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어서 엔진 개발 시작하게”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12.1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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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엔진 ‘알파’ 만든 이현순 부회장이 털어놓은 비사

(주)두산 이현순 부회장은 한국 독자 엔진 개발의 산증인이다. 지금은 현대·기아차가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 발돋움해 있지만, 국산 고유 엔진이 등장한 것은 놀랍게도 1991년 스쿠프에 적용한 1.5리터급 가솔린 알파 엔진이 처음이다. 4.6리터급 타우 엔진은 워즈오토가 선정한 세계 10대 엔진에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선정됐다. 물론 디젤 엔진인 U(1리터급), R(2리터급), S엔진(3리터급)도 모두 그가 세상에 내보낸 것이다. 그는 두산으로 옮기자마자 두산인프라코어가 1500마력짜리 전차(K2) 엔진을 만드는 작업을 지휘했다. 전차와 유조선 등에 적용되는 더 크고 더 강력한 엔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 고유 엔진 개발 과정을 다룬 <내 안에 잠든 엔진을 깨워라>라는 책을 펴낸 이현순 부회장을 만나 어떻게 한국 엔진 개발의 대부가 됐는지를 들었다. 그는 “독자적인 기술이 있어야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독자 엔진 개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반대하는 세력은 한국 내부에서 나왔다. 첫 번째 주적은 현대차 내부에 있었다. 뉴욕 주립대에서 비행기 엔진을 전공한 그는 GM 엔진개발실에서 일했다. 한국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 집권 초기로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중공업과 자동차산업 중 택일하라는 정부의 강요에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을 내놓고 현대자동차를 택했다. 그리고 1983년 9월 부랴부랴 신엔진 개발 계획을 수립했다. 이 프로젝트를 맡을 사람으로 GM의 이현순 연구원을 낙점한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사장 비서실에서 매일 전화를 걸어 설득하자 결국 1984년 4월 현대자동차로 출근했다. 당시 GM은 연구 인력만 2만5000명이었고, 현대차에는 연구원도 연구소도 없었다. 첫 출근한 그에게 정주영 회장은 다섯 명의 부하 직원을 소개하면서 “어서 엔진 개발을 시작하게”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마북리에 현대차 연구소를 짓고 인력을 뽑아서 알파 엔진 개발에 나섰다.

? 타우 엔진 개발은 2009년 제네시스의 ‘북미 올해의 차’ 수상으로 이어졌다. ? 2009년 벤플리트 상을 받은 정몽구 회장과 함께. ? 2010년 청와대 전기자동차 개발 성과 보고회. ⓒ 이현순 제공
미쓰비시 측에서 엔진 개발 방해

이때 가장 큰 난적은 사내의 반대였다. 당시 현대차는 미쓰비시의 기술과 모델을 들여와 생산했다. 당연히 미쓰비시 쪽에서 반발했다. 미쓰비시는 자사에 충성하는 현대차 직원이 와야 계약서에 사인해주는 등 절대적인 ‘갑’이었고 미쓰비시와 협상을 잘하는 ‘친일파’가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는 등 사내에 미쓰비시 인맥이 막강했다. 이들이 정 회장에게 “미쓰비시도 못 만드는 신형 엔진을 현대차가 어떻게 만드느냐”고 계속 따지자 정 회장도 흔들렸다. 실제로 정 회장이 현대전자 설립 문제로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그는 보직 해임되고 엔진 개발팀이 공중분해되기도 했다. 6개월 동안 연구소 복도에 책상을 놓고 혼자 논문만 보던 그에게 어느 날 ‘엔진개발실장으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현대전자 설립을 마무리한 정 회장이 엔진 개발팀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원상복귀를 명령한 것이다. 당시 미쓰비시 구보 회장은 현대차를 찾아와 정 회장에게 “자체 엔진 개발을 포기하면 로열티를 반으로 깎아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했다. 그 말을 이현순에게 전하며 정 회장은 “구보 회장이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나한테 제안할 리가 있나? 나는 구보 회장 말을 듣고 이 박사가 설계한 엔진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네. 열심히 해서 꼭 성공시켜주게”라고 말했다. 그 후 정 회장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중화학공업 ‘합리화 정책’도 난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경제 브레인이던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은 비교우위론에 입각해 ‘자동차산업을 왜 하느냐. 우리는 섬유나 화학 이런 거 하자’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국내 회사를 다 묶어서 GM에 팔겠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었다. 그런 계획이 아웅산 사태로 인해 없던 일이 됐다”고 그는 전했다.

그렇게 자동차 원천기술을 확보한 현대차는 세계 5대 메이커로 발돋움했고 외국에서 변속기와 엔진을 수입해 차를 조립하던 업체는 모두 해외에 매각되거나 합병됐다. 현대차의 기술 제휴선이던 미쓰비시는 이제 현대차에서 엔진을 공급받고 엔지니어들이 와서 기술 교육을 받고 있다.

그는 “엔진만큼은 한국차와 독일차가 대등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차 엔진 기술이 부족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됐다. 쏘나타와 동급 독일차의 연비를 비교하는데, 무게 차이만 해도 상당하다. 독일산 고급차는 카본파이버나 알루미늄 같은 고가의 경량화 소재를 많이 쓴다. 연비가 좋아지는 대신 값이 비싸진다. 한국에선 고급차 외에는 가격 때문에 적극적으로 쓰기 어렵다. 현대차가 독일차에 비해 실력이 떨어진다기보다는 갖고 있는 기술을 상품화하는 데 제약 조건이 많다는 게 바른 표현이다. 독일차는 비싼 소재를 써서 그 몇 배의 가격을 받는다. 그들이 쓰는 ISG 같은 연비 절감 장치를 달면 시내 주행에서 15~20% 차이가 난다. 결국 소비자가 현대 브랜드에 돈을 더 주고 추가 성능을 살 것이냐의 문제다. 소비자가 돈은 조금 내면서 독일차 수준의 연비를 원하면 갭이 있을 수밖에 없다.”

1991년 알파 엔진 양산 기념회에서 정세영 사장(맨 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 ⓒ 이현순 제공
“한국 엔진 기술 독일에 뒤지지 않아”

엔진 경쟁력에 대해 그는 메르세데스 벤츠와 있었던 협상 이야기를 들려줬다. “3리터급 디젤 S엔진을 개발할 때 벤츠에서 공동 개발 제의가 들어왔지만 개발비 분담을 놓고 엎어졌다”고 그는 전했다. 성능 개발과 설계는 현대가 맡고, 내구성 부문은 벤츠가 맡아 협업하자는 게 골자였다. 현대차는 이미 세타 엔진을 개발해서 크라이슬러와 미쓰비시에 판매했고 벤츠도 세타 엔진을 e클래스에 적용하는 것을 검토할 정도였다. 세타 엔진은 전 세계에서 2000만대 이상 판매될 정도로 완성도가 뛰어났다. S엔진 공동 개발이 틀어진 것은 독일 쪽 엔지니어의 인건비가 높고 전체 프로젝트 비용보다 내구 비용이 더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와 메르세데스 벤츠는 각자 개발에 나서 현대는 S엔진을 모하비에 얹었고 벤츠는 S클래스에 얹었다.

이 부회장은 “S엔진을 개발할 때 에쿠스에도 얹으려고 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벤츠는 최고급 차종인 S클래스에도 S엔진과 같은 급의 디젤 엔진을 적용한 차를 시판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의 경우 마케팅 쪽에서 ‘국내 시장 상황에선 고급차에 디젤 엔진 적용은 무리’라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3리터급 람다 엔진을 얹는 신형 제네시스에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S엔진을 얹을 수 있게 설계부터 그렇게 했다는 게 이 부회장의 설명이다.

이 부회장은 미래 차의 방향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 시장에서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수소차가 미래 차의 패권을 놓고 경쟁 중이다. 전기차는 전기 에너지를 쓰고 원전에 의지하는 한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반면 수소는 우리나라 제철소나 정유시설에서 나오는 수소가스의 20%만 가지고도 500만대의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다. 그는 “석유보다 훨씬 저렴한 수소전지 자동차가 궁극적으로는 대안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두산으로 옮겨서 더 크고 다양한 엔진을 만들고 있다. 그는 앞으로 아직 국산화가 안 된 발전소용 가스 터빈까지 손댈 예정이다. 그는 “항공기 엔진의 베이스가 가스 터빈이다.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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