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정-정명훈 ‘진흙탕 심포니’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12.1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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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내분 둘러싸고 네 탓 공방…박원순 시장 책임론 불거져

시작은 하나의 문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였다. 지난 12월2일 서울시립교향악단 사무국 직원들이 외부에 공개한 호소문이다. A4용지 24장 분량의 자료에는 박현정 서울시향 대표이사가 직원들의 인권을 상시적으로 유린해왔다는 주장이 상세한 정황 설명과 함께 담겼다.

파문이 확산되자 박 대표는 12월5일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방만하고 비효율적이고 나태하고, 조직이라고 할 수 없는 동호회적인 문화에 굉장히 놀랐다. 나태한 문화, 공사 구분 없는 문화에 익숙하던 (직원)분들과 이를 체계화시키려는 제 목표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직원들의 폭로는 자신과 갈등 관계에 있던 이들의 음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대표는 그 배후에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서울시향이 정 감독의 ‘사조직’에 가깝게 운영돼온 것이 현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12월5일 박현정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가 시향 연습실에서 최근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결국 정 감독도 입을 열었다. 12월10일 귀국해 참석한 서울시향 단원들과의 리허설 자리에서다. “이 문제에 대한 내 입장은 간단하다. 이것은 인권 침해이고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이다.” ‘막말 파문’으로 시작됐던 서울시향 사태는 이제 박현정 대표와 정명훈 감독 간의 극한 대립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 2년간 박 대표 체제의 서울시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무국 직원들의 호소문 공개로 박 대표의 인격 문제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호소문에 담긴 폭언·성희롱 등의 정황이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사손이 발생하면 월급에서 까겠어. 니들 월급으로는 못 갚으니 장기라도 팔아야지 뭐” “너희들은 내가 소리를 질러야만 일하지. 그게 노예근성이야” 등 폭언·욕설 및 모욕적 발언이 일상적으로 있었다는 것이 직원들의 주장이다. 남자 직원 주요 부위에 접촉을 시도하거나 여직원의 신체를 상품화하는 등의 성추행·성희롱도 수차례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성희롱은 정말 아니다. 욕설도 2인칭으로 한 적은 없다. 폭언들도 조금 편집·왜곡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유 여하를 떠나 굉장히 큰 잘못을 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직원들의 폭로가 과장·왜곡됐다는 취지다.

12월10일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공연 리허설에 참석해 단원들에게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시 “녹취록 보면 박 대표 발언 ‘막말’ 해당”

하지만 이번 사태 전후의 맥락을 살펴보면 직원에 대한 박 대표의 인격모독 의혹이 상당 부분 사실일 가능성이 커지는 모양새다. 서울시는 지난 10월 정명훈 감독을 통해 박현정 대표에 대한 직원들의 탄원서를 전달받고 자체적으로 사실관계 확인에 들어간 바 있다. 서울시 측은 확인 결과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했다고 밝혔다. 직원들의 폭로로 파문이 확산된 후 서울시는 정식 조사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박 대표의 인권 침해 여부를 조사 중인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은 11일 “녹취록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 녹취록상 녹음된 내용만 보면 막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서울시향의 심상찮은 분위기는 진작부터 꾸준히 외부에 알려졌다. 박 대표가 취임하고 불과 6개월이 지난 지난해 9월2일, 서울시의회 임시회의에서 김용석 시의원은 박 대표를 향해 이렇게 발언한다. “대표님의 스타일과 직원들의 부적응·부조화 문제에 대해 시향 내·외부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있는 것은 대표님도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 서울시향을 둘러싸고 ‘호통과 고성으로 조직을 이끌고 있다’ ‘베테랑 직원들이 연쇄 사직서를 내고 있다’ 등의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 대표는 호통과 고성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 “사실”이라며 시인하는 한편, 직원들이 일해온 방식을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박 대표 스스로 인정했듯, 서울시향 직원들을 향한 그의 거친 언행이 취임 초기부터 상당한 내부 반발을 사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13년이 끝날 즈음 정년퇴임을 제외한 퇴사자는 6명이다. 사무국 인원이 총 27명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다. 직원들의 호소문에 따르면, 2014년 1월 정명훈 감독이 박 대표와 독대해 직원들에 대한 인격적 대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직원들의 잇따른 사표가 대표이사의 비인격적 대우 때문이라는 점을 정 감독이 여러 창구를 통해 파악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직원들의 퇴사는 잇따랐다. 5명의 사무국 직원이 추가로 서울시향을 떠났다. 직원들은 박 대표 취임 이후 전체 사무국 인원 27명 중 48%에 해당하는 13명(정년퇴임 2명 포함)이 회사를 떠났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사태의 근본 책임은 ‘인격모독 논란’을 일으킨 박 대표에게 있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에 걸맞지 않은 행태를 보였고, 이미 안팎에서 수차례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미약했다는 것이다. 박 대표의 비인격적 언행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이었는지는 서울시 조사가 마무리된 후 드러나게 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정명훈 감독과 서울시향의 조직문화에 대해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박 대표가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방만하고 나태한 정명훈 사조직’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우며 맞설 수 있는 배경에는 서울시향 특유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형주 서울시의원은 “물론 예술계인 만큼 다소 특별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100억원 이상의 시 기금을 출연하는 기관인 만큼 대표이사의 관리·감독 권한도 충분히 인정돼야 한다. 박 대표와 정 감독 사이의 의사소통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혹시 정 감독이라는 성역을 깰 수 없다는 이유로 대표이사로서의 관리 권한이 인정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향의 비효율적·비합리적 조직문화는 그동안 수차례 도마에 올랐다. 지난해 7월 서울시향 업무보고 자리에서 “서울시향의 각종 계약서가 디테일한 부분을 하나도 명시하지 않거나 모르는 무성의한 형태로 작성되고 있다. 만약 분쟁이 생겨도 이길 수가 없고 당연히 받아야 되는 손해배상도 받지 못한다”는 문제제기가 나온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 11월 서울시향에 대한 행정사무감사에서는 “기본적인 서류부터 똑바로 작성되지 않았고, 거기에 따른 시향 구성원들의 규정 준수도 제대로 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명훈 감독에 대한 문제제기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정 감독이 서울시향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워낙 큰 탓에 대표이사의 관리·감독조차 받지 않는 ‘성역’이 됐다는 것이다. 올해 행정감사에서는 계약서에 명시된 의무 조항을 위반했을 소지가 있음에도 박 대표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이 문제로 지적됐다. 정 감독이 자신의 해외 일정 문제로 이미 확정돼 있던 서울시향 공연 일정을 변경한 부분, 개인 재단 기금 마련을 위해 피아노 리사이틀을 개최해 영리 활동을 한 부분 등이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진행 중인 감사 결과를 확인해야 할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향 관리·감독 최종 책임자인 박원순 서울시장. ⓒ 연합뉴스
시의회 감사에서 서울시향 문제 자주 지적

박현정 대표와 정명훈 감독 간의 대립과 갈등 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또 하나의 축이 있다. 서울시향 관리·감독의 최종 책임자인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파장이 확산될수록 박 시장에 대해서도 책임론이 불거진다. 우선 각종 논란을 발생시킬 인사를 서울시향 대표이사에 앉힌 ‘검증 실패’ 책임이 거론된다. 이에 대해 박 시장은 12월11일 “공적 절차대로 대표를 선임하고 객관적으로 보지만 걸러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아직 진상이 나오진 않았지만 (직원 인격모독이) 사실이라면 경영자로서의 문제가 상당히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전부터 심상치 않은 시향 내부 분위기에 대해 안팎에서 끊임없이 말이 나왔고, 박 대표 취임 직후부터 부·과장급 인사를 포함한 사무국 직원들의 ‘사표 행렬’이 잇따랐음을 감안하면 서울시향에 대한 관리 조치가 미흡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현재 진행 중인 정 감독에 대한 조사 역시 박 시장으로서는 부담스럽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인 정 감독의 상징성이 서울시향 운영에 미치는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 시장은 “정 감독처럼 서울시민이 사랑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문제가 좀 있다고 하기로서니 배제해버리면 그 대안이 있느냐”며 난색을 표시했다. 향후 감사원 감사, 서울시 조사 등이 마무리된 뒤 박 시장의 정치적 역량이 시험대에 오를 수 있음을 예고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박현정 대표 선임, 박원순·정명훈 ‘오케이’  


박현정 서울시향 대표이사가 취임한 것은 지난해 2월이다. 박 대표 취임 전 서울시향 대표이사 자리는 약 1년간 공석이었다. 새 인물을 물색하는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명권자인 박원순 시장은 공연예술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참신한 인물을 선호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2005년 창설 당시부터 서울시향 단원들을 이끌어온 정명훈 감독은 시향의 살림을 책임질 전문경영인 쪽에 무게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인사권은 물론 박 시장에게 있지만, 서울시향의 상징과도 같은 정 감독의 의견을 물리치기는 힘들었다. 각자 몇몇 인물을 물망에 올렸으나 두 사람 모두 동의하는 인물은 찾기 어려웠다.

어렵게 합의에 도달한 인물이 박현정 대표다. 금융 및 마케팅 계열 출신의 전문경영인인 만큼 정 감독의 의중이 더 강하게 반영된 결과였다. 박 대표도 취임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정 감독과의 만남이 대표이사 직을 수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서울시향 내부 관계자는 “박 대표는 정 감독이나 박 시장과 인연이 없던 분이었다. 외부의 추천을 두 분 다 ‘오케이’한 결과였다”고 전했다. 박 대표가 “음악과 서울시향의 발전을 향한 정 감독의 순수한 마음을 돕고 싶다”고 강조했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했다.

정명훈 감독은 “1년 전부터 인권유린 행위를 알고 있었다. 직원들이 너무 고생을 하고, 보통 정도가 아니라 한번 불러들이면 몇 시간 동안 사람이 아닌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그런 걸 당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 대표와 정 감독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것도 이 시기를 전후한 때로 추정된다. 정 감독은 지난 10월 사무국 직원들의 탄원서를 박원순 시장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박 대표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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