방위비 분담금을 항목별로 협상하도록 전환한다면 인건비로 책정된 돈을 군사시설 건설 등 다른 곳에 전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손지오 주한미군한국인노조 서울지부장의 말이다. “주한미군 한국인 노동자 문제는 노동 이슈지만 고용노동부는 권한이 없다. 간접고용이 되려면 국방부가 나서 ‘소파(SOFA)’를 개정해야 하고,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항목별로 바꾸려면 외교부가 나서야 한다. 하지만 두 부처 모두 미국 눈치만 보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돈을 내고도 한국인 노동자의 생존권은 더욱 위험해지는 역설적인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우리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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