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라는 먼 나라 일인가
  • 김인숙 | 소설가 ()
  • 승인 2014.10.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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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에서 2003년 사이, 사스가 창궐하던 당시 필자는 중국에 거주 중이었다. 그 전염의 속도와 범위가 무시무시했다. 중국 관영 TV에서는 매일같이 도시의 피해 상황 집계를 발표했는데, 어제는 상하이가 전몰, 오늘은 베이징이 전몰, 그런 식이었다. 공포의 체감이 그랬다는 것이다. 필자가 머무르던 도시 다롄도 거의 폐쇄되다시피 했다.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통제되었고, 다시 들어오는 것은 더욱 엄격히 통제되었다.

가장 드라마틱한 상황은 딸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벌어졌다. 그 학교는 기본적으로는 기숙학교였지만 통학이 가능한 아이들에게까지 기숙이 의무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스가 거세게 북진하자 학교 측은 급히 전체 학생들의 기숙사 입주를 명했다. 학교가 아이들을 철통같이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적었다. 자퇴냐 휴학이냐, 아니면 기숙이냐.

학교와 집이 가까운 거리여서 그 전까지는 기숙사에 있지 않았던 딸을 학교 안으로 들여보내고, 다음 날부터 면회가 되지 않는 딸을 보기 위해 학교 담장 밖을 서성거려야 했다. 학교 경비들이 담장을 지키고 서서 아이와 부모가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 울면서 집에 돌아오면 아파트 경비가 권총처럼 생긴 체온계를 들이밀었다. 너무 울어 열이라도 났다가는 집에서도 쫓겨날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추억처럼 하는 얘기지만, 당시에는 무섭고 끔찍했다. 그것은 귀국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잠재적인 죄인이었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 미안할 지경이었다. 보건부인지 검역부인지에서 하루에 한 번씩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면 항상 따라붙는 의문이 있다. 국가가 하는 일의 어디까지가 마땅한 통치이고, 어디까지가 폭력적인 침해일까. 그런 일들이 한국에서 벌어진다면 우리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들이는 것이 맞을까,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맞을까. 역병은 전쟁과는 달라서 그야말로 무차별적이다. 이념도 종교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이 더 많이 노출되고 더 많이 죽겠으나, 부자와 기득권자라고 해서 완전히 무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 <월드 워 젯>의 동명 원작 소설은 영화와는 달리 좀비 사태가 끝난 후 그것이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태가 어떻게 극복되었는지를 인터뷰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속에서 좀비는 역병이다. 무서운 속도로 전 세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는. 영화에서처럼 전염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 정부들의 행태가 묘사되는데, 장벽을 쌓은 이스라엘과 모든 국민의 치아를 전부 뽑아버린 북한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에볼라 환자가 유럽과 미국에서도 발생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이게 아직은 먼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소설 <월드 워 젯>을 따르자면, 어떤 역병은 발생과 동시에 이미 세계의 멸망이나 마찬가지다. 멀고 가까운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위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 국가의 책임을 논하는 것은 이미 늦는 일이다. 정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생존이다. 먹고 자고 병들지 않는 것. 우리가 져야 할 책임도 있다. 잊지 않는 것. 어떤 일이든 전조 없이 발생하는 것은 없다. 둑이 터지기 전에는 금이 가거나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잘 지켜보고, 잘 막아야 할 일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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