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없는 잡지의 실험, 콘텐츠 그 자체로 승부한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12.1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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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킨포크’ ‘시리얼’ ‘어라운드’ 등 광고 없는 잡지의 실험

잡지 시장이 레드오션이라는 평가를 받은 지는 오래다. 몇 년째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을 끼고 산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위세로 도태 위기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잡지가 있다. 인터넷을 통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와 콘텐츠 서비스가 대세를 이루며 종이 매체는 설 자리를 잃었다는 판정이 내려질 때 새로운 무기를 들고 등장한 매체들이 있다. 이들은 인터넷 서비스가 없고 심지어 주 수입원인 광고조차 없다. 그런데 이런 책이 조용히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이제는 일정한 흐름을 이루며 대형 서점의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브랜드 매거진 ‘B’,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킨포크’ ‘시리얼’ ‘어라운드’, 인물을 다룬 ‘바이오그래피’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거칠게 꼽자면 단행본을 닮았다는 점, 광고가 없다는 점, 인터넷을 통한 콘텐츠 제공을 하지 않는다는 점, 반면 SNS를 이용한 독자와의 소통에 적극적이라는 점, 과월호도 단행본 대접을 받으며 재고가 소진될 때까지 서점에서 계속 팔린다는 점, 마지막으로 시각적 요소를 강조한 편집 등을 꼽을 수 있다.

12월11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매거진 B 편집국에서 최태혁 편집장과 기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B’는 언뜻 디스커버리 총서를 떠올리게 한다. 디스커버리 총서가 역사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백과사전이라면 ‘B’는 현대 소비 시대의 백과사전쯤에 해당한다. 일반 단행본 크기로 130쪽 안팎의 책에 한 가지 브랜드의 모든 것을 다룬다. 그동안 다룬 브랜드는 아우디(자동차), 뉴발란스(운동화), 구글(검색엔진), 기네스(맥주), 레페토(구두), 레고(장난감), ECM(음반사) 등 32가지다. 이 중 7개호는 매진됐고, 그 가운데 프라이탁과 스노우픽, 러시는 재판마저 다 팔렸다. 레고를 다룬 이슈는 덴마크의 레고 본사에서 사전 검열을 요구하자 모든 협조를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진행해 1만부가 소진돼 재판까지 찍는 기록을 세웠다.

SNS 스타일의 자연스러운 감성 강조

브랜드의 모든 것을 다루지만 사용설명서 같은 건 없다. 그 브랜드의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감성을 다룬다. 그래서 감성 잡지에 가깝다. 브랜드 매니저나 홍보·마케팅 담당자가 참고할 만한 내용도 있지만 주된 소비자는 일반 독자다. 한글판 1만부, 영문판 1만부를 발행해 10개국 이상에서 팔리고 있다. 서점 판매 비중이 높지만 정기독자도 관리한다. 서점에 깔리기 전에 정기 독자에게 먼저 배달하는 것. 그 외의 특별 선물 같은 것은 없다.

‘B’는 네이버의 디자인·마케팅 담당 부사장을 지낸 조수용 대표가 독립해 만든 잡지다. 웹으로 이름을 알린 그였지만 아이러니하게 ‘촉감이 살아 있는 잡지’를 창업 아이템으로 정했다. ‘B’의 창간부터 함께한 최태혁 편집장은 “촉감 있는 콘텐츠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나 느낌이 다르다고 판단했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사진과 글을 담는다. 꾸미지 않은 담담한 느낌, 실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브랜드의 실체를 전한다”고 말했다. 이런 태도는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사진 공유 SNS) 시대의 감성과 맞아떨어진다. 그는 3주년 기념일을 전후해 인터뷰한 일본 다이칸야마의 서점 ‘지타야’의 매니저 말을 소개했다. “그 매니저는 일본에서 ‘B’의 영문판을 사는 독자들 가운데는 그 호에 실린 브랜드가 좋아서 책을 사는 게 아니라 매거진 ‘B’가 좋아서 사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의 관점을 소비하는 층이 두터워진 것은 ‘B’가 보편타당하게 브랜드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본다.”

재정적인 부분에서도 ‘B’는 균형을 달성한 듯하다. 최 편집장은 “매월 과월호 판매 비율이 40%를 넘긴다. 3년 전에 만든 게 지금도 팔린다. 회사는 지금 손익 분기점을 넘긴 상태”라고 전했다. 그는 “우리는 출판사가 아니다. 우리를 출판사로 단정하면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의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라이프스타일 전문 회사고 ‘B’는 전체 사업에서 상징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실제로 ‘B’의 모회사인 조&컴퍼니는 디자인 컨설팅, 식음료 사업, 호텔 컨설팅, 가방이나 구두 사업도 하고 있다. 딱히 ‘B’로 돈을 벌어야만 하는 구조가 아니다. 하지만 2011년 11월 창간호를 낸 ‘B’는 한 권에 1만3000원으로 제작비 이상을 벌고 있다. 휴가철인 1·2월호와 7·8월호는 합병호(1만6000원)로 낸다. 지난해 칸 광고제에서 광고 없는 잡지 ‘B’가 은상을 받기도 했다.

‘B’에 비해 ‘킨포크’(디자인 이음)와 ‘시리얼’(시공사)은 확실히 여성 친화적이다. 물론 웹으로 제공되는 콘텐츠는 없다. 둘 다 계간지이고 한국어 번역판이다. ‘킨포크’는 제호 밑에 ‘작고 새로운 발견의 나날들’이라고 써 있고, ‘시리얼’은 ‘트래블&라이프 스타일’이라고 적혀 있다. 교보문고에서 ‘킨포크’와 ‘시리얼’은 잡지 코너가 아닌 인테리어 코너에 배치돼 있다. 정기간행물이 아닌 단행본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과월호, 지난 이슈도 함께 진열돼 있다. 두 잡지 간에 차이가 있다면 미국계 ‘킨포크’가 요리나 인테리어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영국계 ‘시리얼’은 좀 더 여행에 치중하고 있다는 정도다. 공통점은 매호 주제를 책 뒷면에 표시한다는 것이다. ‘킨포크’ 13호는 ‘불완전에 대하여’가 주제이고, ‘시리얼’ 8호는 ‘캐나다 유콘, 토스카나, 에스크 캐시미어, 슈탈 하우스, 홍콩, 영국 세인트 아이브스’를 다뤘다. 광고는 없다. ‘킨포크’가 13호에 3면의 광고를 실었지만 이는 미국판 콘텐츠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킨포크’ 한국판의 서상민 편집장은 “한국판이 올해 4월부터 나왔고, 우리는 지난 6월에 11호부터 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킨포크’ 한국판의 1~8호 판권과 9호부터의 판권을 가진 회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킨포크’나 ‘시리얼’은 사진의 비중이 높다. ‘킨포크한 사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어떤 이는 인스타그램의 사진 열풍 근거지로 ‘킨포크’를 지목하기도 한다. ‘킨포크’는 2011년 미국에서도 시골인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창간된 잡지다. 이 잡지는 특유의 미니멀한 감성의 예쁜 사진으로 세계적인 현상이 됐다. 짙은 색조 화장을 하고 얼굴 근육이나 엉덩이 근육을 쥐어짜는 모델이 등장하는 패션지 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판만 있던 시절부터 ‘킨포크’를 즐겨 봤다는 30대 중반의 출판기획자 최수현씨는 “‘킨포크’는 우리나라에 고정 독자가 꽤 있었다. 사진이 딱 요즘 감성이다. 엄청 예쁘다. 내용은 별거 아닌데 비루한 삶이라도 예쁘게 포장했다. 눈으로 하는 호사,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독서 취미라는 게 인기 요인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광고 없는 잡지, 단행본 닮은 잡지 시대를 열어가는 새로운 잡지들. ⓒ 시사저널 구윤성
‘소유욕’ 자극하는 예쁜 잡지

‘예술을 아는 소박한 이웃과 함께 직접 요리한 음식으로 밥 먹는 자리’라는 콘셉트는 ‘킨포크’가 자주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최근 젊은 층에서 유행한 ‘집밥 모임’도 미국 ‘킨포크’발 유행이었고 국내 발행사인 디자인 이음에서도 웹을 통한 콘텐츠 제공은 전혀 하지 않지만 소박한 오프라인 이벤트는 꾸준히 열고 있다. 이벤트에 오는 독자는 주로 20~40대 여성이고, 그중 20대가 가장 많다고 한다.

서 편집장은 “한 호에 5000부 정도를 찍고 석 달 동안 대략 80% 이상 팔린다”고 전했다. 책값은 1만4500원, 미국판 18달러보다 약간 싸다. 그는 “판형이나 인쇄 상태, 지질이 미국판과 같다. 그래도 국내 물가를 고려해 원서보다 싸야 한국어판이 경쟁력이 있을 것 같아 가격을 낮게 정했다”고 덧붙였다. 

11월에 창간호를 낸 ‘바이오그래피’는 격월간 평전 잡지다. 창간호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을 다뤘다. 하드커버를 두른 이 ‘잡지’는 완전히 단행본 모양이다. 평전을 잡지 형태로 펴낸 이유에 대해 이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한 이연대 편집장은 “널리 알려진 인물에게 고착된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선 낯선 기술 방식이 필요했다. 과거의 일방적인 미화와는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래서 매거진 형식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책은 비주얼 비중이 높다. 이어령 전 장관의 화보가 아트북처럼 실려 있고 시민 인터뷰가 들어가고 연도를 따라가는 서술 대신 일화 중심으로 소개하고, 세 차례의 대담을 정리한 인터뷰도 들어갔다. 한 인물에 대한 입체 전시에 가깝다.

이 편집장은 “세상에 없는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내가 소장하고 싶은 그런 책을 내고 싶었다. 책을 내기 전에는 20대 후반~50대 초반의 남성이 주 독자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판매 동향을 체크해보면 20대 후반~30대 초·중반의 여성 비중이 컸다. 아무래도 아트북 같은 편집이나 모양이 어필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바이오그래피’ 역시 인터넷을 통해 콘텐츠가 제공되지 않는다. “소장욕을 확실히 자극하는 매력적인 잡지를 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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