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황제’들, 미술품에 빠지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4.12.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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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구찌·프라다 미술관 열어…고도의 판매 전략

지난 10월27일 파리에 또 하나의 명소가 문을 열었다. 프랑스의 명품 제조업체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그룹이 13년 동안 1351억원을 들여 건립한 유리배 모양의 초현대식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이 그것이다. 프랑스 언론은 “유리잔의 구름을 연상케 하는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은 파리에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고, 풍경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파리 시내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에 자리 잡은 이 미술관은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했다. 빌바오가 티타늄으로 외관을 마감한 데 반해 루이비통 미술관은 12세기 배의 돛을 연상케 하는 형상에, 유리를 주 소재로 사용했다. 총 11개 갤러리와 강당, 세미나실, 뮤지엄 숍을 갖춘 미술관은 향후 20세기 이후의 작품, 즉 현대미술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를 열 것이라고 한다.

개관전으로는 엘스워스 켈리, 피에르 위그, 볼탕스키, 엘리아슨 울라퍼 등 ‘커미션 워크’, 즉 미술관에 맞춰 주문 제작한 작품과 루이비통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수집한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또 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내년 3월16일까지 프랭크 게리가 루이비통 미술관을 위해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는 건축전 미장아빔(mise-en-abyme)이 열리고 있다. 여기에 맞춰 퐁피두센터에서 대규모 게리의 회고전도 열리고 있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 정준모 제공
고가 사치품 기업의 미술 사랑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은 원래 왕실 소유의 사냥터였던 불로뉴 숲의 일부다. 나폴레옹 3세가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내놓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파리 시민의 사랑을 받는 이 불로뉴 숲에 새로운 명물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미술관 개관식에는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와 문화장관 플뢰르 펠르랭이 참석하는 등 파리의 새로운 문화적 자산이자 관광자원이 탄생한 것을 거국적으로 축하하고 세계에 홍보하고자 하는 의도를 역력히 드러냈다.

LVMH그룹은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고가 사치품 기업으로 산하에 시계·의류·잡화·와인에 이르기까지 60여 개 브랜드가 있다. 루이비통·디올·지방시·쇼메·위블로·불가리·태크호이어·헤네시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는 명품 브랜드의 반 이상이 이 그룹 산하 브랜드다. LVMH의 아르노 회장은 널리 알려진 현대미술 컬렉터다. 그는 미술품 수집과 미술관 개관을 위해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일하던 수잔 파제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해 작품을 수집해왔다. 그래서 그의 소장품은 현대미술만큼이나 역동적이며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조력자인 수잔 파제는 각각의 작품 관계에 주목해 이를 맥락화하는 한편, 투자 가치보다는 작품의 미적 가치에 더 중점을 둔다. 수익성보다는 예술 작품 자체와 작품의 질, 예술품 간의 관계 등을 고려해 소장품을 모아 아방가르드한 컬렉션을 완성했다. 아르노는 이들 작품 중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신비주의적 작품에 열광한다. 명품 기업 주인장답게 부르주아적인 취향을 지닌 그는 우아한 태도로 아니쉬 카푸어나 필립 파 레노, 크리스토퍼 울, 로즈마리 트로켈 등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그의 미술적 취향을 알게 해준다.

아르노 회장은 2003년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과 뒤 뷔페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리처드 세라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을 수집하는 등 미술품을 향한 사랑을 끊임없이 과시해왔다.

그의 컬렉션을 이루고 있는 작품은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의 컬렉션으로 모아지면 그것 자체로 역사가 된다. 이는 19~20세기의 유명한 컬렉터가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이며 아르노는 이런 교훈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신진 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귀감이 돼준 대가와 젊은 작가를 미적·예술적으로 이어주는 컬렉터로서의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① 케링그룹이 베니스에 문을 연 팔라조 그라시 ②피렌체의 구찌 박물관 ⓒ 정준모 제공
아르노·피노 컬렉션, 작가가 부자 되는 지름길

아르노 컬렉션은 수많은 럭셔리 브랜드를 보유한 케링그룹의 회장이자 2000여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프랑수아 앙리 피노가 베니스에 개관한 팔라조 그라시(Palazzo Grassi)와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에 소장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보다 대담할 것으로 평가된다. 이제 이 두 사람의 컬렉션 경쟁은 시간이 지나 오늘의 예술이 역사가 될 때 판가름 날 것이다.

럭셔리 시장에서 LVMH그룹의 라이벌인 케링그룹은 구찌·이브생로랑·카르티에·피아제·몽블랑·푸마 등 고가 패션 브랜드와 프렝탕 백화점 등으로 구성돼 있다. 피노 회장의 현대미술 사랑도 아르노에 못지않다. 2006년 아르노가 게리에게 전권을 위임해 미술관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하기 1년 전 피노는 이미 안도 다다오와 함께 파리 센 강 하류의 세갱(Ile Seguin) 섬을 부지로 정하고 파리 시에 건축 허가를 요청했지만 차일피일 미루자 거점을 베니스로 옮겼다. 그는 2006년 피아트가 지원하던 팔라조 그라시를 인수해 자신의 미술관으로 개관하고 다시 2008년 안도 다다오의 손을 빌려 17세기에 건립된 세관 건물을 대대적으로 수리해 푼타 델라 도가나라는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두 미술관이 개관하고 나서 베니스는 더 이상 르네상스 미술의 도시가 아니라 현대미술의 도시가 됐다. 크리스티 경매회사까지 소유한 피노가 손을 대는 작가는 작품 가격이 급등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르노와 피노의 컬렉션에 들어가는 게 작가가 거부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할 정도다. 특히 피노는 한 작가에 집중하면 대작 중심으로 대량의 작품을 소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통까지 큰 ‘큰손’인 셈이다. 2010년에는 중국 작가 장후안과 쩡판츠에 꽂혀 그들의 대작과 신예 작가 토마스 하우시고와 제이콥 카세이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이들 작가는 상종가를 쳤다.

이들의 취향은 일부 컬렉터의 취향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그런데 이런 피노의 또 다른 상대가 베니스에 나타났다. 바로 프라다다. 2013년 프라다는 베니스의 카 코너 델라 레지나에서 하랄드 제만을 전설의 큐레이터로 만든 ‘태도가 형식이 될 때’를 열었다. 이에 피노 크리스티 회장은 두 개의 자기 미술관에서 자신의 컬렉션으로 대규모 전시를 만들어 맞불을 놓았다.

사실 프라다는 밀라노와 베니스에서 지속적으로 아트 프로젝트를 개최했다. 1993년 밀라노에 처음으로 현대 조각 전시를 위한 공간을 개관하고 2년 뒤인 1995년 프라다 재단으로 재정비하며, 미술사가이자 큐레이터인 첼란트를 관장으로 영입했다. 프라다는 밀라노 교외 이자르고의 낡은 공장을 사들여 렘 쿨하스의 디자인으로 복합문화공간을 세우는 중이다. 또 2011년 베니스에 프라다 재단(PRADA Foundation)을 설립하고 미술관 신축을 준비 중이다. 프라다 창업자의 손녀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미우치아는 “당신들이 잘할 만큼 주겠다”고 말할 정도로 문화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마치 문화를 지원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이 작품이라는 자부심은 구찌로 하여금 2011년 피렌체에 구치 박물관을 열게 했다. 1921년 구찌가 처음 피렌체에 매장을 열면서 시작한 구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구찌 박물관은 피렌체의 심장인 시뇨리아 광장에 위치해 피렌체의 자부심이 됐다. 이곳에는 스카프와 가방은 물론 식기까지 그들이 출시했던 제품을 미술사적 맥락으로 전시해놓았다. 

기업 미술관 개관은 작가·시민에게 혜택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구두의 전설 페라가모 박물관이 자리한다. 1995년 개관한 이 박물관은 패션이 한 국가의 문화와 예술의 일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제조 산업의 역사에서 페라가모는 가장 오랫동안 존재하는 이름이다. 구두로 시작한 그들은 액세서리, 남성·여성복, 안경, 향수, 시계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지만 그들의 장인 정신은 그대로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박물관을 택했다. 스피니 페로니 궁전 안에 위치한 박물관에는 1만여 점의 자료와 작품이 소장돼 있다.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 ⓒ 정준모 제공
왜 고가 사치품 기업들은 박물관과 미술 작품에 열광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가 사치품=명품’이라는 신비감을 증대시키는 한편, 이를 사들이는 소비자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도의 판매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100년 기업이 나와 이렇게 박물관을 세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의 생산과 수호에 돈을 퍼붓는 배경을 색안경을 쓰고 볼 수도 있지만, 이들의 이런 문화적 기여를 통해 우리의 삶이 윤택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우리 기업이 배워야 할 것은 즉흥적인 지원이나 후원 또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문화예술을 이용한다면 영악한 소비자가 이를 먼저 알아보고 배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문화예술을 기업의 포트폴리오에 넣으려면 적어도 전문가를 영입해 그들에게 전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아마추어 애호가들이 자신의 안목과 능력이 전지전능하다고 자신하는 순간, 문화예술을 통한 기업의 사회적 기여 행위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 기업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문화예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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