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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새신랑 만리장성 허물다

프로 입단 11년 만에 세계 대회 첫 우승 김지석

손종수│바둑 칼럼니스트 ㅣ 승인 2014.12.25(Thu) 15:4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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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계약직 사원의 애환을 섬세하고 실감나게 그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드라마까지 제작돼 화제를 몰고 있는 만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그토록 간절하게 이르고 싶었던 세계, 프로바둑.

그곳에서도 가장 높은 하늘 위에 눈부신 별이 떴다. 2014년 12월10일 중국 산시성 시안 그란멜리야 호텔에서 막을 내린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에서 중국의 탕웨이싱(唐韋星·21)을 2-0으로 꺾고 우승컵을 번쩍 들어올린 바둑 스타 김지석(25·한국랭킹 2위)이다.

프로 입단(2003년) 11년 만에, 자신의 다섯 번째 타이틀을 세계 대회 첫 우승으로 장식하면서 그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안방 챔피언’이란 불명예를 시원하게 벗어던진 김지석은 오랜 가뭄 끝 단비처럼 한국 프로바둑계의 구세주로 떠올랐다.

1989년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 이후 20여 년간 중국과 일본을 압도하고 세계 바둑을 제패했던 한국이 지난해 단 하나의 세계 타이틀도 획득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으며 세계 최강국의 위상을 중국에 내줬는데 김지석의 삼성화재배 우승으로 비로소 그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됐다.

김지석의 세계 대회 우승은 주변의 기대보다 많이 늦었다. 김지석은 동아일보에 ‘광주의 다섯 살 바둑 신동’이라는 기사가 게재될 만큼 일찌감치 바둑계가 주목해온 천재였다. 바둑을 배운 지 1년 만에 1급이 되고, 2년 만에 당대 최강 조훈현에게 4점 지도기를 받을 만큼 기력 향상 속도가 빨랐다.

   
ⓒ 시사저널 사진자료
한국, 지난해 세계 타이틀 하나도 못 따

1995년 김지석을 지도했던 조훈현이 ‘나하고 같은 과’라고 극찬하며 집으로 들여 가르치는 내제자까지 고려했던 일화를 생각하면 열네 살 입단(2003년)도, 첫 타이틀 획득(2009년 한국물가정보배)도 최정상을 앞서간 조훈현·이창호는 물론, 동갑내기 강동윤(25·2002년 입단, 2007년 첫 타이틀, 2009년 세계대회 우승), 연하의 박정환(21·2006년 입단, 2009년 첫 타이틀, 2011년 세계대회 우승)보다 늦고 다섯 살 신동 시절부터 지켜본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다.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대기(大器)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듯 최고의 재능을 가진 김지석에게도 시련과 장애가 있었다. 바둑을 배운 지 2년 만에 천하의 조훈현과 4점 접바둑을 둔 신동은 주변의 기대대로 프로의 꿈을 안고 바둑교실을 거쳐 프로 양성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바둑 공부보다는 아이들과 어울려 뛰노는 게 더 좋았다. 처음에는 바둑을 잘 둬서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게 즐거웠지만 언젠가부터는 바둑 공부도 재미없어 그만두고 싶었다. 바둑 공부를 그만두고 싶었는데 서울-광주를 오가며 뒷바라지하던 부모님께 미안해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김지석의 말에 수년간 그를 지도했던 프로들도 고개를 끄덕였으나 수직 상승하던 기량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아버지 김호성 전남대 공대 교수(55)의 말에 따르면 연구생으로 함께 수업하는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등 신문·방송에 오르내리는 학교폭력까지는 아니어도 적지 않은 괴롭힘을 당했던 것 같다. 화장실에 가둔 다음 불을 끄고 가버려 1시간이 넘도록 울었던 기억은 오랜 시간 시달린 악몽이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올 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이를 광주로 데려왔다. 처음 바둑을 배웠던 광주의 바둑학원에서 낯익은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아이는 예전의 밝은 표정을 되찾았고 8~9조를 헤매던 연구생리그도 4~5조까지 쑥쑥 올라갔다. 아이의 상처가 아물었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다시 짐을 꾸려 서울로 올려 보냈다. 당시 최고의 프로 양성소로 이름을 떨치던 명문 권갑용바둑도장(권도장)을 찾아가게 한 결정은 바른 선택이었다.

권도장은 잠룡의 경연장이었고 놀이터였다. 김지석이 권도장의 문을 두드렸을 때 선배 이세돌은 프로 입단 5년 차로 32연승의 대기록을 달성하며 세계 최강자의 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김지석 9단(왼쪽)은 제19기 GS칼텍스배 프로기전 결승 5번기 제3국에서 최철한 9단에게 승리하며 종합 전적 3-0으로 이 대회를 2연패했다. ⓒ 뉴시스
“죽고 싶다” 할 정도로 시련 겪어

도장 수업 시절은 물론, 입단 이후에도 ‘바둑·인생 모든 면에서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최철한(29·1997년 입단)이 있었고, 김지석보다 늦게 바둑에 입문했으나 프로 입단에 근접한 또래의 선후배가 있었다. 윤준상(28·2001년 입단), 이영구(29·2001년 입단), 백홍석(29·2001년 입단) 그리고 동갑내기 강동윤 그보다 어린 박정환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비로소 선의의 경쟁이 주는 기쁨을 맛보게 됐다. 이들 중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기사는 단 한 사람도 없으니 교육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김지석은 권도장 수업 3년 만에 프로 입단 관문을 돌파했다. 입단 후에도 김지석의 걸음은 느렸으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견고해진 마음은 좌절보다 성장의 기운을 일으켰다. 첫 타이틀 물가정보배를 획득한 뒤 천원전 결승에서 연하의 라이벌 박정환에게 0-3으로 완패하고 이후에도 연패의 고배를 마시는 시련을 겪었으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일어나 쉬지 않고 정상을 향해 걸었다.

“어려울 때마다 생명의 경외감을 주는 우주·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힘을 얻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고 우주의 무한함과 인간의 한계를 생각했다. 승부를 관조하면서 조급함에서 벗어났다. 예전에는 큰 승부에 나서면 이겨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는데 아버지가 대국 전에 마음을 관조해보라고 하셨다. 불안하면 불안을, 조급하면 조급함을, 집중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을, 다만 관조만 하라고 하셨다. 도움이 컸다.”

바둑가의 관측자들은 김지석의 바둑이 눈에 띄게 안정된 비결은 정신 성장의 힘이겠지만 최근 가정을 꾸려 가장이 됐다는 책임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 2년 차, 꽃미남 새신랑의 질주는 파죽지세(破竹之勢), 말 그대로 대나무를 단숨에 쪼개는 기세다. 올해 세계 대회에서만 16승 1패. 그중 두 판은 12월10일 끝난 삼성화재배 결승전인데 코앞으로 다가온 춘란배 8강전에서는 중국의 신성 미위팅(18·중국랭킹 2위)과 겨루며, 2015년 2월 LG배 결승전에서는 자신에게 연패를 안겨준 박정환(한국랭킹 1위)에게 설욕을 벼른다. 2015년 한국 프로바둑의 블록버스터, 그 중심에 김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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