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로비꾼 변신, 우리랑 같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01.2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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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 싸는 독일 고위 공직자들…비판 일자 ‘이직제한법’ 마련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인 2014년 12월23일, 독일 내무부가 고위 공직자의 이직을 제한하는 법안을 완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위 공직자의 적절한 이직 시기와 이익 충돌 여부에 대한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새 법안에 따르면, 퇴직 후 18개월 내에 민간 분야로 이직을 하는 정부 구성원은 이를 미리 알려야 하며, 퇴직 후 12개월간은 새 직장에서 일할 수 없도록 제한된다. 경우에 따라 이 유예 기간은 18개월로 연장될 수 있다. 이 법안은 이르면 오는 2월 중에 효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2014년 한 해 동안 독일 시민들은 고위 공직자들의 화려한 변신을 지켜봤다. 시작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최측근인 로날드 포팔라 전 총리실장 겸 특임장관이었다. 포팔라 전 실장은 2013년 말 “가족을 위해 정계에서 은퇴하기로 했다”고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정계 은퇴 선언 직후인 지난해 1월, 포팔라가 국영철도기업인 도이체반(DB)의 정계 전담 로비스트로 내정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포팔라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부담을 느낀 메르켈 총리는 “조용해질 때까지 쉬라”고 권고했다. 여론의 관심이 잦아든 6월 중순, 포팔라와 DB는 기습 골을 넣었다.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포팔라가 아예 DB의 이사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사 취임일은 포팔라의 정계 은퇴 바로 다음 날인 2014년 1월1일로 결정되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재임 시절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천연가스 수송 사업을 실현한 후 러시아 국영기업인 가스프롬의 노르트스트림 담당 자문위원장으로 재취업했다. ⓒ AP 연합
유럽연합(EU)이 철도 사업의 자유 경쟁을 강화하기 위해 철도 노선과 철도 기업 간의 분리를 추진하면서부터 DB는 EU와 갈등을 겪어왔다. DB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적임자로 찾은 인물이 바로 메르켈 정부의 실세이자 항공·철도 사업에 관여해온 포팔라 전 실장이었다. 포팔라는 재임 기간 동안 EU가 추진한 철도 운영 투명화 법안 제정을 막았고, DB사에 대한 감사 강화 법안 역시 저지했다.

11월에는 다니엘 바 전 보건장관이 알리안츠 질병보험사에 이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소속당인 자유민주당(FDP)이 총선 참패로 연방의회 진출에 실패하면서 장관직을 내려놓은 지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는 보건장관 재임 시절 공보험 가입자가 사보험으로 옮기는 데 필요한 소득 증명 기간을 단축시켰고, 사보험에 든 고소득자도 의약품 할인 혜택을 받게 만들었으며, 공보험 가입자가 사보험사에 추가로 요양 보험을 들 경우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도 만들었다. 이처럼 그가 사보험업계에 유리한 일련의 정책을 관철시켜온 탓에 비난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바 전 장관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보 성향의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자동차업계로 옮겼다면 이상했겠지만, 계속 보건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논리적인 일”이라며 자신의 이직을 옹호했다.

독일 고위 공직자들의 이 같은 변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심지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2005년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에게 패배한 직후 독일-러시아 간 천연가스 공급 파이프를 관리하는 노르트스트림사의 이사장으로 취직해 당 안팎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가 재임 기간 동안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천연가스 수송 사업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 인사들이 퇴직 후 재취직을 할 때까지 유예 기간을 갖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며 ‘슈뢰더 때리기’에 앞장섰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기독민주연합(CDU) 총재를 맡고 있던 로날드 포팔라였다.

이 같은 고위 공직자의 이직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키우는 데 큰 몫을 했다. 이들이 철도·보건·에너지 등 독일의 사회적 인프라 구조를 사유화하는 정책을 펴고 그 대가로 거액의 연봉을 약속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3년 에카르트 폰 클래덴 전 국무장관은 그해 말 대가성 뇌물 수수 혐의로 연방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재임 기간 중 자동차 배기가스 규정을 강화하려는 EU에 맞서 자동차업계의 이익을 변호한 그는 퇴직 후 다임러사의 대표 로비스트로 전직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고위 정치인들은 대기업의 수습 직원이나 다름없다”는 냉소가 퍼졌다. 

기민련-사민당 연합정부가 뒤늦게 이직 제한법을 마련한 배경 역시 이직 자체를 막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부의 무결함에 대한 공중의 신뢰가 침해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법안이 정치에 대한 신뢰를 공고히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무조건 유예 기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을 때에 한해 윤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제한적으로 유예 기간을 둘 전망이기 때문이다. 독일 정치인들의 활동을 감시·공개하는 웹사이트 ‘압게오르트네텐워치’는 “12~18개월의 유예 기간이 너무 짧고, 윤리위원회와 연방정부의 결정을 법원이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며 내무부의 법안을 비판했다.

의원 당선 후 4개월 만에 기업으로 줄행랑

독일 니더라인 지방의 소도시 클레베의 유권자들은 지난 20년간 선거 때마다 이 도시 출신 포팔라 전 장관에게 표를 던졌다. 2013년 9월 치러진 선거에서도 포팔라는 50.3%의 득표율로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그리고 4개월 후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포팔라의 선거운동을 도운 기민련 내부에서는 “포팔라에게 속았다”는 말까지 나왔다.

슈뢰더 전 총리가 독일에 미친 영향은 포팔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독일의 정치 전문지인 ‘치체로’의 크리스토프 슈벤니케 편집장은 푸틴 대통령이 독일 에너지정책의 미래를 좌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독-러 간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을 꼽았다. 우크라이나 문제로 유럽과 갈등을 겪으면서 러시아는 매년 겨울마다 “가스관을 잠그겠다”는 협박을 일삼고 있다. 그럼에도 슈뢰더 전 총리는 지난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초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칠순 잔치를 벌여 물의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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