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넘버 2’는 다시 최룡해
  • 이영종│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11.2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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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이은 2인자 다툼…‘인천 AG 얼굴마담’ 황병서 밀어내

11월17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 검은 롱코트 차림의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고려항공 특별기 트랩에 올랐다.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로 향하는 최룡해 뒤로 외교통인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등 핵심 간부들이 따랐다. 활주로에는 군복 차림의 황병서 총정치국장 등이 도열해 환송했다. 이륙하는 특별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리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부동자세를 취한 황병서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스쳐가는 듯 보였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TV 카메라를 향해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던 최룡해의 표정과 사뭇 대조를 이뤘다.

그런데 최룡해를 태운 항공기는 평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체 결함으로 회항하는 소동을 빚었다. 긴급히 정비를 한 다음 오후에 뒤늦게 재출발하는 바람에 특사 외교가 일정 차질을 빚는 국제적 망신을 샀다. 북한 군용기와 민항기를 비롯한 한반도와 주변의 모든 항공편은 우리 군의 대북 감시망에 실시간 포착되기 때문에 곧바로 이상 조짐이 외부에 알려진 것이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오후 2시 회항 문제로 평양의 관제탑과 핵심 지휘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며 “한·미의 대북 정보망은 특별기의 항적과 회항 경위 등 모든 전말을 감청 등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고 귀띔했다. 김정은의 특사가 탄 비행기가 결함으로 되돌아오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자 호사가들 사이엔 “황병서의 소행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권력 2인자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한 두 사람의 경쟁 관계를 빗댄 얘기다.

11월18일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가 크렘린궁을 찾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면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믿을 건 혈통뿐…빨치산 후손 승승장구

북한 권력 내 핵심 측근 서열에 중대한 변동이 감지된 건 10월14일 김정은 제1비서가 40일간의 공백을 깨고 공개 통치 활동을 재개하면서다. 발목 이상으로 추정되는 건강 문제로 잠행하는 사이 권력 2인자 구도에 역전이 생긴 것이다. 상당 기간 승승장구할 것 같던 황병서 총정치국장을 밀쳐내고 최룡해 비서가 김정은의 가장 가까운 곳을 차지했다. 같은 달 29일 조선중앙TV는 김 제1비서가 축구 경기를 관람한 소식을 전했다. 여기에서 최룡해는 수행 간부 중 가장 먼저 거명됐다. 지난 4월 말 황병서에게 군 총정치국장 직을 내주고 6개월 동안 당 비서 직함으로만 불려온 ‘좌천성’ 인사 이후 처음이다. 관영 매체들은 최룡해를 일제히 노동당의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호칭했다. 일부 당국자와 전문가들이 최룡해가 지난봄 밀려나면서 최고 핵심 자리인 정치국 상무위원도 내줬을 것이란 견해를 제시했지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한 것이다.

최룡해의 약진은 예상하기 힘들었다. 지난 10월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위해 방문했을 당시 그는 분명 ‘넘버 3’로 비쳐졌다. 단장 격인 황병서를 깍듯이 예우한 최룡해는 말끝마다 “우리 총정치국장 동지”라며 치켜세웠다. 당시 사정에 밝은 정부 당국자는 “언론에 공개된 자리에서는 물론 비공개 환담 때도 황병서는 무게를 잡고 앉아 있고, 당 비서인 최룡해와 김양건이 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양새였다”고 전했다.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위상이 이렇게 뒤바뀔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황병서가 인천을 무대로 잠깐 동안 얼굴마담 역할을 한 것이란 주장도 내놓고 있다.

최룡해의 복귀를 두고 김정은이 ‘믿을 건 혈통뿐’이란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란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집권 3년 차를 맞아 여전히 권력 장악에 불안한 구석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이른바 빨치산 세대의 후손을 절대 신임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최룡해가 김일성과 친분이 두터웠던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이란 점에서 ‘시련은 있지만 몰락하지 않는다’는 지위를 누리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요즘 김정은을 단골 수행하는 오일정 당 부장은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이다. 또 부총참모장으로 군 실세인 오금철은 오백룡 전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의 아들로 파악된다. 김정은 권력 다지기 기반 중 하나인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중앙위 전용남 중앙위원장도 전재선 전 인민무력부 부부장의 아들이다. 북한 권력 3대 세습 과정에서 측근 실세 그룹도 출신 성분을 토대로 2, 3세가 장악하는 형국이다. 김정은의 눈 밖에 나면 해임·숙청되는 전문 관료들과 달리 ‘개국공신’ 격인 빨치산 후손은 회전문 인사를 통해 진입과 일시적 퇴장을 되풀이하며 자리를 보전한다는 것이다.

최룡해는 당분간 2인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누리며 김정은 권력의 최고 실세로 자리를 굳힐 것으로 예상된다.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고 회담한 게 이를 예고한다. 북한은 그의 방러 일정을 보도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조선중앙통신 기자로 하여금 수행 취재토록 하는 조치도 취했다. 이미 김정은의 특사로 지난해 5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났다는 점에서 최룡해가 과거 백악관을 방문했던 조명록 총정치국장의 지위와 맞먹는 위상을 누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아들에 대한 후견 3인방으로 낙점해준 장성택·김경희 부부가 완전 몰락하고 이젠 최룡해 독주 시대를 맞은 것”이라고 말했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10월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앞서 황병서 총정치국장(오른쪽) 등 북한 고위 대표단과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장성택 처형 1주기, 내부 권력투쟁설도

물론 장성택 숙청의 충격파가 여전하다는 점에서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의견도 있다. 12월12일로 처형 1주년을 맞는다는 점에서도 북한 내부 동향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통해 권력 기반을 다지려 시도한 게 오히려 불안 요소로 잠복하고 있다는 분석 측면에서다. 대대적인 숙청 과정에서 몰락하거나 불만 세력화한 노동당과 군부의 옛 실세들이 1주기를 계기로 모종의 움직임을 시도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국정원은 최근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장성택 처형 이후 잔존 세력에 대한 숙청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 북한 유학생이 잠적한 사건도 장성택 측근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에서 북한 송환 시 처벌이 두려워 탈출해 망명을 시도하는 것이란 관측이다.

이처럼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최룡해가 김정은 체제 안정을 위해 반대 세력 숙청이란 피바람을 다시 불러일으킬지도 주목된다. 유엔과 국제사회가 압도적인 목소리로 북한 인권 실상을 규탄하고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는 방안까지 내놓는 위기 상황이란 측면에서다. 북한이 핵실험 카드까지 꺼내며 반발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녹록하지 않아 보인다. 4차 핵실험 감행 시 그나마 북한을 감싸던 중국과 러시아가 등을 돌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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