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9.조선시대 임금과 대신, 권력 구조 힘겨루기 치열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10.2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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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통령중심제·의원내각제 논쟁과 비슷

왕조 국가의 권력 구조는 말할 것도 없이 국왕 중심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왕조 국가에서는 권력 구조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음 장면을 보면 조선시대 초기의 권력 구조를 둘러싼 임금과 대신 간의 힘겨루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세조 1년(1455년) 8월16일.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지 두 달 남짓 지난 궁중의 잔칫날이었다. 양녕대군·효령대군 등 수양대군 즉위를 적극 지지한 왕실 인사들과 정인지(영의정)·한확(좌의정)·이사철(우의정) 등 정승과 신숙주·한명회를 비롯해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운 모든 신하들이 함께 모인 자리였다. 세조는 세자를 비롯한 종친과 백관은 물론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정난(靖難)의 4공신(四功臣) 친자식과 적장자까지 거느리고, 쫓겨난 단종의 거처인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개국 이래 책봉한 네 차례의 공신 중 이 자리에서의 핵심 공신은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수양대군 자신을 왕으로 세운 이른바 ‘정난공신’이었다. 개국공신과 1·2차 왕자의 난 직후 책봉한 정사·좌명공신의 후예까지 참석시킨 것은 수양대군 즉위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조(수양대군)는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어린 조카(단종)를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사진은 영화 의 한 장면. ⓒ 쇼박스 제공
의정부 서사제 주장에 불같이 화낸 세조

이날 맹족(盟簇)을 노산군(단종)과 세조에게 바쳤는데, 공신들의 명단과 영원히 변치 말자는 공신들의 맹세문을 적은 족자가 바로 맹족이었다. 주연이 베풀어지고 풍악이 연주되었는데, 양녕대군이 직접 비파를 잡고, 태종의 딸 숙근옹주의 남편인 권공이 징을 치며 흥을 돋우자 여러 공신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왕좌를 빼앗긴 노산군의 쓰라린 심정은 이미 안중에도 없어 여흥이 무르익자 세조까지 직접 일어나서 춤을 출 정도였다. 세조는 잔치가 끝난 후 동생이자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사제(私第)로 거동해서 다시 놀다가 환궁해 사정전에 나아갔다.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과 영응대군, 이계전, 홍달손, 신숙주 등이 시립(侍立)했는데, 정난 일등공신이자 병조판서인 이계전이 세조에게 조용히 말한 것이 이날의 사건을 만들었다. “오늘 성상께서 어온(御?·술)이 과하신 듯하오니 청컨대 대내(大內)로 돌아가소서.”

뜻밖에도 세조는 갑자기, “내 몸가짐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인데, 네가 어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세조는 이계전의 관(冠)을 벗게 하고는 병조참판 홍달손으로 하여금 머리채를 휘어잡아 뜰로 끌어내리게 했다. 병조판서의 관을 벗게 하고 직속 부하인 참판에게 머리채를 휘어잡아 뜰로 끌어내리게 했으니 이런 망신이 없었다. 세조가 이계전에게 이런 망신을 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네가 전에 하위지와 함께 의정부의 서사(署事)를 폐하지 말라고 했으니 너희들의 학술이 바르지 못한 것이다. 너는 극히 간휼(奸譎)하기 때문에 병조의 장관이 될 수 없다. 네 직책을 파면하고, 홍달손으로 대신하겠다.” 세조가 화를 낸 진짜 이유는 이계전이 하위지와 함께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를 폐하지 말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신숙주를 시켜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좌익공신 높은 등급을 주려는데 너는 원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이계전은 머리를 땅에 대고 사죄하면서 목 놓아 통곡했다. 세조는 상(床)에서 내려와 이계전과 신숙주에게 술을 따라주고 같이 춤추게 했는데, 이계전 등이 사례하고 일어나지 않자 “우리는 옛날의 동료다. 같이 서서 술을 따르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해롭겠느냐”고 권하자 마지못해 따랐다. 세조는 또 “내가 이계전에게 예상하지 못한 욕을 주었으니, 예상하지 못한 은전(恩典)을 베풀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세조실록>은 ‘파할 무렵이 밤 2고(鼓·오후 9~11시)나 되었다’라고 전한다(<세조실록> 1년 8월16일).

이 연회 장면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 정권의 자기 파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이라 불린 쿠데타를 일으킨 명분은 황보인·김종서 등의 권신(權臣)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단종을 끌어내고 직접 왕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권을 강화하려면 권력 구조를 개편해야 했다. 당시 권력 구조가 바로 의정부 서사제, 또는 의정부 서리제(署理制)라고도 하는 것인데, 병조판서 이계전이 이를 폐지하지 말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세조가 폭발한 것이었다.

육조직계제, 지금의 대통령중심제와 유사

의정부 서사제와 반대되는 제도가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집행 부서인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육조가 국정 현안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심의를 받는 제도였다. 반면 육조직계제는 육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였다. 따라서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면 왕권이 약화되고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반면 육조직계제를 실시하면 왕권은 강화되나 의정부는 유명무실해졌다. 정확한 비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의 차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육조직계제가 대통령중심제라면 의정부 서사제는 의원내각제라고 볼 수 있다. 박동량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수상(首相·영의정)은 자리가 비록 높기는 하나 맡은 사무가 없고, 좌상(左相·좌의정)은 이조·예조·병조 판서를 겸임하고 우상(右相)은 호조·형조·공조 판서를 겸임한다”고 전하고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직전고(官職典故)’에도 ‘좌의정이 이조·예조·병조 판서를 으레 겸했고, 우의정은 호조·형조·공조 판서를 으레 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은 개국 후 의정부 서사제를 채택해왔는데,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태종이 즉위하면서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가집비(四佳集碑)>에 의하면 태종 때 의정부 서사제를 육조직계제로 돌리자고 주장한 인물은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신개였다. 그는 ‘의정부에서 국사를 결재하는 것은 임금의 권한을 대신이 갖는 것’이라고 극력 간쟁하는 상소를 올렸다. 태종은 일단 “애송이 선비가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고 대신들이 권한을 독단한다고 함부로 말하느냐”라고 짐짓 반대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신개가 굽히지 않고 변론하니 대신들이 오히려 떨었다고 전하고 있다.

육조직계제는 태종의 의지였지만 태종은 자신의 주도하에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의정부에서 먼저 서사제를 폐지하자고 요청하는 형식을 원했다. 그래서 태종의 측근이었던 좌의정 하륜에게 “마땅히 정부를 개혁하여 육조에서 직접 일을 보고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아뢰게 했다. 태종은 마지못한 듯 신하들에게 “내가 깊이 생각해보니 모든 국사가 내 한 몸에 모이면 진실로 재결하기 어렵겠지만, 내가 나라의 임금이 되어서 어찌 노고스럽다고 피하겠는가”라고 육조직계제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의정부도 폐지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태종은 “나이와 덕망이 고매한 자가 많으나 육조의 자리는 적으니, 그대로 정부에 두고서 처우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의정부는 명목상 남겨두었다. 태종 14년(1414년) 4월17일의 일인데, 이날의 사관(史官)은 “지금 비록 의정부의 권한이 무거운 폐단을 개혁했다고 하지만 권력이 육조로 분산되어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국사를 제때 품승(稟承·신하가 국사를 보고하고 왕의 지시를 받는 일)하지 못해서 일이 많이 막히고 지체되었다고 한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10월1일 국회에서 열린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 강연회에서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왼쪽에서 세 번째)이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황희 등장으로 의정부 서사제 부활

의정부 서사제와 육조직계제에는 장단점이 모두 있었다. 의정부 서사제는 각 부서에서 수시로 정승들에게 보고할 수 있으므로 국사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장점이 있는 반면, 육조직계제는 각 부서에서 국왕에게 항상 보고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사가 지체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육조직계제로 신하들이 권신화(權臣化)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그 바탕 위에서 세종도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태종이 만든 육조직계제를 다시 의정부 서사제로 돌린 인물은 다름 아닌 아들 세종이었다.

세종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지만 재위 14년(1432년) 6월 “만약 한 사람의 정승을 얻을 수 있다면 국사는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승의 역할도 중요하게 생각한 군주였다. 그래서 세종은 재위 18년(1436년) 4월12일 “태조의 성헌(成憲)에 따라 육조는 각자의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稟議)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의논한 뒤 임금에게 아뢰어 지시를 받아 다시 육조로 돌려보내서 시행하게 하라”고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시켰다. 다만 이조·병조의 관리 임명과 병조의 군사 기용 등은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게 해 왕권 약화도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신하들의 권력 남용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던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로 환원한 것은 당시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이었다. 원래 의정부 서사제에서는 좌의정과 우의정의 역할만 있을 뿐 영의정의 역할이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좌·우의정만이 모두 다스리고 영의정은 관여하지 않는 것은 예부터 삼공에게 임무를 전담시켰던 본의와 어긋나니 지금부터 영의정 이하가 함께 논의해 가부를 시행하게 하라”고 영의정을 의정부 서사제의 핵심 인물로 삼았다. 세종 사후 의정부 서사제는 여러 번 존폐를 반복했다.

문종은 즉위년(1450년) 11월26일 “이제부터 육조는 가부를 헤아리지 말고 전례가 있었던 대로 항상 공사(公事)를 행할 때 의정부에 보고하지 말고 직계하는 것을 시행하라”고 육조직계제로 환원했다.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일시 의정부 서사제가 부활했다가 세조 1년(1455년) 윤6월부터 육조직계제로 환원했다. 그러나 세조는 재위 13년(1467년)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의 공신들이 승정원에 출근해서 승지의 일까지 보는 원상제(院相制)를 실시함으로써 ‘왕권 강화’라는 쿠데타 명분마저 저버렸다. 의정부 서사제 폐지 후 권한이 대폭 강화된 승정원에 실세 공신들이 출근해서 업무를 보았으니 의정부 서사제 저리 가라 할 제도였다.

제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세종이 황희를 신임해서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육조직계제, 즉 대통령중심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준이 떨어지는 인물이 대통령이나 국왕이 되었을 때 제어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의정부 서사제, 즉 의원내각제 역시 국정 현안에 능한 정승이나 의원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지금 국회에서는 대통령과 의회의 권한을 나누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논의되는 것인데, 대통령과 의회에서 뽑힌 총리가 충돌할 경우 등에 대한 해결책은 뚜렷하지 않다. 역사에서 그 답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제도와 사람을 함께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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