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식 코미디’ 가슴이 찡하네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5.01.2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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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겸 배우로 나서 만든 두 번째 영화 <허삼관>

<허삼관>은 배우 하정우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첫 연출작 <롤러코스터>(2013년)와는 달리 이번에는 직접 주연까지 도맡았다. 신인 감독 하정우가 판을 깔고 연기력과 스타성을 두루 갖춘 배우 하정우가 그 안에서 뛰노는 그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조합, 꽤 흥미진진하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한국. 삼관(하정우)은 마을 처녀 옥란(하지원)에게 반해 결혼을 결심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피를 팔아 생계를 잇던 시대다. 삼관은 매혈로 돈을 마련해 결혼에 성공한 후 옥란과 세 아들을 낳고 오순도순 산다. 문제는 첫째 아들 일락(남다름)이 열한 살이 되던 해에 터진다. 마을 사람들이 일락을 두고 옥란이 결혼 전 만났던 남자인 하소용(민무제)과 닮았다고 수군대는 것이다. 참다못한 삼관은 혈액형 대조까지 벌이는데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밝혀진다. 삼관은 11년간 남의 자식을 키웠다는 생각에 울컥해 분통을 터뜨린다. 

영화 ⓒ new 제공
잘 알려졌듯 원작은 1996년 중국 작가 위화가 발표한 소설 <허삼관 매혈기>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를 전후해 주인공 허삼관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암울했던 시대 상황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필체로 묘사하고 여기에 농촌에 강제노역 갔던 첫째 아들이 병에 걸리자 이를 살리려는 허삼관의 부정(父情)을 엮은 작품이다. 원작에서는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개인의 비극이 빚어지는 과정이 뚜렷이 드러나지만 영화는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을 걷어내고 가족 드라마로 이야기를 축소했다. 굳이 무리하게 판을 벌이느니 잘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이다.

대신 영화는 허삼관이라는 인물에 확실하게 초점을 맞춘다. 제목에서 ‘매혈기’를 정리한 것은 이러한 뜻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삼관은 속 좁기로는 밴댕이가 부럽지 않은 인물이다. 11년간 키운 아들이 남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남들 안 보는 데서는 아버지 말고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으름장을 놓는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다. 그러면서도 속상한 마음에 남몰래 쪼그려 우는 등 귀여운 구석도 있다. 일락이 병에 걸린 것을 알고 나서는 결국 자신의 피를 팔아 병원비를 마련하는 헌신적인 아버지이기도 하다.

역사적 배경 빼고 부정(父情)에 집중

하정우는 시나리오 각색에 직접 참여했다. 원작의 대사와 뉘앙스를 그대로 가져와 말맛만 더 살린 정도다. 영화를 보면 원작 속 허삼관이 하정우가 가장 잘 만들고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하정우는 “원작의 유머 감각과 삼관의 문어체 말투 같은 것이 내 성향과 잘 맞았다”고 밝혔다. 그 덕분일까. 하정우는 두 시간 동안 보는 이를 신나게 웃기고 울린다. 초반부는 거의 그의 원맨쇼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의젓하게 상황을 해결하기는커녕 옥란과 세 아들을 심란하게 하는 말을 늘어놓고 눙치는 삼관 덕분에 유쾌한 웃음이 만들어진다.

눈물 나는 부정을 그려야 하는 후반부에서도 하정우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유머러스함이 빛나는 전반부에서 분위기가 조금은 급작스럽게 바뀌는 느낌은 있지만 전체적인 호감을 떨어뜨릴 정도는 아니다. ‘전반부=코미디, 후반부=감동 드라마’라는 익숙한 공식을 부러 피하지 않은 것은 소신 있는 선택으로까지 보인다. 하정우가 그동안 함께 작업했던 여러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결론 내린바, 그것이 가장 상업영화다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모든 방점은 대중성에 찍혀 있다.

하정우의 가까운 미래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이처럼 대중적인 감각을 아는 연출가라는 점에서다. 그에게는 아이디어와 유머를 구체화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 감각을 처음으로 드러낸 것은 <577 프로젝트>(2012년)다. 이는 하정우가 한 영화제에서 수상 공약으로 내걸었던 국토대장정을 실제로 지인과 함께 하면서 그 과정을 찍어 만든 다큐멘터리다. 감독이 따로 있었지만 하정우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편집까지 거들며 만들었다.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는 아니되 그의 기획력이 드러난 작품이었다. 

첫 연출작 <롤러코스터>는 아이디어를 극영화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하정우는 그때가 “배우로서 고갈됐다는 느낌에 연출로 눈을 돌리게 됐던 시기”라고 말한다. 그는 배우 류승범이 기내에서 겪었던 일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직접 각본을 만들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문을 모아 연극 연습하듯 대본을 연습하고 리허설을 하면서 영화를 찍었다. 속사포 같은 대사와 부조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웃음이 <롤러코스터>의 포인트였다. 감독이 의도한 방향대로 관객을 몰고 가는, 어쩌면 연극이나 콩트에 더 가까운 리듬이 느껴졌다. 배우들은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는 대신 감독이 만든 틀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움직인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는 하정우의 모든 면을 나눠놓은 것 같은 인물의 집합이었다.

‘하정우식 코미디’에 주목

<롤러코스터>는 전국 27만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하정우는 이후 “초반에는 개그 프로그램처럼 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리듬이 너무 빨랐던 것”과 “나만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었던 것 같다”는 점을 흥행 저조 요인으로 꼽았다. 그랬던 그가 <허삼관>에서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리듬대로 직접 연기하니 막히는 구석이 없다. 하정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모양새로 판을 만들고 그 안에서 적확하게 연기하고 있다는, 그 적절한 호흡 조절이 <허삼관>의 백미다. 아직까진 감독 하정우에게 가장 좋은 배우는 하정우 그 자신인 것 같다.

지금 한국에서 연기와 연출을 겸하는 배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방은진은 <오로라 공주>(2005년)를 시작으로 최근 <집으로 가는 길>(2013년)까지 꾸준히 연출작을 선보이고 있고, 박중훈은 자신이 겪어온 세계를 담은 <톱스타>(2013년)로 감독 데뷔를 했다. 젊은 배우들의 행보는 이보다 조금 더 자신의 개인적인 영화 취향을 밀어붙이는 결과물에 가까운 듯하다. 영화의 규모와 대중성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작품을 만드는 구혜선과 유지태가 대표적이다. 하정우처럼 독보적인 톱 배우의 위치에서 연출까지 병행하는 경우는 유례가 없던 일이다. 그런 그가 코미디를 기본으로 한 상업영화를 잇따라 찍어내고 그 안에서 자신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하정우의 행보가 몹시 흥미롭게 보이는 건 그래서다.

하정우는 인터뷰에서 찰리 채플린과 우디 앨런을 자주 언급한다. <허삼관>을 보니, 그게 아주 허무맹랑한 지향점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하정우식 코미디’라는 표현이 하나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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