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남 경영 전성시대, "형보다 나은 아우도 있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4.11.0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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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SPC·대성그룹 등 차남 경영 전성시대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있다. 모든 일에서 아우가 형만 못하다는 뜻이다. 보수적인 국내 재벌가에서는 그동안 장자 승계 원칙을 엄격하게 고수해왔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경우 동생의 아들(구광모 (주)LG 부장)을 호적에 올려 그룹의 대통을 잇게 할 정도다. 차남이나 딸의 능력이 출중해도 대권 경쟁에서는 배제되는 것이 우리 재벌가의 대체적인 현실이다.

하지만 일부 재벌가에선 차남이 대통을 승계하고 있다.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형님 이상의 경영 성적표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일부는 장남이 물려받아 재정이 악화된 그룹의 모체를 넘겨받기도 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차남 전성시대’를 연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 서성환 창업주는 1945년 태평양공업사를 설립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전신이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아모레퍼시픽그룹은 금융·IT·금속·패션·화장품·생활용품 등 24개 계열사를 거느렸다. 한때 프로야구단과 여자 농구단까지 운영했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 뉴시스·뉴스뱅크 이미지
서경배 회장, 주식 부자 순위 2위 올라

서 창업주는 장남인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에게 금융과 건설 계열사를 맡게 했다. 서영배 회장은 100억원이 넘는 서울 한남동 자택도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았다. 차남인 서경배 회장은 화장품 및 생활용품 업체인 (주)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을 물려받았다.

20년이 지난 현재 두 형제의 경영 성적표는 어떨까. 장남의 손에 남아 있는 회사는 건설업체인 태평양개발이 전부다. 태평양개발은 주로 고속도로나 아파트 공사를 도급받아 매출을 내고 있다. 서영배 회장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과 당기순이익은 각각 1259억원과 52억6000만원을 기록했다. 서영배 회장이 매년 40억원의 배당액을 회사로부터 타가면서 이익 폭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차남의 상황은 정반대다. 속칭 ‘요우커’로 불리는 중국 관광객 덕분에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처음으로 매출 3조원대를 돌파했다. 지난 7월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는 아모레퍼시픽의 ‘라네즈’ 매장에 들러 에센스와 수분팩을 구입하기도 했다. 최근 1년간 아모레퍼시픽의 주가는 80만원대에서 230만원대로 세 배 가까이 급등했다. 회사 주식의 51.37%를 보유한 서경배 회장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제치고 재계 주식 부자 2위에 올랐다. 서 회장의 주식 가치는 7조1338억원. 2012년 12월 부친이 장남에게 물려준 한남동 자택까지 174억원에 매입했다.

식품업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허영인 SPC그룹 회장은 부도가 난 그룹의 모체를 형님으로부터 인수한 경우다. 삼립식품 창업주인 허창성 회장은 1983년 장남 허영선씨에게 삼립식품을 물려줬다. 차남 허영인 회장은 삼립식품의 자회사였던 샤니를 물려받아 독립했다. 당시 샤니의 매출은 삼립식품의 10%에 불과했다.

하지만 장남의 회사는 1990년대 초 리조트 사업에 투자했다가 쓴맛을 봤다. 회사 재정은 갈수록 악화됐다. 삼립식품은 1997년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허영인 회장은 미국 대학 MBA 과정을 과감히 포기하고 제빵학교에 입학했다. 실무를 익힌 허 회장은 귀국 후 파리크라상과 파리바게트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뒀다. 결국 허영인 회장은 2002년 법정관리 중인 삼립식품까지 인수했다.

이후에도 허 회장은 해외 브랜드인 던킨도너츠·베스킨라빈스·잠바쥬스 등을 잇따라 국내에 도입해 큰 성공을 거뒀다. 2000년 4800억원이던 회사 매출은 현재 4조원을 웃돌고 있다. 허 회장은 지난 4월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올해의 한국 50대 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김영대 대성합동지주 회장과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의 경쟁 구도는 현재 진행형이다. 고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는 2001년 그룹의 모체인 대성산업을 장남 김영대 회장에게 넘겨줬다. 차남인 김영민 회장과 삼남인 김영훈 회장에게는 각각 서울도시가스와 대구도시가스를 물려줬다. 최근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선출된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은 김수근 창업주의 막내딸이다. 2001년 계열 분리 이후 삼형제는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피를 나눈 형제지만 왕래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장남과 삼남은 ‘대성’이라는 사명을 놓고 14년째 법정 분쟁을 벌이고 있다.

외형 면에서 보면 장남이 이끄는 대성합동지주가 앞서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대성합동지주의 자산은 3조3853억원을 기록했다. 자산이 1조1392억원인 삼남의 대성그룹보다 3배 이상 덩치가 크다. 삼남은 계열 분리 이후에도 안정적인 매출을 바탕으로 성장을 이어왔다. 주력 계열사인 대성에너지의 매출은 지난해 처음으로 1조원대를 돌파했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꾸준히 300억원 전후를 내고 있다. 2013년 말 기준으로 회사의 총 차입금은 923억원으로 유동성 대응력 또한 우수하다고 한국기업평가(한기평)는 평가했다.

대성가 장남과 삼남, 14년째 회사명 분쟁

그런데 대성합동지주는 건설·임대사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역풍을 맞았다. 주력 계열사인 대성산업의 부채는 한때 2조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대성산업은 2011년부터 구조조정에 나섰다. 서울 인사동 사옥, 디큐브호텔, 디큐브오피스 등과 대성산업가스 지분 60%를 매각하면서 부채를 1조6000억원 수준으로 줄였지만 유동성 우려는 여전하다. 대성산업의 매출은 2012년 1조7485억원에서 지난해 말 1조8173억원으로 소폭 증가했다. 하지만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3년째 마이너스다. 회사채 등급은 2년 만에 A에서 BBB-로 네 단계나 하락했다. 송종휴 한기평 책임연구원은 “과중한 재무 부담으로 전반적인 유동성 지표가 악화되고 있다”며 “영업 실적을 상회하는 금융비용 부담 등을 고려할 때 차입금 상환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딸도 경영 능력 있으면 대권 승계 



재계에서 차남이나 삼남이 장남을 제치고 그룹을 승계받는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남이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1987년 장남인 이맹희씨를 제치고 그룹을 물려받았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며 신경영을 선포했다. 선진국에서 3류 취급을 받던 삼성 제품들이 세계 1등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소니·히타치 등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삼성 제품이 정상에 올랐다.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1993년 29조원에서 2013년 390조원으로 14배 가까이 증가했다. 순이익은 같은 기간 8000억원에서 40조원으로 50배나 늘어났다.

지난 10월10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막내딸 구지은 아워홈 전무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이날 의원들은 2012년 사업 철수를 선언한 순대와 청국장을 변종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는 점을 집중적으로 따져 물었다. 구 전무는 “앞으로 민생 품목에 진출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주목되는 점은 구자학 회장의 4남매 중 막내딸이 국감장에 불려갔다는 점이다. 그의 어머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누나인 이숙희씨다. 아워홈의 최대주주(38.56%)는 구자학 회장의 장남 본성씨다. 장녀인 미현씨와 차녀인 명진씨 역시 1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회사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 전무는 2004년부터 아워홈의 사내이사 직을 맡고 있다. 그동안 아워홈의 외식 사업과 웨딩 사업을 진두지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승계 1순위로 실질적인 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구 전무가 국감장에 불려간 것으로 재계에선 보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보수적인 범(汎)LG가에서 여자가 경영에 참여한 것은 사실상 구 전무가 유일하다”며 “장자 승계만을 고수해서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딸만 두 명인 대상그룹 역시 차녀로 승계 구도가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 재계의 관측이다.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은 2001년 장녀인 세령씨와 차녀인 상민씨에게 대상 주식 800만주(17.34%)를 증여했다. 당시 장녀인 임세령 상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결혼한 상태였다. 임 회장은 장녀보다 차녀에게 200만주를 더 물려주면서 재계의 관심을 받았다. 2009년 임세령 상무가 이 부회장과 이혼하면서 대상 경영에 복귀했다. 그럼에도 임 회장과 부인 박현주씨는 장외 거래를 통해 대상홀딩스 지분 6.73%를 양도해 차녀에게 힘을 실어줬다. 임상민 상무는 현재 대상그룹 지주사인 대상홀딩스의 지분 38.36%를 보유하고 있다. 개인 최대주주로 언니 임세령 상무(20.41%)보다 18%나 많다. 최근에는 상무로 승진하면서 경영권 승계가 임박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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