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진영 ‘종북몰이’ 오래 못 갈 것”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5.01.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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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언론인 남재희 전 장관…“현 정부 아이디어 결핍 심각”

팔순을 넘긴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고, 한마디 한마디는 신중했다. 그는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에게 사전 질문지를 요구했고, 인터뷰 자리에 직접 작성한 답변 메모지를 가지고 나왔다. “내 뜻이 정확히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언론인 출신다운 세심함과 치밀함을 엿볼 수 있었다. 남 전 장관의 경력만 보면, 보수 우파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진다. 한국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 서울신문 편집국장 등 20여 년의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박정희 정권 때인 1978년(10대 총선) 공화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한다. 이를 시작으로 민정당-민자당 등 새누리당의 전신 격인 보수 정당에 몸을 담았다. 김영삼 정권 때인 1993년 노동부장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장관 시절 ‘무노동 부분임금’을 지지하고,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졸속 추진은 농민들을 죽이는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 소신을 펼쳤다. 그의 올곧음은 진보 진영에서도 인정했다. 그는 “진보 정당이 원내교섭단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와 진보가 조화롭게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도 원로 언론인으로서 우리 사회에 균형론을 설파하고 있다. 시사저널은 2015년 새해를 맞아 ‘비판적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 남 전 장관을 만나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들어봤다.  

ⓒ 시사저널 이종현
최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있었다. 이에 대해 국민 여론은 대체로 헌재 결정에 동의한다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이른바 평등파(PD계열)와 자주파(NL계열)가 같이 당을 하던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에도 심상정·조승수 (전) 의원 등은 (지금의 통진당 세력을 가리켜) ‘종북’이라는 표현을 쓰며 비판하지 않았나. 나도 심상정·노회찬·권영길 등은 다 잘 알지만, 솔직히 이석기 등은 잘 모르겠다. 이정희 대표도 잘 모른다. 언젠가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싸가지 없는 진보’란 표현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데, 나는 그 표적이 바로 통진당 세력이라고 본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독단적이고, 비민주적인 집단 행태가 같은 진보  진영 내에서도 공격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태극기에 대한 의례나 애국가 제창 등도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들로 하여금 괴리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헌재의 결정에 공감하는가.

개인적으로는 유일하게 소수 의견을 낸 김이수 재판관 의견에  공감한다. 프린트물만 150장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양을 통해  진보 진영의 역사를 꿰뚫었더라. 내가 그에 공감하는 이유는, 헌재가 결정에서 ‘부분을 너무 성급하게 일반화했다’는 점과 ‘진보적 민주주의가 결코 우리 헌정 질서에 위배되는 게 아니다’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2심 법원에서도 RO(혁명조직)가 없다고 판단했고, 내란음모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국가보안법만 적용했지. 결과적으로 2심 법원과 헌재의 판단이 어긋나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헌재가 너무 정치적인 판단을 한다는 지적도 있는 듯하다.

사실 법원과 헌재는 오래전부터 경쟁 관계였다. 헌법 해석을 둘러싸고 권한쟁의가 있었다. 이번 통진당 건만 해도 대법원의 최종심이 아직 남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마치 헌재가 먼저 선수를 친 듯한 느낌이다. 대법관은 전원이 국회에서 동의를 구한다. 그런데 헌재 재판관은 소장 한 명만 동의를 받고 나머지는 그냥 임명하면 끝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민주성이나 대표성은 대법관 쪽이 더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헌재가 안 지려고 유독 대법원을 상대로 상당한 경쟁의식을 드러낸 듯하다. 왜 최종심을 안 기다리고 그냥 헌재가 먼저 결정을 했을까.

이번 결정으로 우리 사회에 숨어 있는 ‘레드 콤플렉스’를 다시 자극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사실 통일 문제, 민족 문제란 것은 법체계와 일부 충돌한다. 법체계만 보면 대한민국 헌법은 그것으로 완벽하고, 북한 법도 북한식대로 완벽하다. 그러나 통일·민족 문제로 가면 그 각각의 법체계가 충돌하게 되어 있다. 통일 문제를 잘못 언급하면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게 되는 경우가 되고, 대한민국 자체를 부인하게 되는 경우도 된다. 그런 딜레마가 있다. 이를 기본적으로 머릿속에 둘 수밖에 없다. 통일 문제와 민족 문제를 잘못 얘기하면 걸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소위 ‘걸면 걸린다’는 피해의식이다. 과거 내가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언론사 간부 시절, 툭하면 조사를 받으러 다니고 하니까,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하던 신상초 선배가 “여보, 남북 관계를 얘기할 때는 먼저 3분의 2쯤 김일성 정권부터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러고 나서 3분의 1 정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해야지. 처음부터 다짜고짜 박 정권만 비판하니까 자꾸 걸리는 거야”라고 충고하더라. (웃음)

일각에서는 새해 들어 다시 공안 정국이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지금 박근혜 정권이 추상같이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만약 그렇게 되면 국제사회에서의 평가도 나빠지게 된다. 또 8명의 다수 의견을 낸 헌재 결정문에서도 ‘낙인찍기나 이념 공세가 될까 봐 걱정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벌써 새누리당도 ‘종북 숙주론’을 내세우며 “새정치민주연합도 책임이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아마 4월 재·보선 때까지 계속 가져가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이미 우리의 민도(民度)가 높아졌고, 사회도 개방되고 국제화가 되었다. 설령 보수 진영에서 종북몰이를 하려고 할지 몰라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진 않다.

새해 당·청 관계는 어떻게 될까.

여당은 어느 정도 활력을 회복할 것으로 본다. 김무성 대표가 지난번에는 개헌론을 한번 들고나왔다가, 청와대에서 세게 치받으니까 지금이 타이밍이 아니라고 보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하지만 집권 3년 차만 돼도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또 그렇게 안 하면 여당도 미래가 없으니까.

야당인 새정치연합 문제도 심각한 것 아닌가. 제1야당이 제 역할을 못한다는 비판이 많다.

오늘 보니까 정세균 의원이 대표 불출마 선언을 했더라. 이제 어느 정도 질서를 잡아가지 않겠나 본다. 지금까지는 비대위 체제가 길어져서 (정부·여당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전당대회를 통해 새 대표를 선출하고 구심점이 생기면 의원들도 함부로 지도부를 휘두르진 못할 것이다.

지난 한 해 비선권력의 인사 개입설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했다. 왜 이런 현상이 집권 2년 차에 벌써 생기는 것인가.

아이디어 결핍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인사가 뒷받침되지 않으니까. 대선에 많은 도움을 줬던 김종인·이상돈 전 비대위원 등이 이미 정권에 다 등을 돌린 게, 복지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대선 때 약속을 다 안 지키니까.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되고 지표는 자꾸 나쁜 것만 나온다.

새해가 왔지만 경제 문제 등 여러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그렇다. 어둡고 우울하다. 역시 경제가 중요한데, 일본의 ‘아베노믹스’ 전망도 좋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볼 때 한국도 경제가 별로 안 좋을 것 같다. 미국만 해도 오바마 대통령이 계속 최저임금을 올리라고 하고, 힐러리 전 장관도 중산층을 상향시키라고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는 하층민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려야 내수도 살리고 경제도 돌아갈 수 있는 건데, 별로 그런 게 안 보인다.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실업은 더 늘어나고 비정규직 문제는 계속된다. 정부가 최근 노사 문제를 인식하는 걸 보면, 비정규직 수준을 올리는 게 아니라 정규직을 내려서 하향 평준화로 가려는 듯한 느낌이다. 이를 두고 ‘정규직의 유연화’란 표현을 썼는데, 결국 정규직 수준을 하향화한다는 것 아니겠나.

정치권에서는 새해 들어 개헌 논란이 불붙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개인적 생각으로 내각책임제는 안 된다고 본다. 우리네 정당은 아직 훈련이 덜 됐다. 이원집정부제도 마찬가지다. 당분간은 더 대통령제로 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게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역대 대선을 보면 대개 당선자가 과반 득표 미달이었다. 그렇다면 결선투표에서는 틀림없이 2개 또는 3개 당이 연립 표결을 해야 한다. 그러자면 다른 정당과 협상을 해야 한다. 연립의 훈련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각제로 바로 가면 연립의 훈련도 없이 혼란만 온다. 개헌의 요소는 사실 다른 데에 많다. 비례대표제를 좀 늘리는 것도 필요하고, 헌재 구성원 9명도 국회 동의를 받게 하는 게 필요하다. 헌재가 엄청난 권한을 갖는 것에 비해 임명 절차가 별로 엄격하지 않다.

남북 문제를 포함한 외교 관계의 중요성도 부각될 전망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는가.

미국 언론 매체를 많이 보는데, 전문가들은 미·중이 장기적으론 충돌하지는 않겠지만, 중·단기적으로는 대결 코스라고 보고 있다. 그 사이에 낀 한국으로선 몹시 조심스러울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한·미 동맹이 너무 중요하니까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긴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도 악화시켜선 안 된다. 즉 미사일방어체제(사드 배치) 등으로 중국을 자극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한·중 관계에서 군사적인 부분은 미국이 예민하게 반응하겠지만,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우호적 방향으로 가는 데까지는 미국이 뭐라고 못할 것이다.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다.

일본과의 불편한 관계는 계속 이어질까.

어떻게 보면 지금 한·일 관계가 최악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도 우리는 일본에 분리 대응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와 경제·안보 문제는 별도로 가는 것이다. 물론 분리 대응이 어렵고 조심스럽기는 하다. 일본은 더욱더 우경화하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부친 친일 논란이 있어서 일본 문제를 잘못 대응했다가는 자칫 민족감정을 건드릴 수도 있다. 정치적 리스크가 있는 것이어서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다.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역시 남북 관계가 아닌가 싶다. 이명박 정부와 비교해서 별로 진전된 게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 대통령이 위원장으로 있는 통일준비위원회의 정종욱 부위원장 강연이 얼마 전에 있어서 들은 적이 있다. 정 부위원장이 마지막 부분에서 중국 외교관과 나눈 대화를 소개하더라. 그 중국 외교관이 세 가지를 말했는데 첫째, 남북통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둘째, (통일이) 북한 주도냐, 남한 주도냐 하는 걸 문제 삼지 않겠다. 셋째, 다만 통일한국이 중국에 군사 위협이 되어선 안 된다 등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통일 대박’만 말하고 군사 문제에 대한 언급은 일절 빼놓고 있다. 그러니까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집을 지으면서 어떻게 1층은 안 짓고, 2층만 짓느냐”고 비판하는 것 아닌가. 통일 문제를 언급하면서 군사 문제를 얘기하지 않는 것은 사상누각이 아니라 공중누각이다. 군사 문제를 풀기 위한 남북 관계의 어떤 화해 조치가 필요하다. 지금 상황은 우리가 남북 관계에서 충분히 주도권을 취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렇게 못하는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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